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시(詩)의 속살

내가 이렇게 외면하고 -백 석(白 石)-

겨울모자 2009. 4. 24. 12:54

 내가 이렇게 외면하고

 

   내가 이렇게 외면하고 거리를 걸어가는 것은

   잠풍날씨가 너무나 좋은 탓이고

   가난한 동무가 새 구두를 신고 지나간 탓이고

   언제나 꼭같은 넥타이를 매고 고운 사람을 사랑하는 탓이다


   내가 이렇게 외면하고 거리를 걸어가는 것은

   또 많지 못한 내 월급이 얼마나 고마운 탓이고

   이렇게 젊은 나이로 코밑 수염을 길러 보는 탓이고

   그리고 어느 가난한 집 부엌으로 달재 생선을

   진장에 지진 것도 맛있다는 말이 자꾸 들려 오는 탓이다


   잠풍날씨...... 바람이 잔잔하게 부는 정겨운 날씨
   달재.......... 달강어
   진장.......... 오래 묵어 빛이 검고 진한 맛있는 간장

 

                * *             * *               * *         

 

  시인이 거리를 걷습니다. 바람이 잔잔하고 정겨운 날이라서 코밑 수

염을 기른 것마저도 작은 즐거움으로 느껴집니다. 많지 않은 월급으로

도 지탱할 수 있는 생활이 있는 것도 마음에 기껍게 느껴지고.

 

  가난한 친구가 엊그제 새 구두를 신고 기뻐하던 모습이 생각나 입가
엔 미소가 떠오릅니다. 늘 매는 넥타이이건만 반듯이 매고서 마음속으
로 사랑하는 사람의 고운 얼굴을 그려 보니 발걸음이 한결 가볍습니다.

 

  지나치는 작은 집의 부엌에서는 도란도란 말 소리가 들려옵니다. 달
강어를 간장에 지진 것도 맛이 있다고.. 아마도 시인은 지금 사랑하는
이를 만나러 가는 길이 아닐까요. 눈에 보이는 모든 것, 머리를 스치는
모든 생각이 아름답고 사랑스럽게 느껴지지만...

 

  즐거움은.. 때론 즐겁지 않은 척 무표정으로 맞고 싶을 때가 있습니
다. 어린 아이가 사탕을 아끼듯, 시인은 자신의 즐거움이 혹시라도 닳
을까 하여 짐짓 외면하고 걷지만.. 마음 속엔 조금 아까 들은 달강어
이야기가 자꾸 들려 오는 것 같습니다. 누군지도 모를 이들이 작은 일
로 즐거워 하는 것이 마치 지금 자신의 마음과 닮은 것 같아서..

 

  백 석 시인은 1912년 7월 1일 평안북도 정주에서 태어났습니다. 서울

과 이북 그리고 일본과 만주에서도 활약하던 그는 해방 후 이북에 남아

우익 시인으로 활약하며 꾸준히 서정적인 시와 산문을 발표했으나 그들

의 우상주의에 맞지 않아 끝내는 숙청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1987년 해금 이후로 우리 문단에서도 집중 조명을 받아, 대부분 토
속어로 씌여진 그의 시들이 비로서 우리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했으며,
그의 시에는 이렇게 아름다운 우리의 토속어들이 생생히 살아 있어 국
내외적으로도 우리말을 아끼고 발전시킨 독보적 존재로 인정 받고 있
는 시인이지요.

 

  더 훌륭하고 좋은 시들이 많지만, 이 시는 그가 27세 때, 함흥 영생
고보(永生高普)의 영어 선생으로 재직할 때 발표한 것으로, 백 석 시에
서 흔히 볼 수 없는 따뜻하고 즐거운 진술이 마음에 들어서 올려 봅니
다.  (2003. 7.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