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모자 2006. 5. 30. 23:49
  저녁 6시 반,

  어김없이 저는 가방을 챙기고 자리에서 일어납니다. 간호사들에게 수고
했다는 인사를 남기고 차고로 향합니다. 거리엔 벌써 깜깜한 어둠이 내려
앉았습니다.

 

  이 계절이 되면 저 밝은 대낮은 무엇이 그리 바쁜지, 오후 다섯 시만 조금

넘어도 떠날 채비를 하느라 재빨리 커튼을 내리고 사람들을 겨울잠 같은 밤

시간으로 밀어 넣기에 바쁩니다. 아마도 지구의 반대 쪽에 매우 흥미로운

사업이 있는 모양이지요? 

  이 시간 압구정로에는 활기가 가득합니다. 추워진 날씨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분주히 횡단보도를 건넙니다. 백화점과 명품관은 건물 벽과 나
무들 위에 노오란 깨알전구로 장식을 달고서 마치 금가루를 뿌려 만든 밤
의 성(城)처럼 휘황찬란한 모습으로 서 있습니다. 

  그리고 보니 크리스마스가 얼마 남지 않았군요. 캐롤은 아직 들려오지
않지만 분위기는 어느새 무르익어 가는 중입니다. 그러나 왠지 아직도 노
숙자들이 많다는 서울역의 풍경이 자꾸 겹쳐 떠오릅니다. 아침 신문에는
서울역 노숙자 중 40 여명이 알콜 중독증이라더군요. 마음이 무거워집니
다. 

  멀리 청담 로타리의 신호등이 보입니다. 파란 불인데도 차들이 가지
못하고 이상하게 엉켜 있습니다. 다가가서 서 보니 직진 차선에 불법 좌
회전을 하려는 차들이 몰려서서, 파란 불인데도 직진 차들이 가지 못하
고 주춤대는 것입니다. 좌회전 차선이 길게 서있으니까 그 옆 직진 차선
에 가서 좌회전을 대기하고 있는 것이죠. 이런 차가 몇 대 있으면 러시
아워에는 편도 3차선 정도의 길은 막혀서 잼이 일어납니다. 특히 버스들
이 거리낌 없이 이런 짓을 상습적으로 합니다.  

  한두 번 신호를 받지 못해서 갈 길이 약간 늦어지더라도 질서를 지키는

것이 우선이어야 할 텐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얼마를 더 기다려야 질서를
잘 지키는 국민이 될까요? 

  포철 빌딩의 훤히 비치는 유리 벽 속에 설치된 백남준 비디오 작품의 TV
화면이 번쩍이는 것을 보면서 테헤란로를 건넙니다. 

"언제 한 번 낮에 저 안에 들어가서 저 작품을 좀 자세히 감상해 보리라" 
  여러 해 동안을 수도 없이 이 곳을 지날 때마다 해온 생각이지만, 또한
그 곳을 지나치기가 무섭게 잊어버리는 생각이기도 합니다. 언제 한 번..
언제 한 번..하지만 제가 은퇴한 할아버지가 되어서나 가능할 것인지..쓴
웃음이 나옵니다. 

  좌측으로 눈을 돌리면 근처 대형 빌딩 안에 사무실이 있는 친구 생각이
떠오릅니다. 얼마 전에 이 근처로 와서 같이 점심을 먹고 차 한 잔하고
헤어졌는데 또 보고 싶네요. 몇 해 전에 부인과 헤어져서인지 요즘 부쩍
외로워 보이는 것 같습니다. 

  이 친구는 이탈리안 음식을 좋아해서 만날 장소를 정할 땐 꼭 이탈리안
을 먼저 말합니다. 저는 은근히 제가 좋아하는 한식을 말해서 설왕설래하
다가 절충을 하곤 합니다. 그 과정도 재미가 있지요. 며칠 전 저녁을 하자
는 제의를 선약 때문에 물리친 일이 마음에 좀 걸립니다. 내일은 전화를
해 봐야지...이렇게 이유 없이 보고픈 것이 친구입니다. 

  라디오에선 연말 정산에 관한 정보가 끊임없이 흘러나오고, 옆에 서 있
는 자동차의 운전자는 불이 새빨갛게 되도록 담배를 빨고 있습니다. 저게
뭐가 그리 좋다고 저렇게..저는 7년 전에 끊었지만 그 이전엔 제 모습도
그랬었지요. 갑자기 목구멍 속이 간질간질한 것 같습니다. 

  대치동 마루턱에 올라서면 강남의 끝 부분이 넓게 잘 보입니다. 물론 자
동차와 건물의 불빛으로 가득찬 거리가 말입니다. 저는 이 곳의 조망을 느
끼는 순간 엉뚱하게도 먼 옛적을 자주 상상합니다. 1960년 대 만 해도 이
곳은 인적이 드문 산골이었습니다. 만약 그 때 제가 이 곳 산마루에 서 있
었다면 어떨까? 대개 이런 상상이지요. 

  확실히 우리나라의 발전은 세계적으로 유명하다고 할만 합니다. 30 여 년
전 만 해도 압구정동은 배추밭과 과수원이었고 양재동은 말죽거리라고 하여
서부 영화에 나오는 황량한 사막과 같은 곳이었으니 말입니다. 한 세대 만에
이 넓은 지방의 산골이 매우 번잡한 도심으로 번쩍거리게 되고 지하철이 이
리저리 뚫리게 되었으니 이야말로 상전벽해(桑田碧海)의 표본이 될 만 합니
다. 

  저 멀리 시야의 끝에는 제가 좋아하는 대모산이 버티고 있습니다. 밤이라
산은 안 보이지만, 약수터로 오르는 길에 설치한 나트륨 가로등 빛이 애인
의 보석 목걸이처럼 반짝이며 검은 허공에 걸려 있는 듯이 보입니다. 그 뒤
에 숨어 있는 산을 생각하면 마음속에 미소가 피어오릅니다. 주말이 얼마 남
았나를 헤아려 보게 되지요. 그리고 이쯤에서...약 30 분에 걸친 저의 퇴근
길 단상(斷想)도 끝이 납니다. ( 2001. 12. 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