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에서 배우다

장안(長安)의 봄

겨울모자 2006. 10. 9. 10:25

  장안에 모란꽃이 피는 시기는 3월 15일을 기점으로 전후 20일간이다.
꽃이 피고 지는 20일간 온 성의 사람들은 미친 듯했으며, 도성의 대로
마다 수많은 말과 수레가 모란을 보러 간다... 으뜸으로 평가되는 모란
은 한 포기에 중농 열집의 세금에 해당되는 돈으로 사고 팔았다...

 

  길가의 주점에서 야광배(夜光杯)에 포도로 만든 미주(美酒)를 채워주
는 짙은 화장의 호희(胡姬 페르시아 여자)는 천금을 가진 공자들과 호기
로운 소년들을 사로잡고...

 

  정월 15일 밤을 전후한 며칠간을 원소관등(元宵觀燈)이라하여 집집마
다 제각기 디자인한 등롱(燈籠)을 줄줄이 매달아, 수많은 불빛이 온 성
의 거리와 골목을 대낮같이 훤하게 밝힌 가운데, 잘 차려 입은 남녀노소
들이 등불을 좇아 밤새도록 노닐고 노래하고 춤추며, 새벽이 되면 하나
같이 동쪽하늘이 밝아 오는 것을 아쉬워했다... 날이 밝으면 사람들이 사
라진 빈 거리에 보석장식 비녀 귀고리들이 그대로 떨어져 있었다.......

 

  일본 작가 이시다 미키노스케가 쓴 '장안의 봄(長安之春)'에 나오는
구절들이다. 중국의 옛 문헌들과 문학 작품에 나와 있는 당나라 시대의
세시 풍속을 모아 1941년에 초판을  내었으니 꽤 오래된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진시황릉이 있는 중국의 서안(西安)의 옛 이름은 장안(長安)이었다.
유방(劉邦)의 한(漢)왕조를 비롯하여 여러 왕조의 수도였던 장안은 서기
618년부터 약 300년간 당(唐)왕조의 수도로서 세계 제일의 규모를 자랑
하던 도시였다.

 

  당시 장안은 계획도시로서 5 m 의 담으로 둘러 싸여, 동서와 남북의
거리가 각각 10 Km와 9.5 Km였고, 황성 앞 주작대로의 폭은 150 m 였다.

 

  장안성은 108개의 방(坊)으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그중 80 여 방에는
중앙에 교차하는 십자로가 있고 그 끝에 각각 동문 서문 남문 북문이
있어 통금 시간이 되면 닫아 걸었다고 한다.

 

  그중 평강방(平康坊)이라는 곳은 기생집들이 많아 관리들과 시인 공
자들의 출입이 잦았다고 하며, 나이 든 기녀가 가모(假母)가 되어 젊은

기녀들을 거느리고 있고, 놀고 먹으며 기녀들에게 빌붙어 사는 '묘객'
(廟客)이라 이름한 기둥서방, 은밀히 여자를 사냥하여 기적(妓籍)에 넣

고 감시하는 여쾌(女쾌)라고 하는 인신매매꾼까지 있었다니... 놀라다

가도 머리가 끄덕여진다.

 

  당시 장안의 인구가 30만호(戶) 100만을 훌쩍 넘었다고 하며, 각국에
서 온 외교 사절과 유학생만도 각각 수천명이나 되었다고 하니, 그 북적
이는 사람들 틈에.. 인간의 욕구가 만들어 내는 문화와 그 찌꺼기들이 어
찌 없을 수 있었겠으며, 그 모습 또한 1400년이 지난 오늘과도 너무 흡사
하다는 점이 흥미롭다.

 

  그 화려하던 장안의 모습을 기대하며 서안에 다녀온 사람들의 실망하는

글을 몇 번 읽은 적이 있다. 당시의 장안성 모습은 거의 사라지고 현재 남

아 있는 유적들도 후대에 다시 건축한 것이 많기 때문에..

 

  그러나.. 중국의 역사와 당시(唐詩)를 읽으며 그려 왔던 내 머리 속의
장안 모습은 아직도 화려한 모습 그대로이다. 그리고 내 눈으로 직접 보
지 않고는 실망하지 않을 참이다. 어차피 시간은 모든 것을 변하게 하는
것.. 내가 사는 곳의 모습도 수십년 후면 아주 딴 곳이 되는 세상에서 살
면서.. 실망이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