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여름이 지나고 가을 분위기가 짙어가는데, 무언가 마음 속에 허전함
이 있었습니다. 초여름에 시 한 편을 지어낸 후로 여러 달이 지나도록 아
무 소산(所産)도 없이 허송세월을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억지로 쓰려면 정말로 써지지가 않고,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것이 있어야
한 줄 두 줄 진도가 나가면서 쓰고 고치고 살을 붙이고 하여 완성을 하게
되는 것인데, 마음이 메말라 버린 것인지.. 공부가 게을렀던 것인지.. 능력
도 없으면서 책 몇 권 읽은 것으로 근근이 흉내나 내다가 드디어 바닥이 드
러난 것인지...... 별별 서글픈 생각이 다 들었습니다.
가을은 우수(憂愁)의 계절, 시심(詩心)이 동(動)하기 쉬운 때인데, 계절이
바뀌었다고 새로 지어서 올리는 다른 사람들의 시를 읽으면서 그동안 마음
이 좀 우울(?)했던 것도 사실입니다.
그런데 오늘, 꿈속에서 시를 지으며 ‘인편서이거(人便西易去)’라는 구절을
읊다가 문득 잠에서 깨어난 것입니다. 깨어보니 이른 새벽이었는데, 그 구절
을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 누운 채로 확연히 곱씹고 나서, 부시시 일어나 메모
를 해놓고는.. 다시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그러나 잠은 더 오지 않고 자꾸 그 싯귀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한시 책
을 읽다보면, 옛 사람들이 꿈속에서 싯귀를 얻는 경우가 심심치 않게 나오는
데, 정말 그랬을까 하고 평소에 다소 의아해하던 제가 스스로 꿈속에서 시를
읊은 일이 흥미로웠습니다.
‘인편서이거(人便西易去)’라..... 사람이 편히 서쪽으로 쉽게 간다니... 무슨
뜻일까.... 생각해보다가, 시간이 빨리 흐른다는 뜻으로 ‘日速西易去 일속서
이거’ 로 고쳤다가 다시 ‘日速西峯去 해는 재빨리 서산으로 넘어 가고’ 로 고
치고, 그 이미지에 따라 대구(對句)로 ‘月遲東塢來 월지동오래’ 즉 ‘달은 더
디게 동산에 떠오르네’ 로 렴(簾)을 맞추어 짓고 난 후, 가을-전원-기다림의
내용으로 살을 붙여 한나절에 5언 율시 한 편을 완성했습니다.
村家秋暮 시골집의 가을 저녁
雲 片 遙 巓 掛 조각 구름 먼 산마루에 걸리고
夕 陽 滿 照 苔 저녁 빛은 이끼에 가득 비치네
孤 禽 曾 樹 發 외로운 새 일찌기 울던 나무 떠나고
晩 菊 尙 籬 開 늦은 국화 여전히 울 밑에 피어 있는데
日 速 西 峯 去 해는 이미 서산을 넘어 가고
月 遲 東 塢 來 달은 동산에 더디게 오를 제
待 人 終 不 見 기다리는 이는 끝내 오지 않고
單 坐 幾 傾 杯 홀로 앉아 몇 잔이나 마시나
여러 달 동안 억지로 쓰려고 하였으나 안되던 것을, 꿈에서 본 싯귀를 따
라 한 순간에 졸작이나마 만들어 놓고 보니, 꿈에서 싯귀를 얻었다는 옛 사
람들의 말이 과연 허언(虛言)이 아닌 것을 알고 매우 신기했습니다.
시적(詩的) 화자(話者)가 제 자신은 아니라서, 실제로 전원 촌가에 살지도
않으면서 이런 시를 썼느냐고 탓하실 분도 계시리라 생각되기에, 늘 품고 있
던 전원 생활에의 향수가 다시금 솟아 오릅니다... 떠나야지... 떠나야지......
(2008. 10.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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