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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시(漢詩)의 맛과 멋

글자로 그린 그림

          안개 자욱한 화원지(花園地)의 벤치 위엔
          한낮에 소녀들이 남기고 간
          가벼운 웃음과 시들은 꽃다발이 흩어져 있었다. 
          ..................................................
          퇴색한 성교당(聖敎堂)의 지붕 위에선
          분수처럼 흩어지는 푸른 종소리

 

   김 광균(金 光均)시인이 1935년에 발표한 ‘외인촌(外人村)’이라는 시의 부분입니다. 화

원지의 벤취 위에 놓인 시든 꽃다발에 소녀들의 웃음소리가 묻어 있습니다.

 

   마지막 행,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파장처럼 퍼져 나가는 종소리가 눈에 보이시나요.
시인은, 귀로만 듣던 종소리에 분수처럼 흩어지는 ‘모양’을 부여하였고 푸른 ‘색깔’을

입혔습니다. 당시의 시인이자 평론가인 김 기림(金 起林)은 “소리 조차를 모양으로 번

역하는 기이한 재주를 가진 시인”이라고 평했다고 합니다.

 

  그림에 관심이 많던 김 광균(金 光均) 시인은, 이처럼 글로써 그림을 그리는 작업으로
1930년대 후반에 소위 이미지즘 계열에 속하는 시들을 발표하여 신선한 반향을 일으켰지
만, 사실 이러한 시들은 오랜 옛날에도 있었습니다. 우리 한시(漢詩)에서는 이미 천 년
전부터 그러한 작품들이 있었으니, 김 광균 시인이 아마도 우리 선조들의 이러한 한시에
서 힌트를 얻지 않았을까요.

 

          塔影倒江飜浪底  탑 그림자 강물에 거꾸로 물결에 일렁일렁
          磬聲搖月落雲間  풍경소리 달빛 아래 구름 속에 퍼져 가네

 

  고려 박 인량(朴 寅良, ?~1096)이 중국의 사주(泗州) 귀산사(龜山寺)를 방문하였을 때
지은 시입니다. 둘째 구(句)의 搖(요)는 흔들다 혹은 흔들리다 라는 뜻으로, 직역하자면
‘풍경소리가 달을 흔들고 멀리 구름 사이로 떨어진다’라는 뜻입니다.

 

  잔잔한 수면 위로 파장이 퍼져 나가듯 처마 끝으로 연결되는 은색의 하늘 공간으로 풍

경소리의 파장이 은은한 달빛을 ‘입고’ 퍼져 나가는 것으로 해석해 보면, 일곱 자(字) 시

(詩) 한 구(句)가 놀라운 그림을 우리 눈 앞에 그려줍니다. ‘소리’에 ‘색깔’을 입혀 ‘모양’

으로 재탄생 시켰으니 이야말로 이미지즘의 원조(元祖)로 치부(置簿)해도 되겠습니다.

 

          茶罷松簷掛微月   차 마신 후 처마 끝에 초승달 걸려 있고
          講闌風榻搖殘鐘   설법 끝난 자리엔 희미한 종소리 들리네
    
  역시 고려의 김 지대(金 之岱, 1190~1266)가 지은 유가사(瑜伽寺) 시입니다. 들째 구
(句) 를 직역하자면 ‘종소리가 희미하게 흔들리고 있다’는 뜻이 될 것입니다. 이 경우
‘종소리를 듣는다’ 는 뜻으로 聞殘鐘(문잔종) 혹은 聽殘鐘(청잔종)이라고 하면, 함축
(含蓄)을 요체(要諦)로 하는 한시(漢詩)의 묘미는 사라지고 그저 평범한 서술이 되어 버
리고 맙니다.

 

  같은 '듣는다'는 뜻이지만, 흔들릴 搖(요)자를 그 자리에 집어 넣어 종소리의 파장을 눈
에 보이도록 한 시인의 시력(詩力)이 돋보입니다. 7언구(七言句)에서는 제 5자를 흔히
‘무릎자’또는 ‘시안(詩眼)’이라고 하여 그 구(句) 잘되고 못됨을 결정하는 중요한 글자로

보는데, 이 경우에는 搖(요)를 씀으로써 평범한 서술로 끝날 수 있는 구(句)에 회화성

(繪畵性)을 부여한 탁월한 용자(用字)의 한 예(例)로 생각됩니다.

 

          寒堆岳色僧扃戶   추운 산빛을 밀치며 중이 문을 걸어 닫고
          冷踏溪聲客上樓   싸늘한 계곡 물소리를 밟으며 나그네가 루에 오르네

 

  순흥의 소수서원이 자리에 있던 숙수사(宿水寺)라는 절을 방문했던 노 여(魯 璵)가 지
은 시입니다. 둘째 구(句)에서 추운 계절에 누각에 오르는 나그네의 발걸음마다 싸늘한
계곡 물소리(溪聲)가 밟히는(踏) 모습이 눈에 보입니다. 물소리를 밟는다는 표현은 오늘
날의 시인들도 즐겨 사용하는 세련된 표현입니다.

 

          屋頭初日金鷄唱  아침 해 맞이하는 지붕 위 수탉 소리
          恰似垂楊裊裊長  실버들처럼 하늘하늘 간드러지게 길도다

 

  고려의 익재(益齋) 이 제현(李 齊賢)이 충선왕과 중국에 머물 때, 충선왕이 지은 시(詩)
의 전거(典據)로 내놓은 우리 옛시의 구절입니다. 위와는 좀 달리 직유법(直喩法)의 한
예(例)입니다. 하루의 시작을 알리는 수탉의 울음소리가 길게 이어지며 사그러드는 것을,
늘어져 하늘거리는 수양버들 가지에 비유하였습니다. 청각과 시각의 어우러짐이 시를 읽
는 이들에게 쉽사리 마음 속으로 시(詩)가 전(傳)하려는 풍경을 그릴 수 있도록 도와줍
니다.   

 

  이 이외에도 얼마든지 이러한 예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니, 선조들의 시 작품들이 쌓여
전해오고 있는 우리의 긴 역사가 든든하게 느껴지고, 이렇듯 글자로 전해지는 우리의 문
화가 매우 기껍게 느껴지는 순간입니다. (2009. 12.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