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모자 2022. 8. 26. 16:59

나와 까까머리 중학동창인 K

나와 함께 의사의 길을 걸어온 다정한 벗이다.

 

산부인과 의사로 강북을 주름잡아온 K

팔방미인 풍류객답게 한시 읊기를,

그것도 중국어로 읊기를 좋아한다.

 

느즈막하게 나의 꼬임(?)에 넘어가

한시(漢詩) 작시(作詩)에 발을 들여놓은지 여러 해

 

즐거우나 괴로우나 그때그때의 감정을

한시로 써서 주고 받는 사이가 되었다.

 

어느날 K, 한문(漢文)에 조예가

깊은 자신의 친구 J를 내게 소개하였고,

 

우리 셋은 한시를 좋아한다는

동료의식을 가지고 가끔씩 모일때마다

각자 지어온 한시를 교환하곤 했다.

 

한시를 짓는 사람은 스스로의 호를 가지고서,

자신을 칭할때 또 상대를 부를 때

아호(雅號)로 부르는 것이 예의라면 예의다.

 

K는 두하(斗河), J는 목선(穆詵), 나는 회인(懷仁)이다.

 

본격적으로 첫 모임을 가지는 날,

안부 인사와 함께 따끈한 술이 몇 순배 돌고,

 

K는 자신이 지어온 다음과 같은 시를

중국어로 맛깔나게 읊어주었다

 

贈穆詵懷仁故朋倆

 

懷詵兩士遠憧長    회선양사원동장

邂後初秋座有香    해후초추좌유향

向老今宵酬唱樂    향노금소수창락

風凉賞月揭銀觴    풍량상월게은상

 

내 오랜 벗 목선 회인께 드림

 

회인 목선 두 선비 멀리서 그리워하다가

초가을에야 만나니 그 자리 향기롭구나

이 밤에 늙은이들 시 주고받는 즐거움에

시원한 바람 달빛아래 은잔을 기울이세

 

 

낭낭하고 유창한 중국어 발음에

듣기도 재미 있고 술맛도 배가(倍加)되는 느낌.

 

나지막하게 읊었지만 옆좌석 손님들은

무언가 재미있는 일을 한다는 낌새를 가지고

눈웃음을 보내는 이도 있었다.

 

K의 詩의 운자(韻字)를 미리 알아두었던 나도,

그 운자에 그대로 화운(和韻)하여

준비해 간 절구(絶句)를 나지막히 읊었다.

 

      贈穆詵公  

 

襟懷穆老慕情長     금회목노모정장

最愛和顔遜志香     최애화안손지향

才學囊錐瀟灑貌     재학낭추소쇄모

向君佳夕進溫觴     향군가석진온상

 

  목선께 드림

 

마음속으로 목선을 오래동안 사모하였음은

온화한 얼굴에 겸손한 뜻을 좋아하여서 였고

재주 학식 저절로 드러나 맑고 깨끗한 모습

좋은 저녁 그대에게 따뜻한 술잔을 올린다네

 

창밖으로 백화점 근방의 찬란한 가로등 아래

질주하는 자동차 불빛을 내려다 보며,

 

가까운 옛 압구정(狎鷗亭)에 은은한 달빛이

내리는 모습은 우리의 상상속으로만 떠올려본다.

 

이제 목선(穆詵)의 차례인가.

 

仰羨伯牙絶絃          앙선백아절현 

 

高山流水斗懷翁     고산유수두회옹  

橘井同途倚踏中     귤정동도의답중  

晩近偸閑吟鳳藻     만근투한음봉조

冀希膠漆永無窮     기희교칠영무궁

 

백아의 거문고줄 끊음을 부러워함

 

고산과 유수와 같은 두하와 회인옹

인술의 길 서로 도우며 걷고 있는데  

늦으막히 요즘엔 짬을 내 좋은 시를 읊네

그 우정 오래도록 이어지기를 바라오

 

* 高山流水마음을 알아주고 참다운 우정을 나누는 친구,

            춘추시대 사람 백아와 종자기를 말함,

  橘井귤정의사(醫師)를 이르는 말, 한문제 때 '소탐'이라는

                  사람의 집에 있던 우물물과 귤나무의 귤을 먹고

                  역병을 치료하였다는 고사에서 나온 말.

  偸閑투한틈을 내어, 偸훔칠 투, 鳳藻봉조훌륭한 시문,

  冀希기희바라건대, 膠漆교칠떨어질 수 없는 친한 친구,

 

 

백아(伯牙)는 춘추전국시대의 저명한 거문고 고수,

종자기(鍾子期)는 백아의 연주 소리만 듣고도

백아의 속마음을 헤아린다는 친구.

 

백아는 종자기가 죽은 후

자기의 '음악을 알아줄 이'가 없다하여

거문고 줄을 끊어버렸다.

 

여기에서 '지음(知音)'이라는 말이 유래하여

속마음을 알아주는 진정한 친구란 뜻으로 쓰인다.

 

K와 나를 백아와 종자기의 사귐에

가탁(假託)한 표현이니 난 그저 무안(無顔)하기만 하다.

 

봉조(鳳藻)는 아름다운 시나 문장,

교칠(膠漆)은 아교와 옻처럼 떨어질 수 없는

돈독한 두사람의 우정을 말하는 것이니,

 

이 시()는 함유(含有)하고 있는 스토리가 풍부하고

시어(詩語)의 선택이 넓고 깊어  

J는 역시 한 눈에도 고수(高手)라는 걸 알 수 있었다.

 

J의 시의 운자(韻字)를 미리 알아둔 나는

J의 시에도 역시 화운시(和韻詩)를 준비하여 읊었다.

 

懷仁穆詵斗河翁     회인목선두하옹

意氣相和濁世中     의기상화탁세중

疫病蔓延何日會     역병만연하일회

應筵滔滔興無窮     응연도도흥무궁

 

회인과 목선과 두하 세 늙은이는

험한 세상 뜻이 맞아 서로 친하네

전염병 만연하니 언제 또 만날까

만남의 자리엔 흥이 끝이 없을 텐데

 

한시(漢詩) 쓰기란 실제로 한자공부를

좀 하고보면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닌데

 

한시(漢詩)를 쓴다고 말하면,

어유 그 어려운 걸 어찌 쓰냐며 말을 끝내니

 

나의 시()에 대해서 그 이상은

자세한 언급을 해주는 사람이 없었고

 

시를 써서 주고 받을 수 있는 사람도 없었는데

이젠 셋이서 이런저런 내용을 토론도 하며

 

주고 받고 또 고치고 고쳐주고 하는

친구가 되었으니 이 얼마나 기쁜가!

 

J는 후에 나를 격려하려고

 

懷仁絶句世無儔’  

회인의 절구는 좋아서 비할 상대가 없도다

라는 구절을 지어 보냈다.

 

나는 대뜸

朋師穆詵削添由

친구이자 스승인 목선의 첨삭 덕분이오

라고 써 보냈더니

 

J는 붕사(朋師, 친구이자 스승)라는 말이

거북하다며 소붕(騷朋=시나 글 친구)이라 겸양한다.

 

명나라 사상가 탁오(卓吾) 이 지(李 贄)는 

친구가 아니면 스승이 될 수 없고

 스승이 아니면 친구가 될 수 없다라고 했다.

 

스승은 친구처럼 다정해야 하며

친구는 상대에게 좋은 본을 보여야 한다는 뜻이다.

 

어리석은 자의 길동무를 하며 헤맨 일은 없었나,

나 또한 벗들에게 어리석게 행동하지 않도록

단단히 신들메를 조여야겠다.

 

J1()4()를 짓고

내가 2()3()를 지어서 완성한

절구(絶句) 한 수()로 긴 글을 끝맺으려 한다.

 

J는 끝내 4구에 소붕(騷朋, 시벗)을 넣었지만

내가 그것을 붕사(朋師, 벗이자 스승)로 고쳐 넣었다.

 

懷仁絶句世無儔  회인절구세무주

猥濫稱辭只自羞  외람칭사지자수

竄改增刪詩僅就  찬개증산시근취

朋師穆詵勵賡酬  붕사목선여갱수

 

회인의 절구는 좋아서 비할 상대가 없도다

외람된 찬사를 들으니 오직 스스로 부끄럽네

고치고 또 보고 고치고 겨우 시가 이루어지니

붕사 목선이 시 주고 받으며 북돋아 준 덕분!

 

* 無儔무주…(비할)짝이 없다, 儔짝 주, 누구 주,

  猥濫외람분에 넘치다, 稱辭칭사칭찬의 말,

  羞부끄러울 수, 竄改찬개시문을 고침,

  竄숨을 참, 고칠 찬,

  增刪증산시문을 다듬어 보태거나 깎음,

  僅겨우 근, 就이룰 취, 勵힘쓸 려,

  賡酬갱수남의 시에 답하여 지어보냄.

 

* 아래 사진은 K가 '하화(荷花)'라는 중국시를

  직접 써서 내게 보내준 부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