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용서

   이번 연말에도 어김없이 베토벤의 합창 교향곡을 들으며 환희의 송가 가사
를 음미해 보았다. 영어보다는 어감이 좀 딱딱하면서도 그래서 더 묵직한 느
낌을 주는 언어가 음악의 옷을 입고 참으로 멋진 걸작으로 다시 탄생한 것이
다.

 

  세계인들이 애호하는 이런 아름다운 예술의 소산들이 자신들이 늘 사용하
는 일상 언어로 되어 있는 그들은 얼마나 좋을까 라는 생각도 해 본다.

 

  클래식 음악 뿐 아니라 일상 생활에서의 절약 정신과 믿음직한 과학 기술
로 우리 머릿 속에 깔끔한 이미지로 각인된 나라, 괴테와 쉴러의 나라, 바흐

와 베토벤의 나라가 히틀러의 독일에 이르러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광기에
빠져 씻을 수 없는 죄악을 저지른 것이다.

 

  '모든 인류가 신의 날개 아래서 한 형제 되리라'는 계시를 해마다 우리에

게 전해주는 그 멋진 독일어가, 수용소에서 사살(射殺)을 명(命)하는 입으

로부터 거칠게! 그리고 가혹하게! 터져나오는 장면은 참으로 보는 이의 마

음을 아프게 한다. 

 

  아우슈비츠 해방 60년. 다큐에서 보는 그 긴 죽음의 행렬. 개인과 마찬가
지로 국가도 좋은 일을 하고 착한 마음을 먹다가도, 때론 사탄의 유혹에 빠
져 돌이킬수 없는 죄악을 저지르기도 한다.

 

  500만 명을 학살당한 그 민족의 아픔이야 말할 것도 없겠지만, 역사를 돌
이켜 보며 자성(自省)하는 독일인들의 자책과 아픔 또한 얼마나 클 것인가.

 

  오늘 보았던 영상(映像) 하나가 다시 떠오른다.

 

  150명에 달하는 오케스트라가 무대에 빈틈이 없을 정도로 가득 앉아서 베

토벤의 교향곡 5번 ‘운명’을 연주하고 있다. 바이올린과 비올라의 활들이 마

치 숲을 이룬 듯이 솟아나고, 바순 트럼펫 트롬본은 각각 6명, 호른은 무려

9명의 주자가 연주를 하는 대(大)오케스트라의 장관이 연출되고 있다.

 

  이 대(大)오케스트라는 베를린 필과 이스라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를 합쳐
서 특별 편성된 것이다. 장소는 텔아비브의 만 오디토리움. 2차 세계대전의
가해자였던 독일과 피해자였던 이스라엘이 이렇게 화합하여 독일 음악을 연
주하고 있다.

 

  이스라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는 1936년 창립 당시 독일 음악은 연주를 하
지 않겠다고 선언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증오의 괴로움을 알기에 그것을 사랑
으로 대치하려는 인간의 본성(本性)은 이렇게 다시 화합의 장을 마련한 것이
다.

 

  2악장이 끝나자 지휘자는 모든 연주자들의 자리를 바꾼다. 1,2 악장에서는
독일 연주자들이 주로 제1 연주자를 맡았으나, 3, 4악장에서는 이스라엘 측이
주로 제1연주자를 맡도록 계획되었기 때문이다. 흔히 볼 수없는 풍경에 청중
석에서도 탄식과 술렁거림이 흘러 나온다. 

 

  지휘하는 주빈 메타의 앞 머리칼은 땀에 젖어 이마에 붙어 있고, 엄숙하게
다가오는 운명을 받아내어 가슴 속에서 승화된 극복의 의지 같은 것이 음악에
서 피어날 때, 이윽고 지휘자의 표정에서도 감동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인간
은 용서할 수 있어서 위대하고, 운명을 극복하고 넘어설 수 있어서 또한 위대
하다.

 

  그러나, DVD 영상 음악회에서 오늘 감상한 이 장면은 1982년도의 영상이다.
28년이 흐른 지금, 세계는 아직도 여전히 싸우고 있다. 인간이 만들어내는 사
랑에 감동하다가도 역시 인간이 만들어낸 증오에 가슴 졸이는 작금(昨今)의 상
황. 진정한 용서와 아량으로 지구촌의 그야말로 강구연월(康衢煙月)은 불가능
한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