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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츠 리스트의 생애와 음악 (펌)

겨울모자 2010. 9. 29. 13:16

              

                          
 프란츠 리스트의 생애와 음악


예술가를 영웅으로 하는 개념은 낭만주의사상의 중핵이었다.
1827년에 베토벤의 초인적인 작업에 종지부가 찍혔을 즈음, 젊은 날의 모차르트가 불경죄로 비난을 받 은  일이나, 나이든 하이든이 런던의 상류계급으로부터 당연한 박수와 경의를 받았 다고  해서 놀라 눈을 휘둥그렇게 뜨던 시대는, 먼 과거의 일이 되고 말았다. 예술 가를  보호한다는 제도가 없어진 것이 아니고, 낭만주의 운동이 공화정체를 열망하 고 있었던 것도 아니었으나, 리스트가 사회적 계급제도를 고치려고 하지 않고 다만 좌석의  배열을 고쳤을 뿐이라고 한다면 부당한 일이다.

                  

                               젊은 날의 리스트

낭만주의 작곡가들은 괴테 나  베토벤으로부터  셰익스피어, 단테, 미켈란젤로, 호메로스 등 사회적 제여건을 초월하여  예술의 날개를 타고 파르낫소스에 도달한 사람들을 영웅으로서 숭배했는 데 세간의 일반 사람들은 살아 있는 영웅을 찾았다.
리스트는 그 시대의 바로 그런 사람으로  그의  뛰어남과 어리석음이 모두 합친 낭만주의의 화신이었으며, 왕후와 교제하고, 여자들에게 인기가 대단한 초인이었다. 그의 음악은 낭만파 예술을 요약 한 것이었으며, 베를리오즈의 신 같은 광기, 쇼팽의 귀족적인 시정, 멘델스존의 쾌 적한  도회성,  수만의 뜨거운 내성 등을 포함한 것이었다. 그에게 빠진 것이 있다 면, 예(藝)를 극한 배우의 확신을 가지고 연기하거나, 당할 자 없는 화려한 연주로 써 사람을 현혹시켜 버리는 것이었다.

이리하여 전설이 생기고 자라나는데, 음악의 장래에 영향을 미친 작곡가였던 그 를 장사지내고 말았던 것이다. 원숙기 초기에 그는 베토벤 후기의 작품에 도전하였 고,  마침내는  그  자신의  말을  빌린다면 "미래를 향하여 멀리까지 창을 던졌던 것"인데 그 창이란 만년에 있어서 시대에 앞선 실험적인 시도였다.
그는 아주 다방 면에 걸쳐 일을 했으므로 작곡가 이외의 피아니스트, 지휘자, 교사, 프로모터의 경 력에 관해서는 일일이 설명할 수 없다.

더욱이, 연인, 여행가, 낙천가의 면에 관해 서는  다  쓸 여유가 없다. 가장 열렬한 리스트 애호가라도 그렇게 세세한 것은 쓸 필요성이  없음을 인정하겠지만 그 사정의 장애가 되는 것은 이전부터 있었던 일인 데 그의 편을 드는 사람과 분개하는 도덕가들 사이의 심히 대립하는 주장과 유포된 편견이다.  

이러한 스케일이 큰 인물, 국제적 명사는 리스트 이전의 음악에서는 거의 볼 수 없었다. 분명히 헨델과 하이든(만년의)에게는 영광의 시절도 있었으나 음악의 역사 는  그때까지는 고용된 근면한 음악가들에 의해서 기록된 것이어서 그들은 얼마 안 되는 급료 때문에 특권적이며 폐쇄적인 지역사회의 요구를 충족시키는 작곡을 했던 것이다.
그들에게 과해진 평범한 일에 비범한 창조적 재능을 불어 넣은 것은, 뜻하 지 않게 후세의 사람들에게 은혜가 된 것이다.


리스트가 무대에 등장한 것은「예술 을  위한 예술」이라는 생강이 차츰 인정받게 되고서부터이며, 철도가 발달하고(장 거리  여행이 가능하고), 많은 청중이 생겨났는데, 그 다수화한 청중이 슈퍼스타를 갈망하는  소리는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리스트는 각지를 뛰어 돌아다니는 독주 의 거장일 뿐만 아니라, 허리우드의 영화 배우나 전후의 로크 아이들의 원형이기도 했다.
넥타이를 300개 가지고 싶은 꿈을 자랑하던 소년이었던 그가, 영웅숭배의 대 상이  되는  인간에게 있게 마련인 교만과 탐욕의 유혹에 저항했다고는 할 수 없으 나,  그러면서도 고독이나 수도승의 간소한 생활을 추구하는 마음은 10대부터 있었 다.  

그것은 차츰 강해져서 만년에는 지배적이 되었다.
오늘날과 같이 보다 자유롭 고  심리학적으로 방향이 잡혀진 시대라면,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모순된 그의 성 격도(이것이  그의 옹호자와 그를 나쁘게 말하는 사람을 다 자극하는 것이지만) 받 아들여질  수도 있고 이해도 될 것이다.  
자기 애들은 돌보지도 않고, 동료 음악가 들에게는  한없이  친절하고 사심 없는 아량을 보이고, 사례금을 받지 않고 장기간 가르치기도  한 인간을 어떻게 생각하면 좋을까?

그는 17세 때에 성인의 생활을 동 경하여, 가능하면 순교하고 싶다고 할 정도여서, 결국 50대에 성직에 나갔다. 그런 데 그의 애정생활을 성인은 커녕 때로는 더욱 문란해졌다.

마찬가지의  모순은  그의 음악에도 많다.

그의 원악의 대부분은 야하고 저속한 취미에 열을 낸다고 혹평되었다.
그러나 그는 교회음악을 많이 작곡했는데 그의 교 회음악은  엄숙하고 단조로워서 청중을 얻지 못했다. 그의 많은 악기작품에는 경건 과  관능적인 성격이 이웃해 있다.

그의 가장 뛰어난 작품에 있어서도 범용하고 거 창한 경과구가 있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한편 가장 보잘 것 없는 작품 가 운데도 비상한 아름다움과 영감이 풍부함을 지니고 있었다.

인간적인  나약함과 어리석음과 함께 이렇게 다양한 천재적 재능을 하늘에서 부 여받은 사람은 의심을 받고 적의로서 대해진다 해도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리 스트의  경우  그 다양한 재능은, 감정이나 경험을 예술 속으로 가져오는데 한계를 모르는  낭만주의의  기수로서의 그의 운명에 멋지게 들어맞았던 것이다.
낭만주의 음악의  흐름의 끝에서 말러의 신성한 교향곡은 우주적인 경험을 하나의 작품에 꽉 꽉  채워 넣기를 바랐으나, 그것은 리스트의 무한의 개념의 연장선상에 있다.
《순 례의  해 첫 해》속의 한 곡에 바이런의 시의 다음과 같은 인용을 머리말로서 붙였 을 때 그는 자기 자신에 관해서 얘기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자기 안에 살고 있 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둘러싼 것의 일부가 된다."


출생과 소년시대

프란츠(페렌츠)리스트는 11811년 10월 22일에 헝가리의 도보르얀 마을에서 태어 났다.  이곳은 당시는 리이딩이라는 독일 이름으로 널리 알려져 있었다. 전설을 좋 아하는 사람들은 1811년은 혜성이 나타난 해였다고 해서, (그것은 사실이다) 그 사 내  아이의 혈관에는 귀족의 사생아이거나 집시의 피가 흐르고 있다고(이것은 사실 이  아니다) 은근히 비친다.
아버지 아담 리스트는 광대한 에스테르하지 후작의 영 지에서 재산관리인을 하고 있었는데, 아마추어 첼리스트로서 하이든과 훔멜과도 아 는 사이였다.  

리스트의 비상한 재능은 5, 6세 때 피아노의 의자에 처음 기어올라간 그 순간부 터 나타난 것 같다. 그의 아버지는, 이 아이의 재빨리 움직이는 손가락으로 집안의 재정이 어떻게 변하는지를 곧 깨닫게 된다.
1820년에 그는 에스테르하지 후작의 궁 전에서 열린 헝가리 고관들의 집회석상에서 아이를 소개하고, 그 결과 프란츠의 음 악교육에 필요한 연간 600굴덴의 기부금을 얻었다.
그래서  집을  빈으로 옮겼다. 프란츠는 학교에 다니지 않았으므로 칼 체르니가 당시 그의 피아노 교사의 역할을 이어받는다. 연령적으로 중요한 시기에 아버지 아 담 리스트가 가르치지 못한 「버릇」을 들여준 것은 행운이었다. 그의 전설적인 테 크닉의  기초는 그2년 동안에 쌓아진 것이라고 리스트는 후년에 말하고 있다.

소년 리스트가  빈에서 슈베르트를 만날 수는 있었겠으나, 현란한 연주회 뒤에 베토벤이 스테이지에  올라와 신동 리스트에게 입을 맞추었다는 것은, 선전을 위해 만들어진 것임에  틀림없다. 베토벤은 당시 사생활이 혼란하여 콘서트에는 결코 나가지 않았다(연주를  들을 수 없을 정도로 그의 귓병은 악화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는 입맞 추기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특히 그가 지독하게 싫어한 신동들에게는.


1823년  말경에, 리스트 집안은 파리로 옮겼다.
그러나 원장 루이지 케루비니가 외국인의 입학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교칙을 내세워 프란츠가 음악원에 입학하는 것 을 거절했으므로, 그는 소년 피아니스트로서의 경력에 발을 내디뎠던 것이다.

그로 부터  5년간,  그는 프랑스, 영국, 스위스의 상류계급 사이를 서커스의 원숭이처럼 피아노를 치며 돌아다녔는데 그 사이에 집의 재정은 많이 불어났다.
자기가 집안을 위해서 이용당하고 있다는 것이나, 너무나도 쉬운 성공이 가져다 주는 굴욕에 대하여 어떤 반감을 예상할 수 있었으나 리스트의 반발의 격렬함은 보 통의 청년기의 반항적인 행위보다 훨씬 심했다.

그러나 어쨌든 서커스의 흥행이 끝 나는  시기가  왔다.

1827년 8월, 아버지 아담 리스트가 불로뉴에서 생애를 마쳤기 때문이다.
이때 그는, "여자에게 조심하라"고 아들에게 예언적인 경고를 했다고 전 한다. 아담의 아내는 오래 전부터 이런 생활에는 흥미가 없어 오스트리아의 친정에 돌아가  있었는데, 남편이 죽자 아들에게 달려와 파리의 몽톨롱가에 집을 장만하였 다.

프란츠는 우울증에 걸려 자기혐오에 빠지고 성직자가 되고 싶다고 생각하기 시 작했는데,  그 동경은 종교광이라고 할 정도이었다. 음악이 싫어져서「모욕을 당하 면서  많건  적건 벌어들이는 손 일」이라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그 결과 16세라 는,  활동을  시작하기에 아주 좋은 나이에 공적인 생활에서는 물러 앉아 피아노를 가르치면서  부의 제단에 희생으로서 바쳐져 왔던 자신의 교육을, 어찌해서라도 회 복하려고 열심히 책을 읽었다.

몇  달이 채 안가서 그의 아버지의 임종 때의 예감이 현실이 되었다.
그의 제자 의  한 사람인 16세의 대신의 딸을 깊이 사랑하게 되었던 것이다.

카롤린 드 생-크 리크와의 사랑은 첫사랑이었는데, 아마 그 때문에 그의 정열은 오래 지속되었고(그 는  유언으로  그녀에게 반지를 남겼다), 가장 순수했음에 틀림이 없다.
생-크리크 백작은  새벽 2시까지 딸의 음악 레슨이 계속되는 것을 알고 당장 리스트를 쫓아냈 는데 그 때문에 리스트의 우울병이 심해져서 한때는 죽은 것으로 여겨져 파리의 신 문에 부고가 나왔을 정도였다.

 

마리 다구와의 사랑

2년의 세월이 흘러 리스트는 이 신경적인 허탈상태에서 완전히 회복되어 18세로 서 그리스 신화의 아도니스와 같은 핸섬한 모습으로 다시 나타나「귀여운 리스트」 를  잘  기억하고  있던 파리의 사교계에 자신을 가지고 출입하게 되었다.

그 뒤로 10년  동안, 그는 파리 예술계의 거물들과 알게 되었는데 그 중에는 위고, 발자크, 뮈세,  하이네, 비니, 들라크르와 등이 있었다. 그는 베를리오즈와 긴 교우를 맺고 쇼팽을 알게 되는데, 쇼팽과의 관계는 그리 친밀하지는 않았으며, 나중에는 멀어지 고  만다.

그런데 1830년대에 음악적인 경험 가운데서 리스트에게 예언적인 계시처 럼 되었던 것은 이탈리아의 바이올리니스트 니콜로 파가니니의 귀신같은 묘기였다. 리스트는  최면술에  걸린 사람처럼 되어 파가니니에 필적한 만큼 피아노에 숙달할 것을  맹세한다. 그는 집에 틀어박혀서 하루 14시간이나 연습을 했다.
파가니니의 주제에 기초를 둔 1832년의 작품《파가니니의「캄파넬라」에 의한 화려한 대환상곡 》은 피아니스트와 피아노라는 악기에는 거의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여 초월적인 피 아니즘의 새 시대의 새벽이 되었던 것이다.       

이 강박관념에 빠져 있는 것 같은 상태에서 일시적으로 그의 기분을 돌려 준 것 이  여성이었다  해도 의외는 아니다. 그는 1832년 연말쯤 다구 백작부인 마리에게 소개되었다.  두 사람의 관계에는 어울리지 않는 데가 있었으나, 혁명 후의 파리의 사교계나  보히미안 사이에는 이런 일이 자주 있었으며 어쩐 셈인지 10년이나 계속 되었다.

                                  

                                마리 다구 백작부인

 
마리 다구는 이 해에 28세로(리스트는 22세), 14년 연상의 범용한 정치가 와  결혼하여 두 아이가 있었다. 1835년에 가족을 버리고 스위스로 달아났을 때는, 그녀는 리스트의 결정적인 배우자였다고 생각된다. 그녀와 리스트 사이에서 태어난 세  아이 중의 첫 아이는 스위스에서 출생했다.
리스트는 당시 종교적인 감정이 고 양하는  위기에 빠져 있었는데, 파리에서의 사교생활을 버리고, 제네바에서 가르치 며  로맨틱한 정열에 빠져 있었다.

두 사람은 바이런이나 실러 같은 낭만주의의 사 도들의  작품과  함께  올림포스의  신들과 같은 단테페트라르카의 작품을 읽고 1835년부터  39년에 걸쳐서는 스위스와 이탈리아를 널리 여행했는데, 때로는 단 둘 이서, 또 때로는 그들과 생각이 같은 자유로운 사상의 주인공들, 권태로운 귀족들, 혹은 조르즈 상드와 같은 완전한 보히미안적인 지식인들과 같이 지냈다. 상드와 리 스트의 사이는 친밀했지만(거의 틀림없이) 플라토닉한 관계에 머물러 있었다.

 

                       

                                            조르쥬 상드

리스트의  자유롭고 지적인 호기심은 생 시몽주의에서 프롤레타리아주의에 이르 기까지의 온갖 종류의 자극을 지칠 줄 모르고 받아들였다. 그 어느 것도 그는 참으 로 이해하거나 평가하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그 음악에 다소간의 반영이 보인다.

그 는 보편적인 진리보다는 경험을 추구하고 있었다. 하이네에게서 「풍향계같이 방향 을  바꾸는  사상」을 가진 사람이라는 비난을 들었을 때 그는 다음과 같이 반박했 다.  
「그  불쌍한 음악가는」정치적 책임이라는 무거운 짐은 없으며, 문장에 의한 것처럼 설득력을 가질 책임도 없으므로, 「별로 후회함이 없이 지적 호기심에 몸을 내맡길  수가  있으며, 빛이 들어온다고 생각되는 방향이면 어디로나 향할 수 있다 」.  

그의 내부에는 이상한 신비론자 라믄네 신부의 영향이 가장 오래 지속되고 가 장  깊이 침투하고 있었다. 라믄네는 갑자기 금욕주의로 깊이 기울여졌는데, 그 금 욕주의는 리스트의 화려한 외면 밑에 있는 바로 그것이었다. 리스트의 라믄네에 대 한 열정과 존경은 거의 우상숭배라고도 할 수 있는 것으로서 브리타니의 신부의 집 을 몇 번 찾아간 것도 순례의 뜻을 지니고 있었다.


 리스트가  들어 앉아서 내성하고 싶다는 충동을 만족시켜 버린 뒤에는, 마리 다 구에게는 리스트를 집안에 붙들어 매둘 만한 기회는 거의 없었다. 그녀는 음악적으 로 교육을 받고는 있었지만 그녀의 분명히 속물적인 감성에서 본다면, 극장이나 콘 서트홀에서  낭만주의를 표명하는 것보다는 낭만주의의 내적인 측면을 더 좋아하였 다.
그녀의 리스트에 대한 애정은 처음에는 권태로운 돈 많은 여자의 바람기의 소 산이었다.  이윽고 애인을 독차지하고 싶다는 욕심에 빠지고 마는데, 그 애인의 매 력은  공중을  끌어당기는 카리스마성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녀의 소원은 본디 가망이 없는 파멸적인 것이었다.
리스트로서는 세계는 정복당하기 위하여 존재하고 있었는데 그의 피아니스트로서의 승리는 마리에게 심한 질투심을 일으키게 하였고, 그 질투심을 비록 그의 부정한 행위에 의해서 불붙은 것이 아니라 할지라도 치명적 인 것이었을 것이다.

 퀼른과 코블렌츠 사이에 있는 라인간의 섬 휴양지 노넨베르트에서 지낸 여름 휴 가는 그들의 허물어진 관계를 잠시 낫게는 하였지만, 마침내 1844년 신랄한 말다툼 끝에 헤어지고 만다. 2년 후에 분개한 마리는《넬리다》를 출판했는데 이것은 그들 의 연애를 거의 수식없이 쓴 소설이다.

「넬리다」는  리스트의  명예에 상처를 주었는데, 바람군이라는 악명은 마리나 카롤리네  자인-비트겐슈타인 공작부인과의 오래 지속된 관계보다는 오히려 상대를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의 정사가 많았다는 데서 기인한다.
그는 여성에게는 온갖 매력을  갖춘  남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여성을 고르는 데는 사려분별이 없었던 것이 분명하며,  과거의 실수에서 배우는 바도 없었다.
1840년대 초의 몹시 성가시고 직 업적으로도  상처을 받았던 댄서이며 여배우였던 롤라 몬테스와의 사건도, (60대의 그에게) 정상을 벗어난 노출증환자로서 자칭「카자흐 백작부인」이라고 한 올가 아 니나와의  거의 파멸적인 정사를 피하는 데 하등 도움이 되지 않았다.
리스트의 성 적인  면의 태도나 동기를 분석하려고 하는 시도는 지금까지도 그 주제보다는 오히 려 사건의 재미에 눈을 돌리게 해 왔다.

마리  다구와의 불화가 처음으로 심각한 양상을 보인 것은 1839년이었다. 이 해 에  리스트가 유럽의 콘서트홀 원정에 나선 것은 그런 뜻도 있으나, 그것으로써 그 는「사상 최고의 피아니스트」로서 아무도 군말을 할 수 없는 존재가 된다.
파리에 서의  그의 명성은 이미 확립되어 있었다-갑자기 인기가 올라간 라이벌 탈베르크를 누르기 위해서 그는 이미 1836년 도피처에서 파리로 돌아가 승리를 거두었었다.

그 런데 이제 그의 목표는 유럽 전대륙이었다.
1839년부터 47년에 걸쳐 그는 빈으로부 터  마드리드, 아일랜드에서 러시아의 먼 지역에 이르기까지 빛나는 발자취를 남겼 다.

빈에서 6회의 콘서트가 끝나자, 그는 어린 시절 이후로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고 향엘  갔다. 코슈트의 반란으로 치닫던 이 시대, 헝가리는 국민적 영웅을 갈망하고 있었는데, 리스트는 그 요구를 충족시켜 주기 위해서 신이 보내준 사자로 생각되었 다.  헝가리말을 몰랐지만, 리스트는 늘 하는 식으로 배우같이 애국자의 가면을 썼 기  때문에 그가 가는 곳은 어디서나 축연이 베풀어졌다.
그는《라코지 행진곡》의 위세당당한  편곡으로서 민족적 정열을 열광적으로 높여 갔다. 군중을 흥분하여 환 성을 지르고 귀족은 그에게 명예의 칼을 증정했다. 그런데 그는 정치적이나 문화적 으로도 이러한 칭찬을 받을 자격은 없었다. 아마 이것을 그도 인정하고《헝가리 민 속  선율》의  작곡에 착수한 듯하다. 이 곡은 뒤에 고쳐 써서《헝가리 광시곡》이 되었다.  이 음악은 헝가리 민속음악의 원형을 더 이상 깨뜨리려고 해도 깨뜨릴 수 없을  정도로 해서 사용하였다. 그가 헝가리 민속음악의 대표라고 생각했던 유랑집 시악단은,  실은 아마추어 작곡가들에 의한 포퓰러 음악의 제작소와 같은 일단이었 던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헝가리 광시곡》의 매력이나 화려한 빛이 줄지는 않겠 지만, 바르토크나 코다이 시대까지 남아 있던 헝가리의 민속예술의 관한 오해를 크 게 해주는 결과가 되었다.


리스트는 언제 어디서나 청중은 자기를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 다. 이어 그는 유럽대륙의 횡단 연주여행으로 막대한 돈을 벌었다.
본의 베토벤 기 념비나  도나우강의 홍수의연금 같은 자선사업에도 아낌없이 돈을 썼다. 그런데 스 타의  자리에서의  경험은 모두 화려함과 어리석음이 가미된 것이었다.
어떤 때는, 그는 스테이지에서 당당하게 내려와서 귀족의 팬 사이로 끼어 들었을 것이요, 어떤 때는  무뢰한인 발라드 가수 존오를란도 파리와 함께 아일랜드에의 엉뚱한 원정 여 행을 떠나는 것과 같은 짓을 했을지도 모른다.          

바이마르

바이마르에서의 1848년부터 61년에 걸친 시대는 리스트의 생애에서 가장 결실이 많은 시기였다.
두 분야에서-악장으로서 그리고 작곡가로서-그의 목표는 두 가지가 있었다.
그것은 배우는 것과 완성하는 일이었다.

 

                               

                                       바이마르에 있는 리스트의 별장

현대음악이 많이 상연되는 센터를 확립하기  위해서 그는 지휘법(그는 지휘에 관해서는 초임자였다)을 마스터하지 않 으면  안되었다.
또 작곡가로서 일을 하여 원숙해지기 위해서는 오케스트레이션의 기술을  마스터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게다가 어느 정도까지는 그의 본능적인 수법 을 정리하고, 합리화하여「미래의 음악」을 위한 실행 가능한 기초가 되는 것을 만 들지 않으면 안되었는데, 그것은 미래의 음악의 선행자다워야 하고 유행에 뒤진 부 적절한 속박에서 해방된 것이 아니면 안되었다.

 바이마르의  오케스트라는 그리 크지 않아서 여러 가지로 요구가 많은 낭만파의 음악보다는 고전파의 레퍼터리에 맞았다. 리스트는 오케스트라의 예산을 짜내서 하 프와,  또 한 조의 트롬본을 보탤 수가 있게 되어 참다운 전도자와 같은 정열을 기 울여  그의 일에 착수했다. 그런데 그가 의도한 것은 실험적인 음악만을 위한 상아 탑을  세우려는 것은 아니었다. 오페라 방면에서의 그의 모험적인 사업에는, 글룩, 모차르트, 베토벤, 슈베르트의 오페라의 중요한 리바이벌이 포함되어 있었다.

한편 콘서트홀에서는  그는  모차르트와 하이든의 심포니뿐만 아니라 헨델의 오라토리오 《메시아(Messiah)》와《삼손(Samson)》을 소개했다. 그러나 현대 음악의 분야에서 는 그의 정열과 견인불발은 실로 더욱 두드러지며, 그가 급진적인 작곡가들을 변호 한  것은 마침내는 바이마르 진영(소위 신독일파)과 라이프치히(드레스덴의 아카데 믹한  보루)사이의 적의를 낳게 하고 말았는데, 후자는 보다 전통적인 자세의 멘델 스존, 슈만, 뒤에는 브람스를 지지하는 논리를 폈다.

리스트는「라이프지히의」보수적 경향의 사람들을 유머러스하게 놀리는 것은 부 끄럽게  여기지 않았으나 그의 조수들의 당파근성으로부터는 초연하여 장점이 있으 면 그것을 인정하고 또 사람의 마음을 끄는 일에는 멋대가리 없는 배은망덕자를 칭 찬해 줄 정도로 도량이 컸다.

슈만과 리스트는 교제를 시작했을 즈음에는 서로 마음으로부터의 존경을 나누었 으나(슈만은《환상곡》Op17을  리스트에게  바쳤다), 슈만이 1840년대 초에 보여준 보기  드문  따뜻한 우정은 여러 가지 이유에서 식어갔다.

그의 문예상의 신구상에 의한 「신음악시보(Die Neue Zeitschrift fuer Musik)는, 본시는 그 자신의 「다피 트  동맹」의 대변자였는데 1844년에는 새로운 편집체제 밑에 들어가, 슈만이 속상 하게도  공공연히  바이마르 측에 붙었다.
또 그의 아내 클라라는 리스트의 라이프 스타일에 강한 반발을 느끼고 있었다. 아마 그의 연주가 불러일으키는 열광에 질투 의  충동을 어느 정도 느꼈던 모양이다. 이러한 열광은 그녀의 그지없이 침착한 연 주에는 드문 일이었다.

이렇게 슈만 측에서 떨어져 갔음에도 불구하고 슈만의 가장 다루기  힘들고 비실제적인 작품의 상연 준비에 리스트는 몰두하고 있었다.
오페라 《게노페파》,반  극적인 오라토리오《파우스트로부터의 정경》,바이런에 의한《만 프레드》(부수음악)가 포함되어 있었다.


베를리오즈도 또한 리스트와의 오랜 동안에 걸친 우정과 격려에서 얻는 것이 많 았던  한 사람인데 둘의 사이는 리스트가《환상교향곡》과《이탈리아의 하롤드(Harold  en  Italie)》의  센세이셔널한  피아노  편곡에 의한 연주를 행한 183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바이마르에서 그는 베를리오즈의 오페라《벤베누토 첼리니(Benvenuto  Cellini)》를 상연했는데, 이 오페라는 1838년의 파리에서의 초 연의  대실패  이후 연주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또「베를리오즈 주간」을 두 번 개최했는데 베를리오즈가 초대되어 주요한 관현악작품을 지휘했다. 이와 같은 리스 트의  헌신적 지원도 보답을 받지 못하고 뒤에 그가 변덕스러운 베를리오즈와 고집 센 바그너 사이에서 질투의 십자포화를 받게 되었다.

 이와  같은  대사업도, 바그너를 위해서 리스트가 기꺼이 맡아준 사업에 비하면 거의  문제가  되자 않았다. 그들의 교우는 음악사상에서 가장 비범한 것인 동시에 가장 반응이 많은 것의 하나로써 그것은 매력적이며 많은 서신에도 기록되어 있다. 바그너는  후회를  할 줄 모르는 자존가였다. 리스트는 이 즈음 이상주의자가 되어 있었다.  그들의  최초의 만남은 1840년대 초반이었는데, 그 즈음의 사람의 교류는 중요하지 않으며 아무 결실도 없었다.
 그런데 그 때 이후로 리스트는《리엔치(Rienzi)》와《방황하는  홀란드인(Der Fliegende Holiander)》을 듣고, 바그너야말로 미래의 음악의 최고의 예언자로고 하는 자기의 신념에 모든 것 을 걸 각오를 하고 자기보다 훌륭한 천재임을 솔직히 인정하기 위해서 그는 자신의 예술적  야심을  물리친 것이다.  
《방황하는   홀란드인(Der   Fliegende Holiander)》,《탄호이저(Tannhauser)》,  그리고《로엔그린(Lohengrin)》(초연)은 바이마르에서는  리스트의  지휘로 연주되었다. 그런데 그의 우정과 지원은 이러한 사업보다도  큰 것이었다.
1848년의 드레스덴의 혁명 소요에 말려든 바그너를 리스트는 경찰에서 빼내었으며, 바그너의 끊임없는 돈의 요구에는 가급적 응했으며 바그너 성격의 견딜 수 없는 면에도 한 집안을 보살펴주는 사제와 같은 자비심으로써 대체로 참아주었다.

 

바이마르 시대의 작품

 리스트는 실의 속에 바이마르를 떠나는데 그 즈음부너 바그너의 한이 없는 집요 한  요구에  응할 마음이 없어졌다. 그런데 더욱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날 참이었다. 1857년에 리스트의 딸 코지마는 그의 사랑스런 제자이며 열렬한 바그너주의자인 한 스 폰 뷜로와 결혼했다.

그러나 1860년대의 중순쯤에는 딸은 바그너의 애인이 되어 있었고 67년에는 그의 아이를 낳았다. 리스트의 분노와 공포는 자기 자신의 과거의 여성 관계를 생각하면 위선적으로 보일지도 모르지만(코지마 자신도 불의의 관계에 서 태어난 아이였다) 그는 심리적으로 용서할 수가 없어서 내적 갈등에 빠졌다.

그 는  딸에  대해서는 부친으로서의 이상화된 희망을 가지고 있었을 뿐 아니라, 그의 바그너와의  관계는 형제와 같았으며, 또 뷜로와의 관계는 아버지와 아들과 같았으 니 어느 편으로 보나 한편을 배반하는 것이 되는 것이다.

또 바그너는 음악에서 구 세주이든  아니든, 남편이나 아버지로서는 적합하지 않은 인물이라는 것을 그는 알 아차리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그는 주저 없이 폰 뷜로를 골라 그에게 영원한 우정 을  확약하고 바그너에게도 5년간 말을 걸지 않았다.

화해한 것은 1872년에 가서인 데 그해에 코지마는 폰 뷜로와 이혼하고, 바그너와 결혼하였다. 리하르트 바그너가 감사하다는  말을 하는 것은 무엇인지를 새로 시키려고 할 때 이외에는 없었다.
그래서  1876년에 바이로이트에 몰려온 순례자들 앞에서 한 리스트에 대한 아량 있는 찬사는 흐뭇한 일이다.

                        

                                    바이로이트에 있는 코지마 흉상


"아무도  나를 알지 못했을 때 누구보다도 먼저 나를 믿어준 분이 저기 앉아 계 십니다. 저분이 없었더라면 여러분은 내 음악을 한 음표도 듣지 못했을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그 사람이야말로 나의 다정한 친구 프란츠 리스트입니다."


리스트는  바그너, 베를리오즈, 슈만과 같은 거장들에게만 마음을 쓴 것은 아니 었다. 열성 있는 젊은 피아니스트들이나 작곡가들이 「신 독일파」의 메카가 된 바그너에게 몰려 왔다. 리스트는 많은 제자들이나 조수들을 보호하고 피아니스트들을 무료로  가르쳤고,  그가 보호하는 젊은 작곡가들의 작품이 연주되도록 주선하기도 했다.  
요아힘라프, 페터 코르넬리우스, 칼 클린트보르트, 한스 폰 뷜로, 에두아르 트 라센(리스트가 떠난 뒤에 악장을 맡았다)은 모두 음악사에는 별로 눈에 띄지 않 는  인물들이다. 가장 풍부한 재능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마 칼 타우지히율리 우스  로이브케 두 사람이었는데 둘 다 충분히 원숙하기 전에 병사하고 말았다. 타우지히는 자칫하면 실수를 저지르는 거친 성질로서 알텐부르크에서 학생으로 2년간 있는 동안에 폭력을 휘둘러 남에게 상처를 입혔는데 리스트가 이름을 붙인 그의 「 브론즈의  손」덕분에 모든 것을 용서받았던 것이다. 로이브케는 24세 때에 결핵으 로  죽었는데 죽기 전에 기념비적인 소나타 2곡(피아노와 오르간을 위하여)을 작곡 했으며, 이들 소나타에서는 힘찬 그의 성격이 리스트 그대로의 어법 속에 침투되어 있다

악장으로서의  십수년 사이에 리스트는 많은 음악을 작곡했다. 그것은 창작에만 전념한다  해도 많은 작곡가가 평행 바쁘게 지내야 할 만한 정도의 양이며 거의 믿 을 수 없을 정도인데, 이는 사실이다.

실제로 오늘날 유명해진 그의 대다수의 음악 은  1847년부터  60년 사이에 작곡된 것인데, 고쳐 쓴 것이다. 그의 음악의 정확한 작곡연대를 확립하기가 어려운 것은 그에게는 자꾸 고쳐쓰는 버릇이 있었기 때문이 다.  예를 들면《순례의 해(Annees de Pelerinage)》의 최초의 2년과《파가니니 대 연습곡》의 최종판은 바이마르에서 리스트가 다룬 최초의 작업에 들어가는데 그 바 탕이 되는 곡이나 인스피레이션은 1830년대의 사건이나 경험에 의한 것이다.

즉 전 자는 마리 다구와의 여행이며, 후자는 파가니니의 연주였다.
1851년에 완성되어 그 이듬해에  출판된 12곡으로 구성된《초절기교 연습곡》은 15세 때에 작곡된 차분한 체르니풍의 연습곡집에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데, 그 중간의 1838년의 아주 어 려운  판을  쉽게  한 것이다.

피아노협주곡 제1번 Eb 장조는 착상된 지 25년 만인 1855년의  2회에 걸친「베를리오즈의 주간」의 2회 째 때에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 는 형태대로 초연된 것이었다(리스트의 피아노, 베를리오즈의 지휘).

「미래의  음악」에 공헌한 리스트가 몸소 가장 의식하고 작곡한 것은 1848년부 터  57년 사이에 작곡한 12곡으로 된「교향시」였다(그 간소한 부록이라고도 할 수 있는《요람에서  무덤까지는》는 1882년에 씌어져 리스트 최후의 관현악 작품이 되 었다).
교향시의 작곡에 있어서 처음에 그는 자기의 미숙하고 부적절한 관현악법이 었다. 그리고 그는 아카데믹한 교육을 받은 조수인 아우구스트 콘라디와 요아힘 라 프의  도움과 조언을 솔직히 구했다. 그는 그들의 조언에 감사했는데, 뒤에는 지휘 하는  일에서 얻은 통찰력을 살려 자기가 의도하는 바에 따라 스코어를 고쳤다.

그 는  피아노의 소품과 가곡도 계속 썼다. 젊었을 때의 보잘 것 없는 접속곡 같은 것 에는 손을 대지 않았으나 피아노편곡에는 여전히 흥미를 잃지 않았다. 바그너나 베르디,  구노  등의 오페라의 어떤 장면에 접하여 매료되면, 그는 그 매력을 아무도 흉내낼  수 없는 피아니스틱한 처리를 많이 가한 편곡으로 만들어 낸 것이다. 그것 은 자신의 묘기를 과시하기 위해서 다른 작곡가의 창작에 무례하게 손을 대는 그런 것은  아니었다(그는 돈을 위해서는 다시는 연주하지 않았다). 이들 후년의 편곡은 작곡가가 작곡가에게 주는 애정이 담긴 찬사 이상의 것이었다


리스트의  작품치고  논쟁을 전혀 야기시키지 않은 것은 없다. 그런데 바이마르 시대의 두 작품《파우스트 교향곡》 피아노소나타 B단조는 일반적으로 그의 걸작 으로서  받아들여지고 있다. 다른 두 대규모의 작품《단테 교향곡》과 오르간을 위 한《코랄「아드 노스」에 의한 환상곡과 푸가》의 지위도 위의 2곡과 과히 멀지 않 다. 한편《그란의미사》와《시편 제13편》은 종교음악 분야에서는 획기적인 작품이 며, 그는 종교음악으로 차츰 기울어져 가고 있었던 것이다.

 리스트가  보는 바로는, 그가 시도한 대담한 개혁의 계획은 모두 좌절과 환멸로 끝났다.  괴테나 실러에게서 바이마르가 이어받은 유산을 바탕으로 그 문화적 전통 을  황금향으로  확장하려고  그는  바라고  있었는데,  황금향에서는 궁정, 극장, 대학(가까운 예나)이 하나가 되어 음모, 검열, 가짜 고전주의자들에게서 개방된 예 술적  환경을 만들어내는 것이 가능해야 했다.

그는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많 은  것을 희생했다. 마리아 파브로브나 대공비는 그녀 자신의 주머니에서 리스트의 급여를  주었으며 남편 못지 않은 음악애호가였다. 그러나 1853년에 대공의 지지를 물려받은 칼 알렉산더 황태자는 음악보다 연극에 더 흥미를 가지고 있었다.
도망자 바그너를 보호해 준 리스트에게 의심을 품고 있는 사람들로부터의 반대도 궁정에는 있었으며  진지한  시민들 사이에서는, 그의 공작부인 카롤리네와의 여전한 동서에 마음  편치 않은 것이 있었다.
리스트가 바이마르에「신독일파」를 확립하는 데 성 공한 것은 반드시 그에게 유리한 것만은 아니었다. 그 이유는, 주민의 대다수는 라 이프치이-드레스덴 추축에 보다 자연스러운 공감을 느꼈으며, 또 바이마르가「미래 의  음악」에 관여하고 있기 때문에 일부 신문에서 좋지 않게 평하는 것을 좋게 생 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로마로

 1857년까지의  리스트는「지치고 슬프고 죽고 싶었다」고 직접 고백하고 알텐부 르크에  들어 앉아서 음악에 직접 관여하지 않는 사람을 피하게 되었다.

때로는 그 는 싸울 작정으로 극장에 와서 2층 관람석에서 몸을 앞으로 내놓고 상기되어, 제자 인  펠릭스  드레세케의 작품에 열열한 찬사를 보내곤 했는데, 뒤의 청중은 돌처럼 냉담했다.
궁정 관리들과의 관계는 점차 험악해지고 그의 제자 피터 코르넬리우스 의  오페라《바그다드의 이발사(Der Barbier von Bafdad)》의 그에 의한 상연이 노 골적  적의에 부닥쳐 1858년에는 양자의 관계는 깨어지기에 이르렀다.

리스트는 끝내 사임하게 되었다.

그는 그 뒤로 2년간 알텐부르크에 머물며 그 고장의 음악생활 에 가끔 참가하기도 했는데, 별 이유는 없었다. 그는 공적으로도 이미 구속되어 있 지  않았던 것이다.

한편 걱정거리는 늘어가고 있었다.
그의 아들 다니엘은 20세로 세상을 떠났다. 카롤리네는 남편에 대해서 이혼을 요청하고 있었는데, 언제나 헛수 고로  끝났다. 그는 의기소침해서 자기의 인생을 회고도 해보았으나 패배만이 보일 뿐이었다.

성공, 사치, 쾌락의 생활에 그는 오랫동안 등을 돌리고 있었다. 그런데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12년 동안 나는 바이마르에 있다. 나는 고귀한 감정으로 뒷받침을 받아왔다-명 예, 위엄, 지저분한 박해로부터 보호되어 온 여성의 훌륭한 성격, 그리고 그보다도 웅대한  구상-시와의  깊은 결합으로 인한, 또 우리 시대의 정신의 보다 자유로운, 말하자면 보다 적절한 전개에 의한 음악의 쇄신이 있었다"


고 그는 쓰고 있다. 카롤 리네의  고귀한 덕에 관해서 그가 언제나 되풀이해서 말하는 바는, 그녀의 덕에 부 끄럽지  않은 행동을 취하고자 하는 힘과 의지와 희망을, 그가 차차 잃어가고 있음 을 말해주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의 음울한 기분을 반영하고 있는 작품 몇 곡이 있 다-조사라고도  할수  있는《죽은  자(Les  Morts)》,멜로드라머《슬픈 수도사(Der Traurige Monch)》나 여러 가지 종교적 코랄 등.

 1880년 5월 이혼문제에 관하여 교황청에 알아보기 위하여 카롤리네는 로마로 갔 다.  그녀가 떠나고 나서 리스트는 어느 정도 기운을 내었고, 그 이듬해에는 옛 친 구들과의  즐거운 재회를 위해 파리로 떠났다.

마리 다구하고는 두 번 만났으나(그 가  파리를 오랫동안 방문하지 않은 주된 이유는 그녀가 파리에 있었기 때문이다), 어색하고  고통스러웠다.  

바이마르에서의 여름의 페스티발은 성공하였고 리스트의 어려운  면을 많이 누그러지게 했는데, 이 페스티발이 끝나자마자 카롤리네는 로마 교황청과의  싸움에서 이겨, 결혼식은 리스트의 50회 생일인 10월 22일로 정해졌다 고  그녀는 리스트에게 전해왔다.

리스트는 영구히 알텐부르크의 집을 치워 버리고 결혼식이  있기  수일 전에 로마에 도착했다. 마지막 순간에 로마 교황은 수속상의 이유로  실효를 언도하여 결혼은 중지되고 말았다.
카롤리네는 아마 어떤 의미에서 는 교황의 금지를 행운의 간섭으로 알았을지도 모른다. 그 이유는, 그녀는 이미 맘 속으로는  이미 눈치채고 있었던 일이지만-만약 리스트가 그녀와 함께 지금 제단으 로  향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의무를 다하기 위한 것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리고 그들은 그 후로 결혼 얘기는 하지 않았다. 카롤리네는 권련의 연기 싸여서 언 제  끝날지도 모를 설교와 종교적 논문의 저술로 도피했다. 한편, 리스트는 로마에 별개의 아파트를 얻었다. 그 후 5년간은 가끔 여행을 했는데, 보통 때는 집안에 들 어앉은  생활을  하였으며, 팔레스트리나, 빅토리아, 라수스의 음악에 관한 지식을 새로 깊이 살피기도 하고 또 두 곡의 상당히 큰 오라토리오《성 엘리자베트의 이야 기(Die Legende von der heiligen Elisabeth)》와《그리스도(Christus)》의 작곡을 진척시켜 갔다.

로마시대의 상당히 많은 훌륭한 피아노 작품들도 종교적 테마를 가 지고  있는데, 그 예로 그가 잠시 살고 있던 티볼리의 에스테장의 분수와 편박나무 의  인상을 강하게 불러 일으키는 것과, 그의 경건함과 극적인 경향의 양자의 발전 을 두드러지게 효과적으로 잡은 두 곡의 힘찬《전설(Legendes)》등이 있다.

 

                                            

                                  

                                    헝가리 콜로차에 있는 리스트 기념상

 

 

만년과 그의 죽음

 1865년에 리스트는 승직에 나아감으로써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다.
이전의 동료 사회주의자들이  불경한 말을 하며 재미있어 한 것은 리스트가 신부가 되었기 때문 이었다.

「신부의 옷을 입은 메피스토펠레스」는 그레고로비우스의 욕설이었는데,
하루를 교회의 교리문답과 마이어베르의《아프리카의 여인》중의「인도의 마술」의 피아노 편곡 시간으로 쪼갠다고 리스트 자신이 쓴 것을 읽을 때, 이 별명이 적절하 지  않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의심의 여지없이, 젊은 시절의 종교적 동경(라므네 신부에 대한 영웅 숭배에 그 기원은 있는데)이 이제 다시 얼굴을 내민 것이다. 1869년에  그는  대공 자신의 초대를 받아 설득을 받고, 거의 은퇴한 것과 같은 신분에서 일신된 바이마르로 돌아갔다.
리스트의 이름은 아직 그 명성을 잃지 않고 있었다.
 그의  집은 곧 그를 숭배하는 제자들로 꽉 찼다.
모리츠로젠탈, 에밀사우 어, 외젠 달베르 등이 젊은 피아노의 거장들 사이에 들어 있었는데, 그들은 유복하 지만 재능이 없는 아마추어들 사이에 섞여서 리스트의 클라스에 나오고 있었다.
아 마추어들은  유럽에서 가장 뛰어난 피아니스트 양성학교의 자리를 확보하려고 앞을 다투어  밀려 왔다. 그의 흥분을 자아내는 분위기는, 젊은 미국학생 에이미 페이에 의한 서간집「독일에서의 음악 공부」에 매력적으로 그려져 있다.

리스트는 이번에 두 번째로 바이마르에 군림했을 때는 아무런 공식적인 의무는 따르지 않았으나, 지 휘하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그의 커다란 업적의 일람표에, 바그너의 《뉘른베르크 의  마이스터징거(Die Meistersinger von Nurnbrg)》와 자작의《그리스도》의 연주 를 추가했다.

새로  설립된 부다페스트의 왕립 음악 아카데미가 이번에는 1870년 그의 취임을 요청해 왔다. 그는 헝가리에는 빚을 진 바가 있었다. 그것은 1839년부터 40년에 걸 쳐  고국에  금의환향했을 때 그는 애국심을 뜨겁게 선언했음에도 불구하고, 1848, 49년의 유혈 혁명 기간 중에는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이 사건이 끝나고  나서 감동적인 교향시《슬픔의 영웅(Heroide funebre)》과《장송(Funeraille)》를 작곡하여 공헌했을 뿐이다. 그에게 예술은 용 자의 무덤에 그 고귀한 베일을 던지는 것으로 충분한 것이었다. 하이네나 벨지오조 조 공작부인과 같은 친구들은 그렇게 생각지 아니하여, 거의 태만이 핑계라고 리스 트를 호되게 나무랬다.

다시 새 아카데미의 학장으로서의 중책을 지고, 매년 3개월 간  거기서  교편을 잡을 것을 떠맡았을 때, 마음속으로는 그 책망을 상기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이리하여 그가「세 갈래의 생」이라고 말했듯이 로마, 바이마르, 부 다페스트 등 3각형으로 이루어지는 여행을 끊임없이 계속하게 되었다.

만년에는 더 열심히  여행을 하여-영국, 프랑스, 오스트리아, 벨기에, 네덜란드에 갔다-그가 심 한  기침을  앓게 되는 것은, 《파르지팔(Parsifal)》을 들으러 바이로이트로 가는 기차 여행 중에 있던 일이다.
그의 기침은 후에 폐렴으로 진행되었던 것이다.
그는 1886년 7월 31일에 숨을 거두어 바이로이트에 매장되었는데, 그곳은 존경하는 친구 리하르트 바그너의 성지로서 고향이라고 부를 수 있는 곳이 아무 데도 없는 사나이 에게는 알맞은 안식의 땅이라 하겠다.

리스트의 예술적 자아는 그의 웅대한 바이마르의 꿈의 좌절에서 결코 완전히 회 복하지는 못했다. 그는 오해받고 있다고 느꼈고, 또 자기가 택한 길을 의심하는 일 은  없었으나 자기의 예술적 달성에 대한 회의 때문에 마음이 괴로웠다.
그의 작품 이  몰이해나 적의로써 받아들여졌을 때는 "나는 기다릴 수 있다. 그 동안 나는 충 분히  참을  수 있는 힘이 있다"고 그는 늘 말했다.
그는 쓸쓸하게 밤을 새워 일을 하였고 그의 작품이 줄지도 모를 충격이나 그 작품을 들어줄지 어떨지도 생각해 보 지  않고  짤막하고 예언적인 조각들로「원고를 새까맣게」칠했다. 그는 후회 없이 색채적인  부분이나 화려한 데를 전부 삭제하여 의미를 잘 알 수 없을 정도로 벌거 숭이 진실만을 남게 한 것이다.

제자나  동료 음악가들에 대해서는, 그는 겉으로는 엄격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이야기가 그 자신에게 미치면 가끔 시니컬한 면을 보이기도 했다. 그런데 그에게는 배반당하고 있다고 느낄만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 독일에서는 특히, 그는 외국으 로부터의 침입자라하여 분노를 산 것을 뒤에 와서야 깨달았는데, 그를 모욕한 사람 들 가운데서 가장 악의가 있었던 것은, 흔히 그의 옛 친구나 제자들이었다.

라프는 리스트의 관현악 작품의 스코어 전부를 쓰지 않으면 안되었다고 하는 어처구니없는 말을 떠들어댔다.
코르넬리우스의 오페라가 실패했을 때 리스트는 바이마르에서 물 러가려고  생각했었는데, 코르넬리우스는 10년 후에, 진짜 이유는 독일 사람들에게 는  신으로서 인정을 받지 못해 리스트의 자존심이 상했기 때문이라고 단언하여 바 그너에게  일러바쳤다.
이러한 비열한 배은을 당하면 누구나 인생에 대해서 시큰둥 해지는  것이 당연하련만, 리스트는 만년에 보로딘이나 그리크 같은 신진 작곡가들 에게  이전과  마찬가지로 조언이나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그런데 신부의 제복도 그의  여자 좋아하는 버릇을 지워버리지는 못했다. 올가 야니나와의 스캔들은 두고 라도 그는 60대에 올가 마이엔도르프 남작부인과의 사이에 친밀한 애정관계를 맺었 던 것이다.
그의  마음의 내부의 불안은 결코 밖으로 널리 알려지지는 않았다. 그를 괴롭히 는「내 애인들의 흔해빠진 거짓 포옹」의 추억이나「원죄의 결과인 본의 아닌 고역 으로부터의  해방」으로서의 죽음에 관한 그의 환영을 우리가 알게 되는 것은 그의 가장 친한 진짜 친구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뿐이다.

 이 해방을 기다리고 있는 동안(참을성이 적지 않은 것 같은데) 그는 새벽 4시에 일어나  책상에  앉아서「누구에겐가는 의의있는 작곡가이고자 하는」누를 수 없는 요구를  만족시키지도 못한 채,「먼 미래를 향해서 창을 던지기」를 계속하고 있었 다.

그의 음악은 분명히「미래의 음악」이었다. 드뷔시, 라벨, 바르톡, 메시앙은 리스트가  그들에게  의의 깊은 작곡가임을 인정한 20세기의 대작곡가들 가운데 극히 소수에 지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