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모자 2010. 7. 7. 11:57

 

 

 

 

  오늘은 한 달에 한 번 K읍의 복지관으로 노력(勞力)봉사를 가는 날이다. 한 달이 어찌나 빨리

지났는지 금세 돌아온 봉사일이지만, 매월 첫 주일(主日)인 이 날은 반갑기만 하다. 땀을 흠뻑

흘리고 나면 몸도 마음도 사우나를 한 것 같이 개운해지기 때문이다. 어디 그뿐인가. 숲에서 밭

에서 불어오는 향기로운 바람과 온갖 새소리를 보너스로 받을 수 있으니, 이런 봉사는 한 달에

두 번이라도 좋을 것 같다.

 


  우리 팀이 오늘 할 일은 잡초 뽑기. 지정된 건물의 정문 계단과 길게 조성된 화단에 무성하게

자란 잡초를 제거하는 일이다. 회양목과 영산홍 사이로 무성하게 자라 엉킨 잡초들을 뿌리까지

뽑아내고 바닥 흙을 고르니 마치 이발을 한 것처럼 산뜻한 모습이 되었다. 실처럼 가느다란 이

슬비가 계속 내려 빗물에 신발과 양말까지 젖고 등줄기에 땀이 흥건했지만 봉사를 마치고 즐거

운 마음으로 점심을 먹으러 근처의 쌀밥집으로 갔다.

 


  점심을 먹으며 요셉 형제님이 말한다. 이슬비를 보니, 강구항의 바닷가 횟집에 앉아 바다를

바라보던 일이 생각난다고... 그러자 그 말에 전염이나 된 듯 이상하게도 모두들 마음이 술렁

술렁... 다음 주에 갈까... 말 나온 김에 지금 갔다 오면 어떨까... 로 이야기가 급진전되어....

점심 식사 후 바로 속초로 출발하기로 결정을 했다. 쉽지 않은 일이 발생한 것이다. 서울에 볼

일이 있는 두 분을 제외한 4명이 출발하기로 했다.

 


  나의 견진 대부이신 세례요한님, 우리 쁘레시디움의 단장이신 안드레아님, 그리고 역시 서기

를 맡고 계신 요셉님 그리고 나, 이렇게 4명의 단촐한 여행이 시작된 것이다. 갑작스럽게... 이

왕 가는 것, 경치를 보며 가는 것이 좋을 듯하여, 곤지암에서 양평으로 넘어가 홍천-인제-한계

령 길을 택하기로 하였다. 평범한 일요일 오후가 되었을 우리의 일상이 깨어지고, 오랜만에 가

보는 동해안 바닷가의 풍경을 그리며 4명이 탄 차속에 가벼운 흥분이 흐른다.

 


  소나무 잣나무가 빽빽한 푸른 산을 바라보며, 평소에 나누기 어려운 한담(閑談)을 즐기다보

니 차는 어느새 인제 원통을 지난다. 산이 점점 높아지며 수도권에서는 보기 힘든 수려한 모습

의 적송(赤松)들을 감상하면서 드디어 한계령을 오른다. 매우 더운 날인데도 이곳의 공기에는

깊은 산의 찬 기운이 스며 있다.

 


  올라가면서 보니 산의 정상 쪽 삼분의 일이 구름에 가려 있다. 그 구름 아랫자락에 도달하여,

안개 속을 더듬어 한계령 휴게소에 도착하고 보니, 우리는 지금 구름 속을 거닐고 있는 것이다.

그야말로 Walk in the cloud! 구름을 밟고 다니고 있는 것이니, 대뜸 조선 시인 이 달(李 達)의

불일암(佛日庵) 시가 떠오른다.

 


                         寺在白雲中      절은 구름에 묻혀 있고

                         白雲僧不掃      스님은 구름 쓸지 않아

                         客來門始開      바깥 손 와서야 문 열어보니

                         萬壑松花老      온 골짝에 송화가루 날리네

 


  구름이 산봉우리를 가리면 그 구름을 손으로 쓰윽 쓸어내고 산봉우리를 보고 싶어진다. 스님

이 구름을 쓸어버리고 산과 절의 모습을 객(客)들에게 드러내 주면 좋으련만, 스님은 구름을 쓸

어내지 않는다. 그 속에 감추어진 채로 유유자적(悠悠自適)할 뿐이지.... 우리도 구름을 쓸지 않

고 살짝살짝 가려 밟으며 차에 올라 이제 구름 밖으로 속초를 향해 내려가기 시작했다.

 


  속초에 도착하여 우선 영금정(靈琴亭)을 찾아 갔다. 파도가 바위에 부딪혀 신비한 소리를 낸

다고 하여, 신이 거문고를 연주한다는 뜻으로 지은 이름이라고 한다. 바다에 면한 작은 산과 정

자 앞 물 속에 보이는 석벽과 같은 바위가 절경의 요건은 갖추었으나 옛날이었다면 모를까, 다

닥다닥 지어진 시멘트 건물들이 영금정의 아름다움을 다 감추어버렸다. 아쉬운지고...

 


  오래되었다는 영금정 횟집의 전망 좋은 2층 창가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깔끔한 반찬과 멋지

고 풍성한 횟상이 들어오고, 소주를 두어 순배 돌리니 벌써 모두의 마음속에 시원한 파도 같은

것이 찰랑거린다.

 


  제일 시정(詩情)이 넘치는 분은 아마도 세례요한님이다. 바위와 파도와 바닷새와 석양을 바라

보며 마음속에 시를 쓰고 계심이 분명했다. 그래서 한 수 부탁드렸더니, 과연

 

                          잡초 뽑느라 흘린 땀이 마르기도 전에

                          어느새 동해 파도 바라보며 술잔을 드네


 

라고 읊으신다. 감탄! 또 감탄이다! 나도 나름대로 오늘 여행을 한시로 구상하고 있었는데 세례

요한님의 이 시구(詩句)를 내게 달라고 조를 예정이다. 내가 구상하는 한시의 한 부분으로 편성

하려고...

 


  석양과 바다가 어우러지며 어둠이 내리는 시간의 색조변화는 황홀하기까지 하다. 술을 천천히

따르고 권하며 이야기꽃을 피우던 중, 어두움이 내리는 수평선에 밝은 흰 점 하나가 켜진다. 아!

하고 일제히 바라보니 여기저기 밝은 점들이 이어서 나타난다. 하나, 둘, 셋 하던 것이 분초(分

秒)가 흐르며 열하나 열 둘.... 열 여덟... 멀리서 찾아온 객들에게 지금 이곳 이 시간이 주는 선물,

오징어잡이 배들의 어화(漁火)다.

 


                         初來只見一星呈      처음엔 하나만 반짝이다가

                         須臾二星三星出      금세 별 둘 별 셋이 되고

                         三星出後衆星爭      별 셋 뒤엔 뭇별들이 다퉈 나와서

                         的的歷歷紛錯亂      깜빡깜빡 반짝반짝 어지럽게 빛나니

 


  정약용 선생의 시에 나타난 상황을 지금 우리는 보고 있는 것이다. 선생은 나이 들어 머리에 백

발이 생겨나는 것을 이렇게 초저녁 하늘에 별이 나타나는 모양으로 읊으셨지만, 바로 지금 우리

가 보고 있는 수평선의 어화(漁火)도 또한 별처럼 또렷한 영상으로 남아 당분간 우리 마음 속 스

트레스를 부드럽게 어루만져 줄 것이다.

 


  안드레아 단장님이 술잔을 놓더니 갑자기 학교 때 외웠던 소동파의 적벽부를 읊는다... 임술 가

을 7월 기망(旣望)에 소자(蘇子)가 손(客)과 배를 띄워 적벽(赤壁) 아래서 노니, 맑은 바람은 천천

히 불어오고 물결은 일지 않네......

 


  아하 이거! 너무 좋아서 명치 께가 간질간질하다. 요셉님은 바다 파도의 생성 원리를 싸인 코싸

인의 법칙을 들어가며 설명해준다. 그리고 또 고고인류학과 유물발굴이라는 분야에 대한 지대한

관심과 자신의 꿈 이야기를 펼친다. 이런 자리를 마련하고서야 저렇게 깊숙한 속들을 보여주시니!


 

  일상의 충실한 일꾼이 되어 꿀벌처럼 늘 바삐 오가던 우리들에게, 가끔은 이런 일탈성(逸脫性)

여행도 필요한 것이다. 이렇게 환경을 바꾸어 대화를 나누다보면, 몇 년을 함께 지내온 우리 레지

오 마리애 단원들이지만 그동안 서로 몰랐던 마음속을 들여다보게 되고, 서로가 서로에게 더욱

다정한 존재로 다가서게 되는 것이 사실이다. 봄 가을로 시행하는 우리 레지오 마리애의 야외친

목행사의 목적도 바로 이런 점이 아닐까....

 


  시간이 꽤 되었다. 영금정을 둘러싼 인조물들은 어둠에 묻히고, 예의 그 거문고 소리 같다는 파

도 소리만 눈앞에 가득 밀려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