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우 (思友)
K와 P는 고교 1학년 때 같은 반이 되면서 알게 되었다. 금세 마음이 통한 두 까까머리 친
구는 방과 후 도서관에서 만나 공부하고 밤늦게 함께 귀가하며 많은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재미있는 영화를 함께 보기도 하였고 휴일에는 등산을 가기도 하였다. 음악시간에 배운
‘동무생각’이라는 노래가 좋아서 서로 얼굴을 바라보며 부르곤 했고, 우정의 징표를 남기고
자 사진관에 가서 명함판 흑백사진을 함께 찍어서 나누어 가졌다.
법대에 진학한 P는 동급생 여학생과 사랑에 빠져 미래에 대한 아름다운 꿈을 꾸다가, 유신
반대 데모에 참가한 일로 강제 징집을 당하게 되었다. 그때는 그런 때였다. 시간이 흐르면서
연인은 변심하였고, 간신히 휴가를 얻어 서울에 온 P는 연인의 변심에 큰 상처를 입고서 귀
대하는 열차를 기다리다가, 플랫폼으로 들어오는 열차에 몸을 던지는 비극적 선택을 하고 말
았다...
하느님은 K에게, 이승에서 P와의 우정을 4년 2개월만 허락하신 것이었다. 이 일은 K에게도
마음 한 구석이 떨어져 나간 것 같은 상처가 되어, 40여년이 흐른 지금도 저녁노을을 바라볼
때면 그때의 일들이 문득문득 떠오르곤 한다는 것이다.
K는 나의 오래된 벗이다. 얼마 전 그가 P를 생각하며 <사우(思友)>라는 제목의 오언절구 한
수를 나에게 보내왔다.
山頂夕陽斜 산머리에 석양이 기울어 갈 때
雲飄不見花 구름 흩날리고 꽃도 보이지 않네.
人生如泛草 인생은 물에 뜬 부평초 같은 것
念爾望紅霞 그대 그리며 붉은 노을 바라보네.
K는 근래에 한시(漢詩) 작법을 배워 자신의 시를 쓰기 시작하였는데, 내가 자기보다 좀 먼저
시작하였다고 하여 자작 한시를 꼭 내게 보내 첨삭(添削)해 주기를 의뢰한다. 내가 훌륭히 첨
삭하며 지도해 줄 능력은 모자라지만, 한시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늘 한시에 대한 의견을 주고
받는다.
K는 붓글씨 쓰기를 좋아해서 좋은 선생님에게 꾸준히 배워왔으니, 자연히 한시도 많이 읽은
편이라 초심 작가임에 비하여 상당히 세련된 시를 자주 보내와서 나를 놀라게 한다. 위 시에
나온 K의 옛 친구 이야기를 생각하며 시를 다시 찬찬히 읽어보니, 40여 년 동안 K의 가슴속에
물들어 있던 저녁노을 같은 그리움이 내게도 물들어와 뭉클한 기분이 된다.
친구는 떠난 지 오래이지만, 지금도 붉은 노을만 보면 아련한 그리움이 떠오른다는 K는 아마
도 그 옛 시절 P와 함께 붉은 저녁노을을 바라본 적이 있었을 것이다. 간결하면서도 강한 그리
움을 전달해주는데 성공한 이 시에 대해, K는 고칠 곳이 없느냐고 자꾸 묻는다. 정 그렇다면 2
구(句)의 끝 석자 不見花(불견화)를 半落花(반낙화)로 고치면 어떻겠느냐고 했다. 그리고 4구
의 爾(너 이)를 좀 더 정중한 표현인 子(그대 자)로 고치자고 했고.
그리움을 토로(吐露)하기 직전의 배경을, ‘구름 흩날리고+꽃도 보이지 않는다’ 보다는 ‘구름
흩날리고+꽃도 이미 반은 떨어졌다’ 가 낫지 않겠는가 하는 나의 의견에 K는 선뜻 동조하며 즉
각 다시 시를 고쳤다. 보고 즐길 꽃도 없다고 말하기 보다는, 있는 꽃들도 이미 반이 다 떨어졌
으니 남은 꽃들도 머지않아 다 떨어지겠지, 이제 여생을 늘 그리움 속에 살아 가겠구나 라는 뉘
앙스를 표현하기 위한 나의 제언을 받아준 K에게 감사한다.
山頂夕陽斜 산머리에 석양이 기울어 갈 때
雲飄半落花 구름 흩날리고 꽃은 반이 졌구나.
人生如泛草 인생은 물에 뜬 부평초 같은 것
念子望紅霞 그대 그리며 붉은 노을 바라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