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시(漢詩)의 맛과 멋

퇴근 길의 오독(誤讀)

겨울모자 2006. 6. 2. 15:52
 

  며칠 전 퇴근길.. 어두워진 거리로 차를 몰고 가는데,
앞에 가는 봉고 트럭의 뒤에 무언가 흰 글씨로 한자(漢字)
가 씌여져 있었습니다. 처음엔 무심코 보았는데, 신호대기
하느라 서 있을 때 그 글자들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飄風不終朝   驟雨不終日 
              (표풍부종조  취우부종일) 

  작은 트럭으로 개인 사업을 하는 분인 모양인데, 남들
에게 무엇을 말하려고 저렇게 차의 뒤에 저런 글을 써 놓
았을까? 하면서 글의 내용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얼떨결에 飄風(표풍)을 산들바람으로 생각하고서, "산들

바람도 아침 내내 부는 것은 아니고, 소나기도 하루 종일 오

는 것은 아니니"  산들바람 분다고 늘 좋아할 것도 아니고

소나기 내린다고 늘 낙담할 것도 아니라.. 

  일이 잘 풀릴 때는 나쁠 때를 생각하고, 상황이 나쁠 때

는 또 좋은 때가 온다는 것을 기억하고 용기를 잃지 말자!
아, 어디에 있는 글인지는 모르나 좋은 내용이구나. 

  저 글 귀가 저 사람의 좌우명인가보다. 사업환경이 쉽지
않은 요즘 저 사람도 우여곡절을 겪으며 저렇게 좌우명을
차 뒤에 써 놓았구나... 그런데 

  오늘 다시 생각이 나서 그 글 귀를 떠올려 자료를 찾아
보니, 노자의 도덕경에 나오는 글이었습니다. 번역을 보니

맞아! 飄風이 회오리 바람이지... "(요란한) 회오리 바람으

로는 아침 내내 불 수가 없고 (퍼붓는) 소나기로는 온 종일

내리지 못한다" 라는 뜻이었습니다.

 

  그 옛날 유명한 최치원(崔致遠)도 이 구절을 인용하여, 회

오리 바람이나 소나기 같은 자연의 조화도 오래가지 못하거

늘 하물며 사람의 못된 일에서랴! 하며 반역자 황소(黃巢)를

격(檄)하였던.. 바로 그 문장이었습니다.  

  무릇 갑작스럽고 요란한 일은 오래 가지 못하니 부드럽고
자연스런 모습이 오래 가는 것이고, 욕심을 버리고 차분한
마음을 가지라는 뜻으로도 해석이 되는데...

 

  그 트럭의 주인은 한 두 번으로 많은 것을 이루려는 욕심

이 사업에 큰 해(害)가 된다는 것을 절감했던 분이 아닐까.

혹은 끝까지 이겨나가자고 굳게 다짐하며 어려운 사업 환경

을 헤쳐 나가는 분이 아닐까.. 차 뒤 에 이런 좌우명을 써 붙

이고서...

  쉽게 오독(誤讀)하고서 천연덕스럽게 맞는 것으로 믿고
있던 저도 마음에 새겨야 할 글 귀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트럭을 또 한 번 만나는 우연은 없을까...
(2002. 11. 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