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에서 배우다

색광(色光)과 형태(形態)

겨울모자 2006. 5. 30. 23:47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이 쓴 산문집 해설서를 흥미 있게 읽고 있습니다.

조선 후기에 태어나 정조 4년인 1780년에 사신단(使臣團)을 따라 청나라를

방문하고 돌아와 저 유명한 열하일기(熱河日記)를 저술한 문인(文人)이며
환로(宦路)에 나아가 벼슬살이도 적잖이 했고 무엇보다도 이용후생(利用厚生)
의 정신을 주장한 실학사상을 편 사상가이기도 했던 박지원...

  일찌기 사물을 보는 시각(視覺)의 다양성에 대해서 말한 그는 능양시집서(菱
洋詩集序)라는 글에서 <사물의 색(色)을 보되 광(光)을 놓치지 말아야 하고 형
(形)을 보되 태(態)를 받아들일 자세가 되어야 한다>라고 갈파한 바 있습니다.

  까마귀는 항상 검은 색이라고 생각할 것이 아니라, 햇빛을 받으면 푸른빛이나
혹은 보랏빛을 띌 수도 있다는 것이지요. 또한 나(自身)는 항상 한 가지의 내가
아니라 겸손한 나와 간교한 내가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사(世上事)는 보는 관점에 따라 얼마든지 다른 견해가 있을 수 있는 것이

므로 타인들에게 항상 내 의견만을 주장하고 내 식으로만 모든 것을 해결하자는

고집은 우리네 세상살이를 더욱 어렵게 꼬이게 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의 재력(財力)이나 지위(地位)를 곧바로 그 사람의 인격으로 간주하
는 행위도 이러한 경우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겉모습만 보고 사람을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지요. 외모가 비록 추해도 아름다움을 풍기는 사람이
있는 반면, 겉 모습은 그럴 듯해도 볼품이 하나도 없는 사람도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어떤 이의 재력이나 지위는 그 사람의 형(形, 모습)이 되고 그 인격은
그 사람의 태(態, 삶의 태도)가 된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오늘날의 문단에 내어 놓아도 훌륭하다고 생각될 이런 수준 높은 글들이 옛날
에 있었다고 생각하니 놀랍기만 합니다. 한자(漢字)로 쓰여 있고 널리 알려져 있
지 않아서 제가 잘 모르고 있었던 것 뿐... 그의 글 속에서 그가 보여주는 세련
되고 수준높은 철학과 문학관은 그야말로 감탄할 정도!! 이백 수 십 년 전의 문인
이 마치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들려주려고 쓴 것 같은 착각을 하게 됩니다.

  그는 또 옛 사람의 글을 어떻게 따를 것인가에 대해서도 훌륭한 견해를 들려줍
니다. 오늘을 사는 우리가 옛글에 나오는 내용을 무턱대고 그대로 모방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는 것이지요. 옛글을 존중하되 그 정신(精神)만을 본 받고 새 것
을 만들어 내되 옛 정신에 어긋나지 않도록 하여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
다. 

  특히 문학(文學)에 있어서 그러한 정신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옛 사람의 글의

좋은 부분을 흉내 내고 인용하여 마치 자신의 글인 것처럼 대가(大家) 연(然)한다
면 우스운 일입니다. 고문인용가(古文引用家)라고나 할 수 있는 이런 사람들이 훌
륭한 문인으로 존경받는 일은 곤란하겠지요. 몇 마디 글자로 옮겨놓으니 별것 아닌
듯하지만, 고금(古今)과 국내외(國內外)를 넘나드는 해박한 예시(例示)를 곁들여 
가며 설파(說破)한 내용이 무릎을 치게 합니다.

  흔히들 우리네 삶에 있어서의 교훈적인 메시지를 알리거나 강조하려할 때 중국
의 고전(古典)을 인용하여 표현하는 경우가 많은데, 중국의 고전도 훌륭하니까 뒤
져볼 필요가 있겠지만 우리나라의 옛글도 많이 읽어야 하겠다는 생각입니다. 그러
려면 우선 우리의 고전을 연구하는 학자들이 많아져야 할 텐데.. 

  그러나 요즘 당장 돈이 되지 않는 인문학(人文學)을 천대하는 풍조가 만연해 가
는 것 같아 걱정이 됩니다. 대학에서 학기 초가 되면 인문학을 지원하는 학생 수가
급격히 줄어들어 몇몇 강좌들을 없애거나 심지어는 과(科)를 폐쇄해야할 지경에

 이르는 대학도 있다니 크게 우려할 일입니다.

  무엇이라도 돈이 안 되는 것은 필요 없다..라고 생각하는 물신주의(物神主義)!
경제도 좋고 돈도 중요하지만 한편으론 우리의 정신을 살지게 하는 학문 연구가
풍부하게 이루어지는 여유 있는 사회에 살고 싶습니다. 이런 생각..사치스러운 것
아니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