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시(漢詩)의 맛과 멋

님 그리워 꿈길로...

겨울모자 2006. 6. 2. 15:57
 날씨가 춥습니다. 일찍 찾아 온 겨울... 문 닫아 걸고 따뜻
한 차 한 잔 앞에 놓고... 시 감상이나 할까요? 

  조선 중종(中宗) 때 승지 벼슬을 하던 조 원(趙 瑗)에게 이
옥봉(李 玉峰)이라는 소실이 있었습니다. 엄연한 사대부 집의
딸이었지만 서녀(庶女)라는 신분 때문에 조 원의 소실이 된 것
입니다.

 

  그러나 그녀는 학식과 문재(文才)가 넘쳐서 많은 시를 생산해

내어 황 진이, 허난설헌, 신사임당 등과 함께 조선 시대를 대표

하는 여류 시인으로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사람입 니다. 

           近來安否問如何 (근래안부문여하) 
           月到紗窓妾恨多 (월도사창첩한다) 
           若使夢魂行有跡 (약사몽혼행유적) 
           門前石路變成砂 (문전석로변성사) 

           이 근래 우리 님은 어이 지내나 
           사창에 달 비추니 생각 간절타 
           꿈길에도 발자취가 남는다 하면 
           문 앞 돌길 모래로 변했을 것을 

  효성스럽기로 이름난 조 원은 승지로서도 충직하여 임금의
곁을 떠나지 못하여 밤마다 고대(苦待)하는 이 옥봉에게도 오
랫동안 들르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이 옥봉은 어찌할 수 없는
그리움을 夢魂(꿈속의 넋)이라는 제목의 시로 표현한 것입니다. 

  오지 않는 님에 대한 그리움이 한숨과 한(恨)으로 바뀝니다.
보고 싶은 마음에 꿈속에서나마 수도 없이 님을 찾아 나가 보지
만, 님은 만날 수 없고 드나드는 발걸음에 대문 앞의 돌길이 닳
아 모래로 변할 정도라고 호소하고 있습니다. 

  여인의 님 그리는 심정을 생각하면 이러한 과장(誇張)이 과장
으로 느껴지지 않습니다. 더구나 돌이 변해서 모래가 된다는 표
현으로 긴 세월을 연상케함으로써 자신의 그리움의 간절함을 나
타내는 시인의 표현 기법이 돋보이는군요. 

  꿈길 이야기가 나온 김에 비슷한 이야기를 담은 시 한 수 더
읽어 볼까요? 황 진이(黃 眞伊)의 相思夢(상사몽)입니다. 

           相思相見只憑夢 (상사상견지빙몽) 
           儂訪歡時歡訪儂 (농방환시환방농) 
           願使遙遙他夜夢 (원사요요타야몽) 
           一時同作路中逢 (일시동작노중봉) 

           꿈 길 밖에 길 없는 우리의 신세 
           님 찾으니 그 님은 날 찾았고야 
           이 뒤엘랑 밤마다 어긋나는 꿈 
           같이 떠나 노중에서 만나를지고(김 안서 역) 

           儂: 나 농, 歡:너 환 

  많이 들어 보던 노래이죠? 꿈길이라는 제목으로 요즘도 가곡으
로 불리우고 있는 노래입니다. 

  서로 사랑하는 연인이 멀리 떨어져 있어 만날 길이 전혀 없으
매 그리워만 하다가, 꿈에서나 만날까 하여 님의 집으로 가보았
으나, 님은 벌써 나를 만나려 떠난 후이니... 꿈속에서도 만나지
못하고 돌아서는 이 허망함! 이제부터라도 밤마다 꿈속에서나마
만날 수 있도록 동시에 떠나 길 위에서 만날 수 있었으면... 

  소원(所願)하는 모든 것을 다 얻을 수는 없는 것, 이루어지지 않

은 소망을 품고 있는 이들에게 밤마다 꿀 수 있는 꿈이 있다는 것
이 하나의 자그마한 배려로 느껴집니다. 깨고 나면 허망하지만...

  2002년을 살고 있는 우리들도, 그립고 만나기 힘든 님이라면 오
늘 밤 잠들기 전에 이런 꿈을 꾸기를 원하지 않을까요? 오백 년 전
의 황진이의 마음이 지금 우리의 마음과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지금까지도 우리에게 불리우고 있는 노래가 된 것을 보면 과연

명작이라고 할 수 있겠죠?  (2002. 12.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