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세기
서기 2010년이라!
기나긴 선사시대를 거쳐 그리스도 후 2,000년이 넘도록 세월이 흘러, 그 긴 역사를 돌아볼
때 인간에게 중요하지 않은 시기가 한 때라도 있었을까마는, 18세기야말로 우리의 시선을 끄
는 중요한 변화가 일어난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유럽의 경우를 먼저 볼까.
17세기 말 영국에서 시작되어 전 유럽으로 퍼진 계몽주의 사상은 이제까지 사회를 지배해
왔던 왕권이나 교회의 권력에서 벗어나 자유의지를 가지고 자유롭게 살아가기를 사람들에
게 가르쳤다. 이는 몽테스키외와 루소 등에게 영향을 주어 급기야 18세기 말 프랑스 혁명의
원동력이 되기도 하였다.
과학과 산업의 발달로 물류와 무역이 증가하면서 지식과 경제력을 갖춘 부르조아라고 불
리는 신흥 시민계급이 불어나, 이들의 기호와 욕구가 사회를 지배하는 하나의 새로운 패러
다임을 형성한 것이다. 디드로 같은 학자들이 백과사전을 펴내어 누구나 손쉽게 모든 분야
의 정보에 접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된 것도 바로 18세기이다.
이는 학문과 예술의 발전에도 크게 기여하여, 건축과 미술은 웅장하던 바로크 스타일에서
섬세하고 우아한 로코코 스타일로 발전하였다. 독일에서 인간의 감정과 독창성을 중시하는
자유분방한 사조의 ‘질풍 노도(Strum und Drang) 문학운동’이 일어난 것도 18세기였다. 또
한 종교음악이 대세이던 시대에서, 여럿이 힘을 합하여 조화(harmony)를 이루어야 하는 교
향곡 즉 세속적인 고전음악이 시작된 것이 바로 18세기이다.
우리나라의 18세기는 어떠했을까? 영조(英祖)가 1724년 등극하였고 뒤를 이은 정조(正祖)
가 1800년에 죽었으니, 우리나라의 18세기는 대체로 영조가 태어나서 정조가 죽을 때까지로
보면 될 것 같다. 영정조 시기는 우리나라 문화의 부흥기이며, 정조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계몽군주로 알려져 있다.
18세기는 우리나라에서도 이제까지 인간을 짓누르던 주자학의 굴레에서 벗어나 실사구시
(實事求是)의 합리성과 인성(人性)에 대한 열정이 일어난 시기였다. 때마침 청나라에서 쏟
아져 들어오는 신문물이 우리나라의 지식인들에게 막대한 영향을 주었고, 이는 곧바로 저술
활동으로 이어져 많은 책들이 저작 발간되었다.
연암 박 지원을 필두로 하여 박제가, 이 덕무, 유 득공 이외에도 신문물을 접한 많은 지식
인들이 이용후생(利用厚生)을 위한 책들을 저작하였다. 이들은 당시 우리 사회의 문제점을
깨닫고 정치, 사회, 역사, 물류, 농업 등의 다양한 부문에 대한 저술을 펴냈고, 청나라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정보를 정리하여 백과 사전류의 편집을 시행하였다. 과연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변혁이요 대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박 지원의 시를 한 구절 살펴보자.
卽事有眞趣 눈앞에 참다운 정취 있거늘
何必遠古瑗 어쩌자고 먼 옛날에서 찾아 헤매나
漢唐非今世 한당과 지금 세상 거리가 멀고
風謠異諸夏 풍요도 중국과는 같지 않다네
이때까지는 옛날에 중국에서 생겨난 주자학적 사회세계관이 우리나라 사회를 지배하고
있어, 글이나 시를 쓸 때도 중국의 고사(古事)나 풍속에 맞게 쓴 것을 훌륭한 것으로 여길
정도였다. 그러나 18세기에 이르러서 우리 사회는 자각을 하게 된 것이다. 문장이나 시를
쓸 때에도 중국의 영향을 벗어나 우리의 풍속과 생활 감정을 우리 스타일대로 표현하는 것
이 중요한 것이 아니겠는가 하는 자각이다.
그림에 있어서도, 이제까지는 우리나라 풍경도 중국의 모양 일색으로 그려 왔으나, 겸재
(謙齋) 정 선(鄭 歚), 관아재(觀我齋) 조 영석(趙 榮祏) 등의 화가들이 이러한 시대정신에
호응하여 중국식 관념 산수(山水)를 버리고 우리의 진경산수(眞景山水)를 그리기 시작하
였고, 사천 이 병연을 필두로 한 시인들도 우리나라의 산수와 지명이 등장하는 진경시(眞
景詩)를 쓰기 시작하였다.
유 금(柳 琴)이라는 사람은 자신의 글을 모은 문집의 이름을 ‘낭환집(蜋丸集)’ 이라고 했
다. 낭환이란 말똥구리가 굴리는 말똥이라는 뜻이니, 용에게 여의주가 중요하듯 말똥구리
에겐 말똥이 더 중요하다, 즉 한 마디로 이제는 내 목소리를 내겠다는 선언이었다.
이러한 주체(主體)에 대한 자각은 다산(茶山) 정 약용으로 이어져, 일찍이 정조대왕 아래
에서 국가 경영에 참가하다가 18년간의 유배생활을 하게 된 그는, 경세제민(經世濟民)에 필
요한 새로운 정보들을 모으고 정리하여 세계적인 역작으로 꼽히는 ‘목민심서(牧民心書)’를
비롯한 36건의 방대한 저작을 이루어 놓았다.
그가 시를 지음에 있어 주장한 것은, 그 내용에 있어서도 중국의 옛 것을 답습할 것이 아
니라 우리 눈앞의 우리의 것을 묘사할 것이요, 형식에 있어서도 렴(簾)과 운(韻)등을 까다
롭게 따지는 중국풍 시작법(詩作法)에 얽매일 필요 없이 우리의 풍속과 감정을 자연스럽게
표현하자고 한
我是朝鮮人 나는 조선인이니
甘作朝鮮詩 즐겨 조선시를 쓰겠노라
고 표현한 소위 ‘조선시 선언’에 잘 나타나 있다.
이즈음 우리나라도 과학 지식의 발달 그리고 물류와 무역이 활발해짐에 따라 서울이 점점
대도시로 성장하게 되고, 기존의 사대부 층은 물론 새로이 지식과 경제적인 여유를 축적한
중산층이 증가함에 따라 문물이 풍부 다채로워지며, 완물이나 기호품등에 대한 마니아들이
나타났다.
책, 그림, 글씨, 꽃 , 칼, 벼루, 돌, 골동품 심지어는 남이 사용한 상복(喪服)을 수집하는 마
니아도 있었고, 앵무새, 비둘기, 담배, 호랑이 등 어느 한 가지에 미쳐서 깊고 넓게 연구하고
저술을 남기는 사람들도 많았다.
이러한 일들은 앞서 말한 정보의 수집과 정리 그리고 서책의 발간과 유통이 활발하게 된 사
실에 힘입은 바가 크다. 영조 임금 때 금서(禁書)를 소지하고 유통한 죄로 벌을 받은 사람들
중에는 10명의 서쾌(書儈)가 들어 있었다. 서쾌란, 우리말로는 책주름이라고 불리는 사람들
로서 온갖 종류의 책을 확보 출판하고 유통 판매하는 사람들이다.
이때는 이미 관청뿐 아니라 일반에서도 목판인쇄술이 널리 행해져, 오랫동안 온갖 정보로
부터 소외되어 왔던 중인들과 평민들의 문학 활동도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평민들의 시(詩)
모임인 송석원시사(松石園詩社)가 결성되어 성황을 이루었고 이들의 작품을 모은 책들도
속속 발간되었으며, 그 문학적 수준은 이미 양반 사대부들의 작품과 구별하기 어려울 정도
였다. 이때 발간된 책에 나오는 작품 중에는 나무꾼이나 술집 주인 그리고 술집의 심부름꾼
인 중노미 그리고 심지어는 걸인의 작품까지도 등장하였다.
여자를 사서 술집을 운영하였던 김 양원(金 亮元)이라는 이가 지었다는
細雨垂簾看草色 가는 비 주렴 사이로 풀빛을 보고
柴門倚杖聽禽言 사립문에 지팡이 짚고 새소리를 듣는다
라는 시가 실려 있고, 경기도 양평군에 살던 나무꾼 정(鄭)씨의 시는 이렇다.
翰墨聲名老採樵 문학으로 이름 높았지만 늙어서까지 나무를 하니
兩肩秋色動蕭蕭 지게 진 두 어깨에 가을 빛 쓸쓸하구나
小風吹入長安路 작은 바람이 불어 장안 길까지 들어오니
曉到東城第二橋 새벽에 동성 둘째 다리에 이르렀네
나무꾼 정씨는 작은 배에 나무를 싣고 서울에 들어와서 새벽에 지게로 날라 팔았다고 한다.
동대문으로 들어와서 둘째 다리에서 팔았다는데, 그곳이 지금의 광장 시장 앞이다. 이들의
시가 책에 실려 발간되었다는 것은 그만큼 당시에 누구에게나 책을 접하고 배울 수 있는 기
회가 많았다는 방증(傍證)이기도 하다.
서울 사람들의 사는 모습들은 어떠했을까. 당시에 한 역관(譯官)이 묘사한 종로의 모습을
보자.
<새벽종이 열두 번 울리면 점포의 자물쇠 여는 소리가 일제히 들린다. 장사하는 남녀들이
짐을 등에 지거나 머리에 이고 지팡이를 두드리면서 사방에서 요란하게 몰려든다. 좋은 자
리를 다투어 가게를 열고 각자 물건을 펼쳐놓는다. 천하의 온갖 장인들이 만든 제품과 온
세상의 산과 강에서 나는 산물이 모두 모인다. 불러서 사려는 소리, 다투어 팔려는 소리,
값을 흥정하는 소리, 동전을 세는 소리, 부르고 답하고 웃고 욕하고 시끌벅적한 것이 태풍
과 파도가 몰아치는 소리 같다. 이윽고 저녁 종이 울리면 그제야 거리가 조용해진다.
종로의 제품은 몇 가지 등급이 있다. 중국의 제품은 모두 당(唐)자를 붙이는데, 중국 제품
은 정교하면서도 치밀하고 담박하면서도 화려하며, 우아하면서도 약하지 않고 기교적이면
서도 법도가 있으므로 이 때문에 가장 뛰어난 상품으로 친다. 일본 상품은 정치하고 세밀하
며 교묘하고 화려하여 그 다음이다. 우리나라 제품은 대개 조악하여 정교하지 못하다. 간혹
중국 제품을 모방하지만 진짜와 다르므로 등급이 가장 낮다.>
강 세황(姜 世晃)의 손자인 강 이천(姜 彝天, 1769~1801)이 지은 모음시 ‘한경사(漢京詞)’
에 보면, 광통교 일대에는 서화(書畵)시장이 몰려 있어 많은 거래가 이루어졌고, 화훼(花
卉)상점가도 형성되어 있어 호남에서 조운선(漕運船)이 올라오면 함께 실려 온 치자, 석류,
동백 같은 귀한 식물들이 부잣집으로 다투어 팔려 나갔다. 시내 곳곳에 도박과 사당패의
공연도 성행하고, 명절마다 풍성한 민간의 놀이로 도성은 일 년 내내 흥성거렸다.
역사를 살펴 보건대, 과학과 산업이 발달하면 생산과 소비의 증가에 따라 소득이 증가하
게 된다. 소득이 증가하면서 어느 지점에 다다르면 국민들은 주체의식이 강해지며 자기 나
라의 것을 소중히 여기게 된다. 또한 문물이 다양해지면서 사치가 발생하는 것도 정해진 이
치이다.
이런 면에서 18세기는 우리에게 있어서도 참으로 이전과는 사뭇 다른 발전적이고 다채로
운 삶이 진행되던 매력적인 시기였다. 그러면 여기에서 의문이 생긴다. 이렇듯 물심양면으
로 활발하던 우리 사회가 그 후 불과 한 세기가 지나면서 외세(外勢)에 무참하리만큼 무너
져간 이유는 무엇일까.
당시의 사회 지배계급인 사대부 층은 기득권의 그늘 아래 소비문화에만 탐닉했을 뿐, 평
민과 하층민들의 복지와 행복을 위한 원대한 깨우침을 갖지 못했던 것이다. 더구나 인성
(人性)에 대한 열정으로 가득 차 온갖 저작을 펴내던 다수의 지식인들도 서얼이었거나 유
배자의 신분이었고, 많은 지식을 축적한 평민들도 모두 이들과 함께 주류에서 밀려나 있
는 처지였으므로 사회 개혁을 밀고 갈 힘이 없었다.
더구나 1800년 계몽군주인 정조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11세의 나이에 왕위에 오른 순조
(純祖)이후로 19세기 내내 계속되던 소위 세도정치로 말미암아 18세기에 생겨나던 근대화
의 조짐은 결실을 이루지 못하고 쓰러져 버린 것이다.
요즘은 각 나라마다 이 18세기를 연구하는 학회(學會)가 있고, 4년마다 한 번씩 세계 18세
기 학회가 성황리에 열리고 있다고 한다. 18세기를 연구하는 우리나라의 학자들이 세계대회
에서 할 말도 많고 발표할 것도 많을 것 같아, 매우 역동적인 18세기를 우리 역시 가지고 있
었음에 다소 위안이 안 되는 바는 아니지만, 이후 열강들에게 쫓기어 급기야는 나라마저 빼
앗겼던 쓰라린 역사를 생각하면..... 참으로 과거 자랑이란 허망한 일이라는 생각도 든다.
아! 지나간 우리의 18세기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