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칭의 미학
조선의 문신 채 수(蔡 壽)에게 무일(無逸)이라는 손자가 있었는데, 나이 겨우 대여섯 살이었을 때
밤에 채 수가 무일을 안고 누워서 먼저 시 한 구절을 지었다. ‘孫子夜夜讀書不/ 손자야야독서불’ 즉,
손자는 밤마다 글을 읽는가? 라는 내용이었는데, 이에 대해 대구(對句)를 지으라고 하니 무일은 ‘祖
父朝朝飮酒猛/ 할아버지는 아침마다 약주를 몹시 드시네’ 라고 대구(對句)를 채웠다.
또 한 번은 채 수가 무일을 업고 눈길을 걸어가다가 문득 시 한 구절을 읊으니 ‘犬走梅花落/ 견주
매화락’ 즉, (눈길에) 개가 달리니 (발자국이) 매화꽃이 떨어진 것 같구나...라는 내용이었다. 이에
대해 무일이 즉시 대구(對句)를 읊기를 ‘鷄行竹葉成/ 계행죽엽성’ 즉, 닭이 지나가니 (발자국이) 댓
잎 모양 생겨나네... 라고 하였다. 그 손자도 참 어지간히 총명하였던 모양이다.
孫 子 夜 夜 讀 書 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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祖 父 朝 朝 飮 酒 猛
각 글자가 의미상으로 대(對, 대칭)를 이루었을 뿐 아니라, 형용사 명사 부사 등의 품사(品詞)와 목
적어 관형어 등의 성분까지도 정확히 대를 이루었고, 孫子 ⟷ 祖父, 夜夜 ⟷ 朝朝, 讀書 ⟷ 飮酒 등
의 단어 구성도 정확히 대를 이루었다.
犬 走 梅 花 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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鷄 行 竹 葉 成
여기에서도 순서대로 각각 동물대(對), 동사대(動詞對), 식물대(植物對), 동사대(動詞對)를 이루었
고, 梅花 ⟷ 竹葉 의 단어도 정확한 식물대이다.
송강 정철(鄭澈)이 관동부사(關東府使)를 지낼 때 강원도의 약수(藥水)라는 곳을 방문하여 ‘地名
藥水難醫疾/ 지명약수난의질’ 즉, 땅 이름이 약수이건만 병을 고치기 어렵고... 라고 한 구를 지었
더니, 옆에 있던 이가 이를 받아 ‘驛號餘粮未救飢/ 역호여량미구기’ 즉, 역 이름이 여량(餘粮, 남는
양식)이건만 기근 구제 못하네... 라고 대구를 지어서 달았다고 한다. 여량은 정선 아우라지가 있는
마을 이름이다.
각 글자와 단어가 대(對, 대칭)를 이루었을 뿐 아니라, 근처에 실재(實在)하는 지명을 넣어서 글을
지었기에 더 재미가 있다.
조선의 차 천로(車 天輅)라는 분이 친구와 함께 있을 때, ‘風無一足行千里/ 풍무일족행천리’ 즉, 바
람은 발 하나 없이 천리를 가네... 라고 읊자, 친구가 즉시 ‘月有孤輪轉九天/ 월유고륜전구천’ 즉, 달
은 외바퀴로 구천을 건너가네... 라고 대구를 달아 붙였으니,
風 無 一 足 行 千 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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月 有 孤 輪 轉 九 天
자연물과 있고 없음, 동사, 숫자, 거리의 대(對, 대칭)를 정확히 이룬 수작(秀作)이라 할 수 있다.
꼭 필요한 짝을 서로 정확히 만들어 붙인 순간, 이 두 사람의 마음에 생겨난 한갓진 충족감은 얼마
나 컸을까. 이것이 바로 옛 시인들이 시 짓기가 고통스럽다고 하면서도 늘 이 정신적 유희(遊戱)에
몰두하던 이유라고 할 수 있다.
중국 송(宋)나라의 관 사복(管 師復)이라는 시인의 대구(對句) 몇몇을 살펴볼까.
滿塢白雲耕不盡/ 만오백운경부진 둔덕 가득 흰 구름은 갈아도 끝이 없고
一譚明月釣無痕/ 일담명월조무흔 못 속의 밝은 달은 낚아도 자취 없네
竹影掃階塵不動/ 죽영소계진부동 섬돌 쓰는 대 그림자 먼지는 그대로요
月光穿沼水無痕/ 월광천소수무흔 못을 뚫는 달빛에도 물은 흔적 없네
앞서 설명한대로, 각 글자와 각 단어 또한 그 품사와 성분까지도 정확한 대(對, 대칭)를 이룰 뿐 아
니라, 앞 구와 뒷 구가 조화롭게도 소위 꿰맨 흔적 하나 없이 매끈한 풍광을 묘사해 놓았다. 이런
훌륭한 작품들을 계속 읽다보면, 우리가 처한 눈앞의 모든 환경이 마치 원래부터 이런 대칭 구조로
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 때도 있다.
그림이나 사진에서는 이러한 대칭 구도를 기피하는 경향이 많지만, 한시에서는 그렇지 않다. 5 언
시나 7 언시나 모두 4줄짜리 절구(絶句)에서는 이러한 대(對, 대칭)를 꼭 이루어야 하는 규칙은 없
지만, 8줄짜리 율시(律詩)에서는 3구와 4구, 그리고 5구와 6구가 위와 같은 대(對, 대칭)을 꼭 이루
어야 하는 규칙이 있다. 그러니 절구보다는 율시가 훨씬 더 짓기가 까다로운 것이다. 한 건만 더 보
기로 할까.
청(淸)나라의 사치엄(史致儼)이라는 시인이 아홉 살 때 현시(縣詩)에 응시하였다. 현령(縣令)이
출제한 문제는 ‘閒看門中月/ 한간문중월/ 한가로이 문 가운데 달을 보면서’라는 구절에 대한 대구
를 짓는 문제였다. 그는 이에 대해 ‘思耕心上田/ 사경심상전/ 생각은 마음속의 밭을 간다오’ 라고
대구를 지어 붙였다고 한다.
閒看門中月/ 한간문중월/ 한가로이 문 가운데 달을 보면서
思耕心上田/ 사경심상전/ 생각은 마음속의 밭을 간다오
閒 看 門 中 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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思 耕 心 上 田
각 글자가 의미상으로나 품사로나 잘 어울리는 대(對, 대칭)을 이루었고, 앞 뒷 구의 이미지도 잘
어울리며 한 줄기의 시상을 간결하게 잘도 담아냈다. 그뿐이 아니라, 앞 구에서, 門中月/ 문중월(문
안의 달), 즉 문(門) 안에 월(月)자를 넣으면 제일 첫 글자인 한가할 한(閒)이 되는 것인데, 이 시인
의 대구에서 心上田/ 심상전(마음 속의 밭), 즉 마음 심(心)자 위(上)에 밭(田)을 올려놓으면 제일
첫 글자인 생각 사(思)가 되는 것이니, 이 구(句)를 지은 이는 그야말로 대칭이라는 어려운 한시 규
칙의 머리 꼭대기에 앉아 있는 격이다.
미흡하나마, 작년에 내가 지었던 5언 율시 ‘전가(田家)’를 올려본다. 3, 4구 와 5, 6구가 훌륭한 대
(對, 대칭)을 이루어야 함은 내게 있어서 늘 끝나지 않는 숙제이다.
朝陽勤上照 아침 해 부지런히 떠올라 비추니
布穀促鋤田 뻐꾸기는 김 매라고 재촉을 하네
靑竹微風裊 푸른 대잎은 산들바람에 살랑살랑
紫薇淨露鮮 붉은 장미는 이슬 먹고 더욱 선명해
鳥喃茅屋角 초가집 모퉁이에 뭇새들 조잘조잘
狗睡檍扉前 싸리문 앞에는 강아지 졸고
老翁呼兒道 노인은 아이 불러 말하길
鷄雛護戒鳶 솔개 올지 모르니 닭 병아리 잘 지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