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시(詩)의 속살

겨울 그리고 <주먹눈>

겨울모자 2006. 6. 2. 17:09
  매서운 칼바람이 불어 옵니다. 무던해 보이던 겨울에게 겨우
요거냐고 자꾸 치근덕거렸더니 할 수 없이 겨울이 본색을 드러
냅니다. 

  정신이 번쩍 들도록 아귀같은 찬 기운이 살갗을 때리고 눈을
찌릅니다. 겨울의 진짜 얼굴을 보는 것 같습니다. 차디찬 밖에
있다가 갑자기 따뜻한 가게같은 곳으로 들어가면 안경에 김이
서려 시야가 흐려집니다.

  찰나이지만 흐려진 시야로 보이는 모습들엔 평소와 매우 다른
것 같은 낯선 느낌이 섞여 있습니다. 이것도 겨울에나 느낄 수
있는 특이한 인상이지요.

  살을 때리는 이 겨울의 추위가 긴 여름 동안 나태해진 마음을
깨워 일으켜 안으로 채찍질하게 하는 계절... 이런 시 한 편 어
떨지요?


               눈 내리는 밤, 야근을 하고 들어온
               중년의 시인이 불도 안 땐 구석방에
               웅크리고 앉아 시를 쓰는 밤.
               CT를 찍어도 알 수 없는
               정체불명의 편두통에 시달리며
               그래도 첫마음은 잊지 말자고
               또박또박 백지 위에 만년필로 쓰는 밤.  
               어둡고 흐린 그림자들 추억처럼
               지나가는 창문을 때리며
               퍼붓는 주먹눈, 눈발 속에
               소줏병을 든 金宗三이 찾아와
               불쑥, 언 손을 내민다
               어 추워, 오늘같은 밤에 무슨
               빌어먹을 짓이야, 술 한 잔하고
               뒷산 지붕도 없는 까치집에
               나뭇잎이라도 몇 장 덮어줘, 그게 시야! 

                                                       - 전동균 <주먹눈>

  시인은 과연 시 쓰는 일을... 추운 방에서 덜덜 떨며 시 쓰는
일을 빌어 먹을 짓이라고 생각했을까요? 누가 시킨 것도 아닌 일,
자신의 첫마음을 지키는 일을 춥고 머리가 아파도 멈출 수 없는
이들이 바로 시인들일 것입니다.

  워드 프로세서가 아니라 백지 위에 만년필로 또박또박 써 내려
가는 것이 더 어울립니다. 시는.. 문명의 발달로 손상 받기 쉬운
인간성의 토로(吐露)이기 때문에...

  남들은 벌써 다 잊어버린 살아가는 일에 대한 고뇌(苦惱)로 시인
은 항상 외롭습니다. 이런 이들에게 위안이 되는 것은 이미 그 길
을 지나간 선배들의 존재일 것입니다. 술을 사랑하던 김종삼 시인
을 떠올려 그와 한 잔 나누는 상상 속으로 빠져드는 시인의 창밖에
주먹눈이 펑펑 내리고 있습니다.

  시인의 이상(理想)처럼 높이 매달려 있는 뒷산 까치집에도 역시
주먹눈이 내리고 있겠지요.... (2003.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