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사임당 (申師任堂)
신사임당이 서울에 살 때 강릉의 친정어머니를 그리며 쓴 시에
이런 구절이 있다.
何時重踏臨瀛路 어느 때면 강릉의 땅을 다시 밟아서
更著斑衣膝下縫 색동옷 입고 모친 곁에서 바느질할고
* 重踏중답...다시 밟다, 臨瀛임영...강릉의 옛 별호, 著(옷)입을 착,
斑衣반의...색동옷, 斑얼룩 반, 무늬 반, 膝무릎 슬, 縫꿰맬 봉
바느질과 수놓는 솜씨도 유명했지만, 그에 앞서 그녀는 성리학
적 지식과 고전, 역사, 문학에도 두루 밝았으니, 지금으로 치면 실
력 있는 학자이며 문인이요, 솜씨 좋은 화가이자 서예가(書藝家)
였다.
그녀의 서예 작품으로 당시(唐詩) 오언절구 여러 수를 쓴 초서
(草書) 병풍이 전해진다. 인터넷에서 찾아보니, 초서에 대한 전문
지식이 없는 나의 눈에도 참으로 아름답게 보인다. 단아(端雅)하면
서도 여성다운(?) 힘과 절도(節度)가 느껴진다.
어떤 사람이 이 초서 병풍에 있는 쓰여 있는 글자 중에서 靜(정),
溪(계), 老(노), 釣(조)의 네 글자를 채자(採字)하여 액자로 만든 작
품이 있는데, 나의 친구가 이것을 구입했으니 구경 오라고 연락이
왔다.
서둘러 가서 그 작품을 구경하였다. 靜 溪 老 釣 라! 사임당이
직접 만든 구절은 아니지만 “조용한 냇가에 낚시하는 노인”이라
는 뜻이니, 한가한 그 풍경이 금세 눈앞에 떠오른다.
더구나 친구는 그 네 글자를 각각 첫 자로 시작하는 칠언 절구
를 지어 내 앞에 내어 놓는 것이 아닌가?
靜聞睍睆囀谷鶯 계곡의 꾀꼬리 소리 아름답게 들리고
溪流廻曲似琴鳴 냇물은 굽이쳐 흘러 음악 소리같구나
老松鬱鬱幽香起 울창한 소나무 숲에 그윽한 향이 일고
釣叟安閑瞌不驚 노인은 낚싯대 앞에 편안히 조는구나
* 靜고요할 정, 溪시내 계, 老늙을 노, 늙은이 노, 釣낚시(할) 조,
睍睆현환.. 소리가 아름다운 모양, 囀새 지저귈 전, 鶯꾀꼬리 앵,
安閑안한...편안하고 한가로운 모습, 瞌졸 갑, 驚놀랄 경
오호! 명작이로고! <靜 溪 老 釣> 액자를 앞에 두고 감상하며
각 네 글자로 시작하는 칠언절구를 지어내서 마치 그림을 보는 듯
한 정경(情景)을 만들어낸 솜씨가 보통이 아니다. 액자를 자신의
책상 옆에 걸어두고 늘 감상하고 있으니, 나의 부러움은 말 할 수
도 없다.
집으로 돌아오며 나는 어느새 그 그림 속의 낚시하는 노인이 되
어 한가롭게 졸고있는 내 자신을 발견하였다. 늘 마음속에 그리지
만 이루지 못한 꿈, 자연 속으로 거처를 정하고 욕심 없이 담담한
마음으로 한가한 노경(老境)을 보내고 있는 나를 상상해 본다.
크고 넓은 집이 필요하겠는가, 산해진미(山海珍味)가 필요하겠
는가, 마음을 씻어주는 솔바람과 대 그림자 비치는 맑은 물, 낚시로
잡은 몇 마리 고기와 숲에서 손수 뜯은 싱싱한 나물이면, 홍진(紅塵)
속에서 물욕(物慾)과 싸우며 살아온 이 몸의 기름기를 빼기에 충분
할 것이다. 친구의 액자와 자연시(自然詩) 덕분에 나도 잠시 착한 철
학자가 되어 친구에게 답시(答詩)를 지어 보낸다. 靜, 溪, 老, 釣로...
靜聞松籟洗風麈 솔바람이 조용하게 세상 풍진 씻어주고
溪水淸澄竹影新 해맑은 시냇물에 대 그림자 새롭구나
老叟飽饒無所欲 늘그막에 풍요롭게 살고픈 맘 없으니
釣魚采蕨足安身 고기 낚고 나물 뜯어 이 한 몸 족하도다
* 聞들을 문, 松籟송뢰...솔바람 소리, 風麈풍진...속세의 때,
老叟노수...늙은이, 飽饒포요...배불리 먹고 남게 넉넉함,
無所欲무소욕...하고자하는 바가 아님, 采蕨채궐...고사리를 뜯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