변 계량(卞 季良)과 김 구경(金 久囧)
얼마 전 내가 꿈속에서 현몽(現夢)한 시구(詩句)를 바탕으로 日速西峯去 月遲東塢來
(해는 재빨리 서산으로 넘어가고, 달은 더디게 동산에 떠오르네) 라는 대구(對句)를 얻었
을 때 스스로 신기하게 여겨 그것을 부채(扇)에 써서 간직한 일이 있다. 나 같은 사람이
이럴진대, 시인들이 득의구(得意句)를 얻었을 때의 그 만족스러워 하는 기분을 이해하고
도 남을 것 같다.
당(唐) 시인 가도(賈島)는 3 년간을 고심해 오다가 獨行潭低影 數息樹邊身 (홀로 걸어
가는 연못 아래 그림자, 자주 쉬어가는 나무 가의 몸)이라는 대구를 완성하고는 그 기
쁨에 두 줄기 눈물을 하염없이 흘리며, 친구들이 이 구절을 좋다고 하지 않으면 고향 옛
산에 돌아와 죽어 묻히겠다고 까지 고백한 바 있다. 좋은 시를 창작하려는 시인들의 의
욕이 이처럼 대단한 것이니, 한 구절에서도 글자 하나 하나의 쓰임에 까지 최선을 다했
던 옛 시인들의 일화는 자못 흥미롭기만 하다.
성 현(成 俔, 1439~1504)이 지은 용재총화(慵齋叢話)에 나오는, 조선 초 양촌 권 근
(陽村 權 近)에 이어 문형(文衡)을 잡은 춘정 변 계량(春亭 卞 季良,1369~1430)에 대한
이야기 한 토막이다.
‘문형을 잡는다’는 말은 홍문관의 수장인 대제학(大提學)을 맡는다는 뜻이다. 홍문관
은 국가의 외교와 내정에 필요한 문서를 작성하는 일을 관장하는 곳이므로, 대제학은
학문이 높고 글솜씨가 훌륭한 사람이 맡는 것이어서 문과 출신 관료의 최고 영예직이
었다.
변 계량이 바쁜 와중에 휴가를 얻어 교외의 별장에 놀면서 우연히,
虛白連天江渚曉 텅빈 흰 빛이 하늘에 이었으니 강가의 새벽이오
喑黃浮地柳堤春 어두운 누런 빛이 떠서 움직이니 버들 늘어진 둑에 봄이 왔네
라는 대구를 짓고는 득의(得意)하여 서울에 돌아가면 주상께 아뢰어야겠다고 하였다. 이
말을 전해 들은 문사 김 구경(金 久囧)은 그 구절이 매우 비루(鄙陋)하니 이것을 임금께
아뢰는 것은 임금을 속이는 일이라고 말하면서, 자신이 전에 지은
驛亭挹酒山當戶 역정(驛亭)에서 술잔을 잡으니 산이 바로 집 앞에 우뚝하고
江郡吟詩雨滿船 강군(江郡)에서 시를 읊으니 비가 배에 가득하구나
라는 대구야말로 바로 임금께 아뢸 만한 시라고 말하였다. 이 말을 전해 들은 변 계량은
김 구경이 시를 모른다면서, 전구(前句)의 ‘當’자가 온당치 않으니 ‘臨’자로 바꾸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다. 이를 전해 들은 김 구경은 ‘사람들이 변 계량이 시를 모른다더니 정말
이군, 옛시에 南山當戶轉分明 라고 한 것이 있지 않은가’ 라며 변 계량을 폄하하였다.
이를 다시 전해 들은 변 계량은, ‘옛시에 靑山臨黃河 라고 한 것이 있지 않은가. 김 구경
이야말로 정말 시를 알지 못하면서 내가 지은 것을 비웃는단 말인가’ 라고 말하였다. 서로
전거(典據)를 대며 자신이 옳다고 주장하니, 이런 경우에 정답이 있는 것도 아니고 누가
옳은지 누구의 의견이 더 온당한지를 알기가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한시의 구절에서 한 글자가 분위기를 바꾸어 시의 잘되고 못됨을 결정하는 일이 적지
않다. 한 글자를 잘 골라 씀으로서 그 구절의 뉘앙스가 매우 달라질 수 있으니, 한 글자의
중요성을 따지는 일도 한시 공부의 중요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과문(寡聞)하지만 이 경우에 내 생각은, 驛亭挹酒山當戶에서 ‘臨’자 보다는 원래의 ‘當’
자가 더 좋을 것 같다. ‘當’자와 ‘臨’자는 둘 다 마주 대한다는 뜻이니 의미상으로는 둘 다
무방할 것이다.
그러나 상황을 한번 살펴보자. 관리가 시골 역참에 들어 사무적인 일을 우선 처리할 때
산은 그저 배경의 일부분일 뿐, 일을 마치고 정자에 앉아 술잔을 기울일 때 비로서 이제
까지 느끼지 못하던 청산이 바로 앉은 눈앞에 우뚝 다가와 보일 것이다. 그러니 ‘얌전하게
다가오는 느낌’의 ‘臨’자 보다는 우뚝 눈앞에 띄이는 느낌의 ‘當’자 가 더 어울릴 것이다.
위 변 계량의 대구와 김 구경의 대구를 비교하여 나는 김 구경의 시에 점수를 더 주고
싶다. 변 계량의 虛白連天 이나 喑黃浮地 에서는 시적(詩的)이라기 보다는 서술적으로 대
(對)를 맞추기 위한 글자의 선택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어, 시인이 표현한 봄의 새벽이
자연스럽게 떠오르지 않는 편이다.
반면에 김 구경의 대구에서는, 산이 눈앞에 우뚝한 모습이 확연할 뿐 아니라, 강가의 도두
(渡頭)에서 비(雨)는 강에도 둔덕에도 내리건만, 굳이 雨滿船 이라고 표현하여 배경을 죽이
고 배(船)를 돋보이게 하는 회화성(繪畫性)이 뛰어나기 때문이다. 시인은 아마도 여주(驪州)
근방의 역참에서 술잔을 기울이다가 그곳에서 한양까지는 수로(水路)를 이용하려고 배에 앉
아서 비를 맞이하였는지도 모른다. 한 줄의 시구가 이렇게 상상의 날개를 펴게 해 주는 것이
다.
김 구경은 자신의 재주를 믿고 남을 업신 여겼다. 이러한 모난 성격으로 인해 벼슬도 현달
(顯達)하지 못하였다. 변 계량은 성질이 인색하여 작은 물건이라도 남을 빌려주는 일이 없고,
손님과 술을 나눌 때에도 손님이 마시는 술잔을 세어(數) 병에 표시를 하니 손님이 그의 낯빛
을 보고 가버리는 자가 많았다. 흥덕사에 있으면서 국조보감을 편찬할 때 세종 임금과 재상
친구들이 보낸 술과 음식이 많아 썪어 버릴지언정 아랫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는 일이 없었
다.
한 사람과 성격과 행실이 그의 시작(詩作)에 영향을 끼칠 것인가. 한 시대의 생활인이었던
그들도 타고난 성품이 있는 바 그들이 일일이 성인군자이기를 바라는 것은 무리이지만, 단지
시인으로서의 자질을 평가한다면 보는 관점은 좀 달라질 수 있다.
시(詩)란 사무사(思無邪)요, 올바른 삶을 성찰하는 작업이니, 훌륭한 인격이 훌륭한 시를 생
산하는 바탕이 되어야 바람직스럽고, 시작(詩作)에 임하는 모든 이들에게 마음 가짐에 대한 공
부 또한 중요함을 다시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