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對句)
이백(李白)은 시선(詩仙), 두보(杜甫)는 시성(詩聖),
왕유(王維)는 시불(詩佛)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는데
같은 당(唐)나라 때 시귀(詩鬼)라고 불렸던 시인이 있었다.
26세로 요절한 이하(李賀, 李長吉, 791~817)였다.
말을 타고 가면서 지은 시구를 시낭(시주머니)에
넣었다가 나중에 모아 좋은 시를 만들어 발표하곤 하였다.
그의 시에는 생생한 표현은 물론, 좀 이상한 어투나
때론 염세주의(厭世主義)적인 표현도 적지 않아
아마도 후세인들에게 그런 별명을 얻지 않았을까.
그가 지은 7언 율시의 한 구절에 天若有情天亦老
(천약유정천역노)라는 구절이 있다, 하늘도 만약 감정을
느낀다면 그 하늘도 시달리고 슬퍼한 나머지 필히 늙어
노쇠해져 갈 것이다… 라는 뜻이다.
긴 인간의 역사상 벌어진 모든 희로애락사(喜怒哀樂史)
를 다 내려다 보고 있었음에도, 하늘은 그 모습과 색깔
과 성질이 하나도 변치 않았으니, 이는 ‘하늘은 원래 무
감각한 존재이리라’는 한탄이다. 사람은 힘든 일을 겪으
며 늙어가는데도…
각설하고, 이하가 지은 이 天若有情天亦老(천약유정천
역노)라는 구절은 중국 역사상 멋진 7언구로 이름이 나서,
이후의 수많은 시인들이 그에 잘 어울리는 대구(對句)를
지어붙이려고 애를 써오다가, 겨우 다음 대(代)인 송나라에
이르러 석연년(石延年)이라는 시인이 月如無恨月常圓
(월여무한월상원)이라는 대구(對句)를 지어 붙이자,
주위가 모두 놀라서 책상을 두드리며 절창(絶唱)이라고
부르짖었다고 한다.
天若有情天亦老 천약유정천역노
月如無恨月常圓 월여무한월상원
역사는 밤에 이루어진다고 했는가? 저 달은 셀 수도 없는
수많은 밤을 내려다보며 얼마나 많은 슬픈 일을 보았기에
그토록 한(恨)이 많아 그 모습이 여위었다 부풀었다를 반복
하는지…
저 두 줄을 위아래로 짝을 맞추어 보면, 하늘과 달은 천문대
(天文對)요, 만약(若과 如), 있고(有) 없고(無), 정(情)과 한(恨),
부사 역시(亦)와 늘(常), 여위고(老, 늙어서)와 둥들고(圓, 살찌고)….
늘 우리가 바라보며 하소연 하는 하늘과 달을 표현한 참으로 딱
들어 맞는 대구(對句)가 아닐 수 없다.
나의 벗이 이 유명한 대구(對句)를 내게 보내며 이왕이면
나머지 두 구(句)도 어울리게 써붙여 칠언 절구를 한 편 완성
해보면 어떻겠냐고 숙제를 보내왔다.
여러 세기(世紀)를 훌쩍 넘은 대시인(大詩人)의 훌륭한 대구(對句)
에 내가 감히…라면서 사양을 했지만, 홀로 있는 시간만 나면
그 생각이 머리에 떠올라 사라지지 않는다. 벗이 또 내 병(病)을
돋게 하셨네 ㅠ
불을 끄고 자리에 누워서도 그 생각이 떠나지 않는다.
이하(李賀)는 하늘(天)을 썼고, 석연년은 달(月)을 썼으니,
둘 다 실은 하늘이요, 내가 잇는다면 나는 한글의 창제 원리에
도 있다는 천지인(天地人)에서 地와 人을 써 보면 어떨까?
그래보자, 3구는 地 로 시작하고, 4구는 人으로 해보자.
나는 다시 불을 켜고 아내가 깨지 않도록 살살 서재로 가서
시 자료책과 옥편을 가지고 왔다. 이리 찾고 저리 찾고 하는 중에
새벽은 다가오는데… 어찌어찌하여 휴~ 겨우 완성하였다.
天若有情天亦老 천약유정천역노
月如無恨月常圓 월여무한월상원
地能施惠潤霑物 지능시혜윤점물
人卻背恩慳吝錢 인각배은간린전
하늘이 정을 느낀다면 스스로 늙어가고
달에게 한(恨)이 없다면 모습 늘 둥글겠지
대지는 은혜 베풀어 생물들을 키우는데
인간은 은혜 모르고 저 가진 것만 지키려네
* 若만약 약, 亦역시 역, 老늙을 노,
如만일 여, 常항상 상, 圓둥글 원, 能능히 능(부사),
施惠시혜…은혜를 베풀다, 施베풀 시, 施惠은혜 혜,
潤霑윤점...은택을 베품. 潤윤택할 윤, 적실 윤, 霑적실 점,
卻도리어 각, 背恩배은…은혜를 배신하다, 背恩배은...은혜를 배신하다,
慳吝간린…아끼다, 인색하다, (가지고 남에게 주려하지 않다)
* 이렇게 다른 이가 쓴 詩의 한 구절을 가져와 그대로 붙여 쓰는 시를
녹로시(轆轤詩)라고 한다. 녹로(轆轤)...도르래,
남의 시에서 가져오는 부분을, 새로 쓰는 7언 절구의 제3구에만
제외하고 어느 부분에도 쓸 수 있다.
(고교동창 주성준박사의 사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