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빛 노을 서편 하늘 물들이고
은빛 강물 쉼 없이 너울가네
검던 머리 어느새 희어지고
많던 머리 숱만 헤아리나
이번 강화도에서 열린 우리 시벗들의 시 모임에서 한 분이 우리말 시
한 편을 올렸는데, 평범한 듯한 이 시에 자꾸 눈길이 가는 것은 나만이
아니었던 듯, 한 시우는 나에게 이 시를 멋진 한시로 번역해봄이 어떻겠
느냐고 은근히 명령(?)같은 권유를 했다. 다 끝나고 집으로 돌아와서도
나 역시 자꾸 그 시가 생각나서 한역(漢譯)을 시도하였다.
이 시는 마침 4구(句)로 구성되어 있고, 아름다운 자연 묘사(境)와
덧없는 세월을 느끼는 감정(情), 즉 경(境)과 정(情)이 차례로 잘 버무
려져 있어서 얼핏 한시로 바꾸면 좋겠다는 생각을 처음부터 하긴 했었
다. 그러나 3구와 4구에 머리카락을 소재로 하는 내용이 겹쳐져 있어
서, 4구를 다른 이미지로 바꾸면 좋겠다는 생각에, 때가 때인지라 4구
에 ‘가을바람(秋風)’을 넣어보자 하여
西天霞染赤 서천하염적 서쪽 하늘 노을에 붉게 물들고
點點灩銀江 점점염은강 은빛 강물 점점이 반짝이누나
綠髮於焉白 녹발어언백 검던 머리 어느새 희게 변하고
秋風忽到窓 추풍홀도창 가을바람 홀연히 창가에 부네
라고 지어 보았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자연은 변함없건만 세월은 빨
리 흐르고 사람은 덧없이 늙는다”는 내용을, 이 시에서 화자(話者)는 비
교적 덤덤하게 절제하며 언급하지만, 그 절제 뒤에 숨어 있는 보이지 않
는 한탄(恨歎)을, 나이든 사람이라면 누구나 느끼지 않을 수 없을 것이
다. 이러한 ‘절제 있는 한탄’이 이 시의 매력이다.
그리고, 1구에는 서쪽하늘의 붉은 색, 2구에는 날빛을 반사하며 점점
이 잔잔하게 흔들리는 은색, 3구에는 검은 머리를 나타내는 녹색(한시에
서는 젊은이의 검은 머리를 흑발이라고 하지 않고 흔히 녹발이라고 함)
과 백발의 백색이 들어가 있어서, 이 시를 읽으면 마치 한 폭의 그림을
보는 듯한 느낌을 느낄 수 있다. 이러한 색감(色感)이 이 시의 또 다른
매력이다.
그런데 이 시의 오리지널 한글시를 쓴 분은, 본업은 의사인데도 색소폰
연주는 전공을 한 듯 전문가 수준이고, 그림을 잘 그려서, 중남미 여행 후
펴낸 그림 여행 책인 <중남미 감성여행>은 교보문고의 주간 베스트셀러
에 올랐다. 이렇듯 그림을 잘 그리는 분인지라 본인이 의식했든 아니든
간에 시 속에 색감이 풍부하게 깃든 것이다.
이 분이 이 한역시를 보더니 아무래도 이치(理致)상으로 2구의 은빛 강
을 금빛 강으로 해야 맞을 것 같다는 의견을 주셨다. 유레카! 안 그래도 그
부분을 생각하고 있던 나는 기쁜 마음으로 2구의 ‘은강(銀江)’을 노을이 비
쳐 잔잔히 부서지며 반짝이는 ‘금강(金江)’으로 바꾸기로 했다.
또 한 가지, 1구에 나온 저녁노을이 마치 하나의 복선(伏線)처럼 나중에
나오는 ‘늙음’을 암시하고 있고, 4구에 나오는 추풍(秋風)도 1년의 가을 무
렵으로 인생의 노년과도 느낌이 통하는 것인데,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이렇
게 엄습한 ‘늙음’이라는 것이 참으로 갑작스럽게 느껴지는 것이니, 4구의
끝 석자 ‘홀도창’(忽到窓, 홀연히 창가에 부네)을 좀 더 갑작스러운 느낌이
드는 홀타창(忽打窓, 홀연히 창을 때리네)으로 고쳐서,
歲月 세월
西天霞染赤 서천하염적 서쪽 하늘 노을에 붉게 물들고
點點灩金江 점점염금강 금빛 강물 점점이 반짝이는데
綠髮於焉白 녹발어언백 검던 머리 어느새 희게 변하고
秋風忽打窓 추풍홀타창 가을바람 홀연히 창을 때리네
** 染...물들일 염, 灩...물결 일렁일 염
라고 바꾸었다. 써놓고 한참 보다가 한 글자를 바꾸고, 또 다시 생각하다가
한 글자를 바꾸고, 이렇게 할 수 있다는 점이 한시(漢詩)만이 가지고 있는
고유한 매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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