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을 먹고 나서 설겆이를 하는 집사람의 그릇 달그락거리는 소리도
잦아지고, 어느새 사위가 고요한 밤 시간이 되었습니다. 기분 좋은 졸음이
찾아 오고 편안한 휴식이 어서 잠자리에 들라고 나를 기다리는 시간....
잠들기 전에 짤막한 옛 한시 한 수 감상하면 어떨까 해서 책을 펼쳤습니다.
조선 선조 때의 추앙 받던 유학자요 시인인 송익필 선생의 '山行'입니다.
山行忘坐坐忘行(산행망좌좌망행)
歇馬松陰廳水聲(헐마송음청수성)
後我幾人先我去(후아기인선아거)
各歸其止又何爭(각귀기지우하쟁)
산길을 가면 앉아 쉬기를 잊고, 앉아 쉬면 가기를 잊는다.
소나무 그늘에 말을 쉬게하고 계곡 물 소리를 듣는다.
내 뒤에서 오는 사람 중에 몇 사람이 내 앞을 질러 갈까?
모두 각자가 자기 쉴 곳에 가서 쉬니 또 어찌 가기를 다투리요.
직역을 하면 대충 위와 같은 뜻이 되겠으나 보기 좋게 다듬어 싯적으로
멋있게 번역을 해 본다면
가다간 앉기를 잊고
앉았단 가기를 잊는 산길..
솔 그늘에 말 쉬이고
물소리를 듣나니...
내 뒤의 몇 사람이
내 앞을 질러 가리,
저마다 멈출 데 멈추리니
또 무엇을 다투리야?
우리가 흔히 겪는 일입니다. 등산을 할 때 어차피 가야하는 힘든 길을
쉬면 늦어진다는 생각에서 꾸욱 참고서 열심히 가다가, 힘들어서 쉬어볼까
하여 한 번 앉으면 너무 편해서 일어나기 싫어 지지요. 그러나 계속 쉬다보면,
뒤에서 오던 사람들이 마구 앞질러 가니...이크 안되겠다 나도 서둘러야지..
나만 뒤떨어지겠는 걸...하고서 벌떡 일어나 서둘러 다시 앞질러 간 사람들을
쫓아 가는 광경..
이러한 일은 누구나 경험해 보았던 일일 것입니다. 단순한 山行의 묘사
이지만, 山行을 인생으로 놓고 보자면 하나의 인생관이 보입니다.
IMF를 겪으며 직장을 잃고 쉬는 사람들..
어느 정도의 쉬는 기간을 거쳐 다시 직장을 잡고 재기하기도 하지만,
막상 쉬는 기간 동안에는 초조하기도 하고 자괴감(自愧感)이 들기도 하고
때로는 약해진 마음에 그냥 쓰러지거나 심지어는 폐인이 되는 수도 있을 수
있지요.
비단 IMF 후의 직장인 뿐 아니라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는 일입니다. 남녀노소 누구에게나, 이 땅 위에 발붙이고 같은 공기를
호흡하는 모든 이에게 올 수 있는 일입니다.
어려운 일이 닥쳐도 자포자기하거나 너무 초조하여 지쳐 쓰러지는 일 없이,
자신을 지키고 다시 준비하여 새로이 일어서는 용기가 필요하겠습니다.
사백 수십 년 전의 한 시인의 시를 읽고, 오늘을 사는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가볍지 않은 교훈입니다. (2001. 12.26)
'한시(漢詩)의 맛과 멋' 카테고리의 다른 글
퇴근 길의 오독(誤讀) (0) | 2006.06.02 |
---|---|
대칭의 미학 (0) | 2006.06.02 |
시인 가도(賈島) (0) | 2006.06.02 |
시를 짓는 마음 (0) | 2006.06.02 |
비오다 개이다... (0) | 2006.05.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