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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시(漢詩)의 맛과 멋

오동잎에 내리는 비

   아내에 관한 시를 한 편 읽어 볼까요? 오랜 세월 서로 익숙해진 탓에

그 존재의 고마움을 잊기 쉬운 사람이 바로 아내가 아닐까요?

  조선 인조 때의 문신 이서우(李瑞雨)가 지은 <죽은 아내를 애도함>
이라는 시입니다. 

                玉貌依稀看忽無 (옥모의희간홀무)
                覺來燈影十分孤 (각래등영십분고)
                早知秋雨驚人夢 (조지추우경인몽)
                不向窓前種碧梧 (불향창전종벽오)

                예쁜 모습 어렴풋이 사라져 버리고
                깨어보니 등잔불만 가물가물 외롭네
                오동잎 가을 빗소리 꿈 깨울 줄 알았다면
                창가에 벽오동 나무 아예 심지 말 것을

  아내를 잃고 홀로 되어 외로운 시인이 긴 가을밤에 사랑에 홀로 앉
아 책을 읽다가 얼핏 잠이 들었나 봅니다. 그렇게도 그립던 아내가 생
전의 고운 모습으로 나타났습니다. 너무 반가워 무슨 말을 할까 하는데
이상하게도 모습은 희미해지더니 사라져 버리고 얼핏 깨어보니...꿈이
었구나! 

  등잔불만 외롭게 가물거리고, 밖에는 가을비가 내리고 있습니다. 잠
을 깨운 것은 다름 아닌 넓은 오동잎에 떨어지는 빗소리였습니다. 

   저 가을비를 맞으며 또 떠나갈 아내를 생각하니...빗소리가 원망스럽
습니다. 꿈속에서나마 반가운 재회를 하는구나 했는데 무참히 꿈을 깨
운 저 빗소리. 오동잎에 떨어지는 저 요란(?)한 가을 빗소리...이럴 줄
알았으면 창 밖에 저 벽오동을 심지 말 것을....

  죽은 아내를 그리워하는 마음이 너무도 애절히 잘 나타나 있는 시입
니다. 아내 그리운 마음에 죄 없는 오동나무를 원망하는 것을 보면 생
전에도 사이가 각별했던 부부였음에 틀림없을 것 같군요. 한시를 읽으
며 항상 느끼는 점은 예나 지금이나 사람 사는 정(情)은 조금도 다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최근 이삼십 년 간의 문명의 발달은 너무도 놀라운 것이어서 인간의
생활에 상상할 수 없는 변화를 가져온 바, 이러한 문명의 발달이 혹시
우리의 자손들을 우리와는 다른 사고(思考)를 하는 신종 인간으로 변화
시키지는 않을까 하는 우려를 해 본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한편 생각해 보면, 수백 년 전의 시인의 마음이 우리와 꼭 같
다는 점에서, 태어나고 가정을 이루고 사랑을 먹고 살아가는 인간성(人
間性)에 대한 신뢰가 마음 속에 든든하게 자리잡는 것을 또한 느낍니다.
그래서 또한 우리는 언제라도 시(詩)를 저버릴 수 없는 것이 아닌가 하
는 생각도 해 봅니다. 

  소재는 참으로 서정적인데 얘기가 너무 딱딱하게 흐른 것 같습니다...
컴퓨터에 짝을 빼앗긴 아내가 거실에서 텔레비젼을 보고 있는 줄 알았더
니 소파에 누워 살짝 잠이 들어 있습니다. 잠든 모습을 보니.. 늘 제 곁
을 지켜주는 아내에게 고마운 마음이 솟아, 아직도 보들보들한 그 뺨에

살짝 입술을 대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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