님 그리워 꿈길로...
한 차 한 잔 앞에 놓고... 시 감상이나 할까요?
조선 중종(中宗) 때 승지 벼슬을 하던 조 원(趙 瑗)에게 이
옥봉(李 玉峰)이라는 소실이 있었습니다. 엄연한 사대부 집의
딸이었지만 서녀(庶女)라는 신분 때문에 조 원의 소실이 된 것
입니다.
그러나 그녀는 학식과 문재(文才)가 넘쳐서 많은 시를 생산해
내어 황 진이, 허난설헌, 신사임당 등과 함께 조선 시대를 대표
하는 여류 시인으로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사람입
니다.
近來安否問如何
(근래안부문여하)
月到紗窓妾恨多
(월도사창첩한다)
若使夢魂行有跡
(약사몽혼행유적)
門前石路變成砂
(문전석로변성사)
이 근래 우리 님은 어이
지내나
사창에 달
비추니 생각 간절타
꿈길에도 발자취가 남는다
하면
문 앞 돌길
모래로 변했을 것을
효성스럽기로 이름난 조 원은 승지로서도 충직하여 임금의
곁을 떠나지 못하여 밤마다
고대(苦待)하는 이 옥봉에게도 오
랫동안 들르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이 옥봉은 어찌할 수 없는
그리움을 夢魂(꿈속의 넋)이라는
제목의 시로 표현한 것입니다.
오지 않는 님에 대한 그리움이 한숨과 한(恨)으로 바뀝니다.
보고 싶은
마음에 꿈속에서나마 수도 없이 님을 찾아 나가 보지
만, 님은 만날 수 없고 드나드는 발걸음에 대문 앞의 돌길이 닳
아 모래로
변할 정도라고 호소하고 있습니다.
여인의 님 그리는 심정을 생각하면 이러한 과장(誇張)이 과장
으로
느껴지지 않습니다. 더구나 돌이 변해서 모래가 된다는 표
현으로 긴 세월을 연상케함으로써 자신의 그리움의 간절함을 나
타내는
시인의 표현 기법이 돋보이는군요.
꿈길 이야기가 나온 김에 비슷한 이야기를 담은 시 한 수 더
읽어
볼까요? 황 진이(黃 眞伊)의
相思夢(상사몽)입니다.
相思相見只憑夢
(상사상견지빙몽)
儂訪歡時歡訪儂
(농방환시환방농)
願使遙遙他夜夢
(원사요요타야몽)
一時同作路中逢
(일시동작노중봉)
꿈 길 밖에 길 없는 우리의
신세
님 찾으니 그
님은 날 찾았고야
이 뒤엘랑 밤마다 어긋나는
꿈
같이 떠나
노중에서 만나를지고(김 안서
역)
儂:
나 농, 歡:너 환
많이 들어 보던 노래이죠? 꿈길이라는 제목으로 요즘도 가곡으
로 불리우고 있는
노래입니다.
서로 사랑하는 연인이 멀리 떨어져 있어 만날 길이 전혀 없으
매 그리워만 하다가,
꿈에서나 만날까 하여 님의 집으로 가보았
으나, 님은 벌써 나를 만나려 떠난 후이니... 꿈속에서도 만나지
못하고 돌아서는 이
허망함! 이제부터라도 밤마다 꿈속에서나마
만날 수 있도록 동시에 떠나 길 위에서 만날 수
있었으면...
소원(所願)하는 모든 것을 다 얻을 수는 없는 것, 이루어지지 않
은 소망을 품고 있는 이들에게 밤마다 꿀 수 있는 꿈이 있다는 것
이 하나의 자그마한 배려로 느껴집니다. 깨고 나면
허망하지만...
2002년을 살고 있는 우리들도, 그립고 만나기 힘든 님이라면 오
늘 밤 잠들기 전에 이런 꿈을
꾸기를 원하지 않을까요? 오백 년 전
의 황진이의 마음이 지금 우리의 마음과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지금까지도 우리에게 불리우고 있는 노래가 된 것을 보면 과연
명작이라고 할 수 있겠죠? (2002. 12.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