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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시(漢詩)의 맛과 멋

무지개 (虹霓, 홍예)

일년이면 한두 번은 만나서

반가운 얼굴을 보는 모임이 있다.

 

어찌 하다보니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모두가 아직도 열심히 일하고 있는

현직 의사들이다.

 

대학병원 소아과에 근무하며 일찌기

일본 사케 소믈리에 자격증을 소유한

수필가이기도 한 P교수,

 

강북지역에서 산부인과를 열어

오랫동안 지역의 명망을 받아온 K원장,

 

흉부외과 전문의로서

다년간의 해외근무와

근래의 코로나 퇴치에도 공이 큰 H박사,

 

그리고 나.

 

대학병원 정신과 교수로 정년을 마치고

지방의 한 정신병원장으로 근무하고 있는

K원장은 사정이 있어서 빠지고.

 

 

사케 소믈리에가 있으니 당연히 만남은

일본식 야끼도리(燒鳥)집에서 였다.

 

의사(醫師)라는 점 외의 공통점은

모두 시()와 술()을 좋아한다는 점이랄까.

 

(사케)과 안주가 등장하자

 

일본통인 P교수의 물흐르는 듯한

해박한 설명에 모두가 끄덕끄덕

 

모르고 먹는 것과

알고 먹는 것의 차이가 참으로 크도다!

 

K원장은 육사(陸史)의 시 <청포도(靑葡萄)>

워즈워스의 시 <레인보우>를 읊는다.

The child is a father of the man…

 

H박사는 송()나라 구양수(歐陽脩)

한시(漢詩)를 지긋이 읊는다.

 

酒逢知己千杯少     주봉지기천배소

話不投機半句多     화불투기반구다

 

술을 들고 지기를 만나면 천 잔도 적고

말이 때와 맞지 않으면 반 구절도 많도다.

 

분위기는 절정에 이른다.

 

H박사가 옆에서 나를 찌르기에

생각나는 것이 없어

 

사랑은 바빠서 뒤로 미룬 채

 오늘은 그저 사는 일에만 몰두하는 건

 바보들의 지혜

 

이 나이에 사랑 운운이란

어째 좀 부끄럽기도 하지만

 

자다가 깨도 입에서 줄줄 나올

고등학교 때 외웠던 팝송 가사 한 구절도

그저 이럴 땐 땜빵으로 쓸만하다.

 

그날의 이야기는 결국

23일 일본 사케 여행

한 번 하자고 하면서 끝이 났고

 

다음날 저녁 톡방에 올라온

그날의 사진들을 보고

H박사가 다음과 같은 글을 올렸다.

 

창밖을 보니 비는 그치고

 어제 만남의 여흥 아직 남아

 즐거웠던 순간들 마음속에 그려보네.

 마침 뜻하지 않은 사진을 보내주니

 그대와 나 江 하나 사이에 두고

 멀리서 지금 같은 생각 하고 있었구료…”

 

나는 갑자기 마음이 뭉클하여

H박사의 글을

한 수()의 절구(絶句)로 바꾸어 본다.

 

  逢友別後                 봉우별후

 

東天麗架雨餘虹     동천여가우여홍

昨會情談憶小窓     작회정담억소창

方對寫眞君送付     방대사진군송부

爾余同夢隔長江     이여동몽격장강

 

벗과 만나 헤어진 후

 

비 그친 동쪽 하늘 무지개가 예쁘고

작은 창가에서 어제 모임 돌이켜보네

지금 막 그대가 보낸 사진들을 보니

우리 둘 강 사이에 두고 같은 생각을 했구료

 

麗고울 려, 架시렁 가, 걸릴 가,

雨餘우여...비온 후, 昨어제 작,

會모일 회, 方바야흐로 방, 이제 막,

爾余이여...너와 나를 친밀하게 부르는 말

                                    (2023.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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