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선(旌善) 여행
10월의 마지막 주말에 차를 몰아서 강원도의 가을 속으로 들어갔다. 정선군(旌善郡)은
어딜 가도 온통 빽빽한 푸른 숲이어서 그야말로 한반도의 허파와도 같은 곳이다. 우리나
라가 만약 평평한 평지의 나라였다면 얼마나 삭막했을까.
제천에서부터는 38번 국도를 타고 목적지인 고한(古汗)읍까지 가는데, 말이 국도이지
거의 고속도로와 같은 4차선 도로가 시원스레 뚫려있다. 요즘은 국토 어디나 모두 하룻
길이 되었으니, 이것도 참 복 받은 일이다. 수십 년 애써서 만들어 놓은 이런 나라를 뒤
집어엎겠다는 사람들과 그 편을 드는 사람들의 숫자가 적지 않은 요즈음이니, 참 어쩌다
가 이렇게 되었는지?!! 시름을 잊자고 떠난 여행길에 새록새록 시름의 그림자가 들락거려,
이거 안 되겠네, 머리를 흔들어 털어버리고 창밖을 보니,
마침 때가 딱 맞았는지, 고도가 높아지면서 정선군에 들어서자 사방에 단풍의 병풍을
둘러놓은 것 같다. 굽이굽이 돌 때마다 새로운 산의 모습이, 마치 저마다 알록달록한 카
펫을 두른 커다란 짐승들이 웅크리고 앉아 있는 것 같다. 군데군데 조성해 놓은 논에서는
늦벼가 무르익었는데, 그 노리끼리하면서도 푸른빛이 감도는 색채가 신비롭기까지 하다.
이 오묘한 늦벼의 색깔이 가미된 한국의 단풍(丹楓)이야말로 참으로 독특한 아름다움을
지닌 단풍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고한(古汗)읍의 리조트에 방을 정해 놓고 작은 절 정암사(淨巖寺)를 구경했다. 예전에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 나오던 정암사는 무언가 애잔하고 쓸쓸한 분위기였었던 것 같
은데, 지금은 관광버스가 드나들며 관광객을 토해내고 있는 제법 번잡한 곳이 되어버렸다.
땅거미가 지자 고한읍의 휘황찬란한 불빛은 대낮같이 밝다. 칙칙하던 옛 폐광촌을 카지노
가 이렇게 살려 놓았으니, 이런저런 부작용에도 불구하고, 우선은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든
다.
淸澄秋日欲斜陽 해맑은 가을 해는 서산으로 기울고
千壑楓紅晩稻香 골짜기마다 단풍 붉고 늦벼 향기로워라
古汗夜燈如白晝 고한읍 밤 불빛은 대낮처럼 밝은데
淨巖孤月照禪房 정암사 외로운 달 선방을 비추네
생고기 구이가 매우 맛있는 고한읍의 낙원식당(강추!)이라는 곳에서 저녁을 먹고 리조
트에 돌아와 두 다리를 뻗으니, 이 좋은 곳에서 단 하룻밤을 자려고 계획한 것이 못내 아
쉬워진다.
새 날이 밝고, 오늘은 그 유명한 정선의 장날이다. 이곳은 산동네라서 이웃 읍으로 가려
면 산길을 지나야 하니, 오늘도 아름다운 단풍이 시리도록 눈에 들어온다. 그러나 장에 도
착하니 사람이 많아서 떠밀려 다니는데, 물건 값도 전과 달리 비싼 것 같고 분위기도 시끄
럽기만 한 것 같아서, 단감 한 보따리만 사가지고 발길을 돌린다.
또 다시 단풍 병풍 속으로 차를 몰아 적막한 산굽이를 돌다가 길이 하 수상하여 노인 한
분께 길을 묻는데, 근처에 백년도 넘은 물레방아가 있으니 구경하고 가라고 하신다. 백전
리(柏田里)에 있다는데, 백전이면 잣나무 밭이라, 이름도 예뻐서 당장 가르쳐 주신대로 방
향을 틀었다. 모퉁이 두 번 돌면 바로 조오기~ 라고 하셨는데, 왜 이리 물레방아는 안 나오
고 시골 산길은 좁아지는지! 한참을 산 밑으로 찾아 들어가니, 아! 개울 건너 물레방아가,
있다!
큼직한 물레바퀴를 관통하는 중심걸이 기둥이 돌아가는 소리가 쿵쾅 들려온다. 길 정리
를 하느라 시냇가 여기저기 시멘트를 발라놓고 개울을 건너라고 현대식(?) 나무다리를 만
들어 놓아, 내가 상상하던 고즈넉한 옛날 분위기는 없다. 그러나 물레방아 옆의 오래된 석
축과 나무에 낀 이끼, 갈대로 엮은 방앗간의 지붕을 보면, 깊숙한 이 계곡의 100년 전의 모
습을 상상하기가 어렵지는 않다.
問路過橋野叟言 들 다리에서 길 물으니 노인 말씀이
柏田水碓百年存 백전리 물레방아 100년이나 되었다기
終尋窈谷靑山下 푸른 산 밑 깊은 계곡 마침내 찾아가니
輪轉聲飛隔水村 물레바퀴 도는 소리 시내 건너 들려오네
어둑컴컴한 물방앗간으로 고개만 들이밀고 나오는 아내를 돌려세워 함께 안으로 들어
가니, 절구 공이는 멈추어 놓았고 흙냄새 속에서 적막하기만 하다. 옛날엔 마을 사람들이
모여서 제법 번잡도 하였으련만 지금은 찾는 이 하나도 없이 조용하기만 하구나. 계곡엔
우리 뿐 사람도 없이 조락(凋落)의 쓸쓸한 바람만 불어온다. 벌써 11월이구나!
(퍼온 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