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anz Liszt(프란츠 리스트) - 1
피아노의 신
젊은 시절의 리스트
프란츠 리스트는 1811년 10월 22일 합스부르크 제국에 속한 헝가리 왕국의 라이딩(Raiding)이란 곳에서 태어났다. 라이딩은 헝가리에서 도보르얀(Doborjan)이라고 불렀다. 라이딩은 현재 오스트리아 영토에 속하여 있다. 그러므로 리스트를 헝가리 작곡가가 아닌 오스트리아 작곡가로 간주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리스트 자신은 항상 헝가리인이라고 자처하였다. 리스트가 세례를 받은 라이딩 성당의 기록에는 그의 이름이 프란치스쿠스(Franciscus)라고 적혀 있다. 그러나 리스트의 친구들은 그를 프란츠(Franz)라고 부른다. 프란치스쿠스의 독일 이름이다. 리스트는 프랑스에서 프랑소아(Francois)라고 불렸으며 헝가리에서는 페렌츠(Frenc: Ferencz: Ferentz)라고 불렸다. 리스트가 항상 가지고 다녔던 1874년 발급의 헝가리 여권에는 Dr. Liszt Ferencz 라고 적혀 있다. 리스트의 아버지는 아담 리스트(Adam Listz)였으며 어머니는 안나 리스트(Anna Listz)였다. 이름들만 보아도 독실한 가톨릭신자임을 느낄수 있다.
봐이마르에서 리스트가 살았던 집
리스트는 오늘날 오스트리아의 부르겐란트(Burgenland)에 속한 라이딩에서 자라났다. 이 지역 사람들은 독일어를 사용한다. 아주 소수만이 헝가리어를 알아듣고 말할수 있다. 예전에는 공식 언어로 라틴어가 사용됐었다. 옛날 로마시대의 유물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라이딩이 헝가리왕국의 소속이 되자 사람들은 헝가리 말을 배우기 시작했다. 1790년대에 리스트의 아버지인 아담도 프레스부르크(Pressburg)의 고등학교에 다닐 때 헝가리 말을 배웠으나 실력이 형편없었다. 프레스부르크는 오늘날 슬로바키아의 수도인 브라티슬라바(Bratislava)이다. 라이당에서 학생들이 헝가리 말을 학교에서 배우기 시작한 것은 1835년부터였다. 리스트는 독일어로 생활하였기 때문에 독일어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고 학교에서 프랑스어와 이탈리아어를 배웠기 때문에 역시 능통했다. 리스트는 영어도 썩 잘 했다. 그러나 헝가리어는 수준 미달이었다. 리스트는 헝가리 말을 배우기 위해 노력했지만 나중에는 포기하고 말았다.
리스트의 국적에 대하여는 여러 가지 해석이 있으며 아직도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무엇보다 리스트가 어느 나라 사람이냐에 대한 자료가 부족하다. 헝가리에서는 국적이 아이의 아버지 쪽으로부터 계승된다. 리스트의 증조할아버지인 세바스찬은 독일인이었다. 18세기 초에 헝가리로 이주해 왔다. 그러므로 리스트의 할아버지와 아버지도 독일인이라고 해야 한다. 리스트의 아버지인 아담에 대한 기록을 보면 ‘아담 마토이스 리스트(AdamMatthaus Liszt): 독일계로 독일 국적’이라고 되어 있다고 한다. 리스트의 어머니 안나 마리아 라거(Anna Maria Lager)는 오스트리아 출신이다. 하지만 당시에는 오스트리아인이라고 하면 일반적으로 독일인으로 간주되었다. 이러한 가계를 따져볼때 리스트 자신도 비록 헝가리에서 태어났지만 독일인이어야 했다. 한편, 리스트의 증조할아버지인 세바스찬 리스트(Sebastian List)의 오리진이 독일이라는 것은 확실한 증거가 없는 얘기라는 주장이 있다. 사족이지만 리스트의 증조할아버지의 이름은 List 였는데 리스트의 아버지 아담이 프레스부르크의 고등학교에 다닐 때 List를 Liszt로 바꾸었다고 한다. 리스트 역사학자인 헝가리의 에르노 베크피(Erno Bekefi)가 리스트의 족보를 알기 위해 헝가리의 모든 기관에서 문서를 찾아보았으나 리스트의 증조할아버지인 세바스찬에 대한 출생기록은 찾지 못하였다고 한다. 이로 미루어보아 리스트의 증조할아버지는 젊을 때에 헝가리로 왔다고 볼수 있다.
파리 발리 데스테(Villa d'Este)정원의 나뭇가지들이 리스트의 얼굴 모습을 자연스럽게 그려 주었다.
이 궁전의 분수 소리에 영감을 받은 리스트는 Jeux d'eau a la Villa d'Este를 작곡하였다.
그러나 세바스찬 리스트에 대한 출생기록은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어느 곳에서도 찾을수가 없었다. 18세기에는 헝가리에 있는 많은 기록들이 오토만 터키에 의해 파괴되었다. 그래서 세바스찬 리스트에 대한 출생기록을 찾을수 없다고 보고 있다. 그에 대한 출생기록이 독일과 오스트리아에도 없으므로 세바스찬 리스트는 독일에서 이주해 온 것이 아니라 헝가리에서 태어났을 것이라는 가설이 신빙성을 얻고 있다. 오늘날 리스트에 대한 서적들에 따르면 리스트는 헝가리인이 아니면 독일인이라는 설명이다. 일설에 의하면 리스트는 슬로박 계통이라는 주장도 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리스트의 연구자들, 특히 벨라 바르토크(Bela Bartok)에 따르면 리스트의 음악적 스타일은 주로 프랑스 스타일이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리스트 자신은 언제나 자기가 헝가리 사림이라고 주장해 왔다. 그에게는 헝가리인이라는 것이 중요했기 때문이었다. 그의 이름인 Liszt는 헝가리어로 밀가루와 같은 가루를 말한다. 헝가리어에 lisztes molnar라는 것이 있다. 곡식을 빻아 가루로 만드는 방앗간을 말한다.
리스트의 어린 시절부터 청년이 되기까지 어떻게 발전해 왔는지에 대하여는 유감스럽게도 기록들이 부족하여 제대로 파악이 되지 않고 있다. 그러나 많은 학자들이 노력한 결과, 리스트는 어릴 때부터 음악에 천재적인 재능을 보였으며 특히 피아노 연주는 음악 역사에 있어서 그만큼 뛰어난 연주자가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한가지 의문이 있다. 리스트는 청년이 되어서도 피아노 레슨을 받았다. 일반적으로 당시의 피아노 대가들은 어릴 때부터 레슨을 받아 활동했으며 성인이 된 이후에는 레슨을 받지 않았다. 그런데 왜 리스트는 성인이 된 이후에도 피아노 교습을 받아야 했을까? 아버지 때문이라는 것이다.
베토벤의 흉상을 앞에 놓고 베토벤의 소나타를 연주하는 리스트. 그 옆에는 빅토르 위고, 로시니, 파가니니, 의장에 앉아 있는 조르즈 상드, 피아노 옆에 등을 보이고 앉아 있는 마리 다구의 모습. 1846년.
리스트의 아버지인 아담은 음악가가 되려는 꿈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피아노, 바이올린, 첼로, 기타를 연주할수 있었다. 헝가리 사람들이 바이올린과 같은 악기를 선천적으로 훌륭하게 연주한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아담은 직업적인 음악가가 되기 위해 프레스부르크대학교에 들어가 기악을 공부했다. 그러나 학비를 댈수가 없어서 중퇴해야 했다. 대학교를 중퇴한 그는 1798년 1월 1일부터 에스터하지 가문의 니콜라우스 공자와 계약을 맺고 에스터하지 궁전오케스트라의 단원으로 일하게 되었다. 생활비를 벌려면 그것이 최선이었다. 아담 리스트는 1805년부터 1808년까지 니콜라우스 공자의 여름궁전이 있는 아이젠슈타트(Eisenstadt)에서 지냈다. 에스터하지 궁전 오케스트라는 1804년까지 하이든이 지휘했었다. 그후 1811년까지는 요한 네포무크 훔멜(Johann Nepomuk Hummel)이 지휘했다. 아담 리스트는 제2 첼로 파트를 맡았다. 아담 리스트가 오케스트라 단원으로 있을 때인 1807년 9월 13일, 이 오케스트라는 베토벤의 직접 지휘 아래 베토벤의 C장조 미사를 초연했다. 그런 연고로 아담 리스트는 하이든, 훔멜, 베토벤 등과도 친분이 있었다.
바이로이트 공동묘지에 있는 리스트 영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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