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모자 2011. 3. 10. 16:50

 

내가 사는 곳은 인왕산 밑이다

맑은 날 저녁 자세히 보면

인왕산은 날마다 해 하나를 잡아먹는다

해 하나를 다 삼키고 나면

그 언저리는 피처럼 붉다

저녁이 오기 전에

인왕산은 제 누운 자리에다

재빨리 검은 천을 깐다

나는 아버지 어머니를 여읜 천애고아

해가 잡아먹힌 것을

누구에게 물어볼까

내일 아침 해 하나 떠오르지 않으면

인왕산은 나를 잡아먹으러 내려올 것이다

 

 

                   <노을>        -김 종 해-

 

 

 

 

 

고교 시절 한 때

나는 산악반에 들어

토요일이면 인왕산을 찾곤 하였다.

 

 

학교에서 그리 멀지 않은 주택가

양쪽에 석축을 쌓은 내를 건너

인왕산의 품으로 들어갔다.

 

 

그 즈음 감명 깊게 읽었던

소설 <광화사狂火師>에 등장하는,

김 동인이 스틱을 짚으며 거닐던 곳은

어디쯤이었을까를 곁눈질로 가늠하면서

 

 

겸재 정 선이 부벽준법으로 표현한

그 바위산 화강암 표면의 작은 크랙에 손톱을 걸며

45도 경사의 ‘슬로프’를 기어오르거나

 

 

두 바위덩어리 사이로 길게

위로 솟은 틈을 맨몸으로 버티고 비비며 올라가는

소위 ‘침니’를 수련하던 시절이었다.

 

 

18세기

겸재와 백악사단의 시화詩畵의 본고장.

 

 

요즘

송석원시사松石園詩社에 대한 글을 읽느라

인왕산 생각을 많이 하던 내 눈에

김 종해 시인의 <노을>이라는 시가 들어왔다.

 

 

어둑어둑 사방이 노을로 붉어지는 시간에

뻘겋게 타는 해를 훌떡 삼키고

어둠 속으로 주저앉는 인왕산

 

 

소와 말과 식구들을 차례로 잡아먹는

어릴 적 여우 동생 이야기가 생각나서

검붉은 그림 한 폭을 대한 듯 스산하지만

 

 

내일 아침 분명히 서울에

해 하나 또 떠오를 테니

 

나를 잡아먹진 않을 저

커다란 시커먼 괴물과 친하고 싶다.

 

 

그 품에 들어가 보고 싶다.

옛 시절의 기억 속으로.....

 

 

 

 

   최완수 선생이 쓴 <겸재謙齋 정 선鄭 歚>이라는 책의 중간쯤의 두 페이지 전체에 <인왕제색도仁王霽色圖>

가 크게 인쇄되어 있다. 나는 사무실 한 구석에 악보대를 세우고 그 위에 그 책의 그 페이지를 펼쳐 놓고 시간

만 나면 들여다본다.

 

 

   국보 216호라는 <인왕제색도>의 실물을 나는 아직 보지 못하였지만, 오래전 이 그림을 책에서 처음 보았을

때 ‘우리에게도 이런 멋진 그림이 있구나’ 하며 감탄하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세계 어디에서도 볼 수 없고

중국이나 일본의 그림들과도 확연히 구별되는 그 독특한 아름다움!

 

 

 

 

 

   이 그림이 태어난 시대적인 배경을 한 번 살펴보자. 왜란倭亂과 호란胡亂의 신산辛酸을 겪은 조선사회는 숙

肅宗대를 지나며 산물과 유통의 발달로 한 차례 르네쌍스가 열려 영정조英正祖대에 그 황금기를 이루었다.

경화사족京華士族들의 생활문화는 다양 화려하였고, 위항인委巷人들도 저변을 넓히며 저작 출판등의 문화 활

동을 활발히 전개하였다. 그들의 머릿속에는 조선이 세상의 중심이라는 문화자존의식이 생겨난 것이다.

 

 

   중국풍을 모방하던 미술계에서도 우리의 것을 우리 식으로 그리자는 자각이 일게 되었다. 겸재 정 선은 이러

한 진경眞景미술의 핵심에 서서 우리의 산천을 우리 식으로 그려내는 일에 전념하여 많은 걸작을 생산해냈다.

그 걸작중의 걸작이 바로 겸재가 75세 때 그린 <인왕제색도>이다. 이 그림에는 그가 평생을 가꾸어온 테크닉이

무르익을 대로 무르익은 채 녹아있어 가히 진경시대를 대표하는 그림중의 하나로 꼽힌다.

 

 

   겸재에게는 평생지기가 있었다. 그보다 나이가 5살 위인 시인 사천槎川 이병연李秉淵이 그였다. 어려서부터

인왕산 밑에서 같이 자라면서 삼연 김창흡 문하에서 동문수학하고 평생을 그림과 시를 주고받으며 형제처럼 지

내온 사이였다. 그가 김화 현감으로 나가있을 때는 겸재를 초청하여 금강산을 두루 여행하게 편의를 보아주며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하였다.

 

 

   1751년 초여름 병석에 누워있던 이 병연이 별세하자 겸재는 자기 몸 한 쪽이 떨어져 나가는 아픔을 느꼈다. 실

의에 빠져 있던 겸재는 차차 몸을 추스르고 화폭 앞에 앉아 붓을 들었다. 마침 장마철이라 보름내 계속되던 비가

그치며 인왕산도 비안개를 걷고 말끔하게 씻은 용자容姿를 드러내고 있었다. 안개를 걷고 다시 나타나는 인왕의

모습처럼 친구도 병을 털고 일어나기를 바랐다. 그러나 친구는 기어이 유명을 달리하였고, 겸재는 그 아픈 마음

을 쓰다듬으며 <인왕제색도>를 그렸다.

 

 

   이러한 이야기가 얽혀있는 <인왕제색도>는 겸재의 손자 대에 이르러, 당시 영의정으로서 겸재 작품의 애호가

이며 수장가였던 심 환지沈 煥之의 손으로 넘어가게 된다. 겸재 예술의 높은 경지를 사랑하고 있던 그는 이 그림

에 제화시題畵詩를 한 수 지어 붙였다.

 

 

                              華嶽春雲送雨餘      삼각산 봄 구름 비 보내 넉넉하니

                              萬松蒼潤帶幽廬      만송의 푸르름이 그윽한 집 두른다

                              主翁定在深帷下      주인은 아마 깊은 장막 아래 앉아

                              獨玩河圖及洛書      홀로 하도와 낙서를 완상하겠지

 

 

   ‘하도’와 ‘낙서’란 각각 중국 고대 전설에 나오는, 주역周易의 이치理致가 담겨져 있다는 그림과 글이다. 사대

부 화가였던 겸재는 주역을 깊이 연구하여 상당한 조예造詣가 있었으며, 그의 다른 그림인 <금강전도>도 이러

한 주역의 원리를 반영하여 그린 그림이라는 사실이 밝혀지기도 했다.

 

 

   이 <인왕제색도>는 그 후 여러 사람의 손을 거쳐 현재는 이태원의 리움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위에 보인

심 환지의 제화시는 여러 사람의 손을 거치는 사이에 본 그림에서 분리되었고 지금은 그림만 전시되어 있다.

 

 

   이제 봄이 왔으니 리움 미술관부터 찾아가야겠다. 그리고 어느 일요일을 잡아 인왕산에도 올라봐야지. 인왕

산! 하고 부르면 나는 우선 마음속에 겸재 그림의 산 모습이 실제 인왕산보다도 먼저 떠오른다. 예술가의 눈을

통해 재창조된 자연이 보는 이의 뇌리에 실물보다도 먼저 자리 잡았음이니, 위대하도다, 예술가의 힘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