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시(漢詩)의 맛과 멋

토포악발 (吐哺握髮)

겨울모자 2010. 9. 16. 10:42

   공자(孔子)가 살아계시던 때로부터 약 500년 전, 지금으로부터는 무려 3,000년 전의 이야기이

다. 은(殷)나라 말기에 주(周)나라를 세운 문왕(文王)은 두 아들이 있었는데, 큰 아들이 무왕(武

王)으로 대를 이어 다스렸고, 둘째 아들인 단(旦)은 형을 잘 보필하며 나라를 튼튼히 하여 사람

들은 그를 주공(周公)이라 부르며 존경하였다.

 

 

   무왕이 죽자 그 아들이 너무 어려, 삼촌인 주공은 조카 성왕(成王)을 도와 17 년간을 섭정(攝

政)하면서, 반란을 진압하며 봉건제를 확립하고 예악과 법도를 제정하여 나라의 기초를 닦는 한

편, 어린 왕이 성군이 되도록 가르치는 일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이러한 주공의 인물됨과 평판은 널리 알려졌고, 실제로 모든 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그에게 왕

으로 등극하라는 꼬임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주공은 일편단심 나라의 기틀을 잡아 창업을 안

정시키는 일에 주력하여, 드디어 굳건한 주나라를 만들어 성년이 된 조카 성왕에게 다시 돌려주

게 되었다. 어쩐지 조선의 수양대군이 생각나는 대목이다.

 

 

   주공은 일찍부터 후에 공자가 태어난 노(魯)나라의 제후에 책봉되어 노공(魯公)이라고도 불렸

으며, 사직의 안정을 도모키 위해 자신은 주나라에 남고 우선 아들 백금을 노(魯)에 보냈다. 후세

에 공자는 논어 술이편(述而篇)에서 “아아, 나도 많이 늙었구나, 이렇듯 오래도록 꿈에서 주공을

뵙지 못하다니..” 라고 할 정도로 노나라의 시조인 주공을 스승으로 생각하며 존경하였다. 유가

(儒家)에서는 주공도 성인(聖人)으로 숭상하여, 산동의 곡부(曲阜)에 가면 공자의 사당처럼 주공

의 사당도 잘 보존되어 있다고 한다.

 

 

   무릇 나라를 창업하고 다스리는데 올바른 인재(人才)를 알아보는 눈과 그들을 등용 배치하여

그 능력을 십이분 발휘하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주공은 스스로 왕자(王子)이고 제후였지만

현인(賢人)들을 대할 때는 겸손함을 지상으로 삼고 행동하였다.

 

 

   주공은, 노(魯)나라로 떠나는 아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나를 찾아오는 현인이 있다면 비

록 식사중이거나 혹은 머리를 감을 때라도, 먹던(哺) 것을 뱉어내고(吐) 또 감던 머리카락(髮)을

두 손으로 쥐어(握) 잡으며 나가서 그를 맞이하였다.” 나랏일을 할 훌륭한 인물을 얻기 위하여 진

정으로 예와 정성을 다할 것을 가르친 것이다.

 

 

   먹던(哺포) 것을 뱉어내고(吐토) 또 감던 머리카락(髮발)을 두 손으로 쥐어(握악) 잡았다고 하

여 ‘토포악발(吐哺握髮)’ 이라는 말이 생겨났다. 즉, ‘토포악발’ 이란 훌륭한 인격을 갖추어 세상

사람을 겸허하게 대하는 것을 말한다.

 

 

   후세에 시인 도연명의 시대에 살던 육기(陸機)라는 시인은 다음과 같은 시를 썼다.

 

 

        君子防未然 (군자방미연)    군자는 미연에 방지하여

        不處嫌疑間 (불처혐의간)     의심 받는 곳에 처하지 않는다.

        瓜田不納履 (과전불납리)    외밭에서는 신발을 고쳐 신지 않고

        李下不整冠 (리하부정관)    오얏나무 아래서는 관을 바로잡지 않는다.

        ..............                        .................................................   

 

        周公下白屋 (주공하백옥)    주공은 초가집에서 살면서

        吐哺不及餐 (토포불급찬)    먹던 밥 뱉어내며 식사도 제대로 못하고

        一沐三握髮 (일목삼악발)    한번 목욕에 세 번 머리칼 움켜쥐고 나왔으니

        後世稱聖賢 (후세칭성현)   후세 사람들이 성인이라 일컫도다.

 

 

   그러나, 권력을 가지게 되면 거만해지기 쉬운 것이 사람의 속성이다. 다소 거만하게 행동을 하

여도 아무 탈이 없으며 주위에서 뭐라고 하는 이도 없으니, 자칫하면 사람으로 하여금 겸손의 미

덕을 잃게 하는 것이 권력이다.

 

 

   우리나라의 이야기를 하나 해 보자. 조선 전기에 윤 효손(尹 孝孫)이라는 이가 있었다. 이름처

럼 매우 효자였다. 그의 아버지는 의정부의 하급 관리로서, 공적인 일로 어느 날 새벽 에 좌의정

의 집을 찾아가 면회를 신청하고 기다렸으나, 시간이 지나도 문지기는 정승이 취침중이라며 연락

을 해주지 않았다.

 

 

   해가 늦어져 배도 고프고 피곤하기도 하여 그냥 집으로 돌아가 아들에게 말했다. 나는 재주가

없어 이처럼 모욕을 당하고 사니 너는 아무쪼록 학업에 힘써서 네 아비처럼 되지 말아야 한다고.

효손은 그 이야기를 듣고, 아버지가 갖고 다니는 명함의 끄트머리에 다음과 같은 시를 지어서 써

놓았다.

 

 

      相國酣眠日正高 (상국감면일정고)     상국은 달게 잠들어 있고 해는 높이 떠올랐는데

      門前刺紙已生毛 (문전자지이생모)     문전에 들인 명함에는 벌써 곰팡이가 슬었구나

      夢中若見周公聖 (몽중약견주공성)     꿈속에서 만약 성인 주공을 만나신다면

      須問當年吐握勞 (수문당년토악로)     당시 그 토포악발하던 수고를 물어보시라

 

 

   윤 효손의 아버지는 명함에 글귀가 적힌 것을 모르고 다음날 다시 정승의 집을 찾아가 명함을

들여보냈다. 정승이 그 명함에 쓰여 있는 시를 보고 “이것은 자네가 쓴 것인가?” 하고 물었다.

윤 효손의 아버지가 어쩔 줄 몰라 쩔쩔매며 글을 들여다보니 아들의 필체인지라 사실대로 이야

기하였다.

 

 

   정승이 효손을 불러오게 하여 만나보니, 총기 있고 잘 생긴지라 대단히 탄복하며 칭찬하였다.

정승은 마침 사윗감을 고르고 있던 차라, 안으로 들어가 부인에게 좋은 사윗감을 찾아냈노라고

말하였다. 부인은 딸을 하급관리의 아들과 결혼시킬 수 없다고 반대하였지만, 정승은 아랑곳없

이 그를 사위로 삼았다.

 

 

   윤 효손은 이후에 급제하여 나중에 벼슬이 판서에 이르렀다. 그 정승은 박 원형이라는 분인데,

비록 그 당시 ‘토포악발’ 은 못하였지만, 사람을 보는 안목은 갖추었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