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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시(漢詩)의 맛과 멋

숨어 살기

 

 

 

 

  옛 문헌을 보면 문인(文人)들이 본 이름보다도 오히려 호(號)를 더 즐겨 사용하고 있음

을 알 수 있다. 호는 스스로 짓거나 혹은 타인이 지어주기도 하는데, 그 사람이 거처하는

지명(地名)에서 따오거나, 그 사람이 인생에서 지향(志向)하는 바 혹은 그 사람이 좋아하

고 아끼는 사물을 반영하여 짓는 것이 보통이다.

 

  호(號)를 짓는 일에도 시대에 따라 어떤 유행(流行) 이 있을 수 있는데, 흔한 것을 살펴

보면 ~은(隱) ~재(齋) ~당(堂) ~암(菴) ~옹(翁) ~정(亭) ~곡(谷) ~계(溪) ~봉(峰) ~암

(巖) ~주(洲) 등이 많고, 특히 숨을 은(隱)자를 뒤에 붙이는 유행은 다른 글자에 비해 가

히 압도적이라 할 만하다.

 

  물욕(物慾)을 멀리하여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초야(草野)에 묻혀서 자연과 벗하는 유유

자적(悠悠自適)한 삶에 높은 가치를 부여했던 옛 사람들이었으니, 세상이 태평할 때는 물

론이요, 난세(亂世)에 처해서는 더욱 더 호(號)를 짓는데 이 은(隱)자가 인기가 있었음은

당연한 일이다.

 

  목은(牧隱), 초은(樵隱), 포은(圃隱), 도은(陶隱), 농은(農隱), 야은(冶隱 혹은 野隱),

교은(郊隱), 어은(漁隱), 고은(皐隱), 경은(耕隱), 수은(睡隱), 주은(酒隱), 시은(市隱)...

 

  이렇게 산으로 들로 교외로 언덕으로 바닷가로 숨어서 밭 갈고 농사짓고 나무하고 고기

잡으며 살고 싶었던 마음들이 호(號)에 반영된 것이다. 숨는다는 일은 이처럼 오랜 세월을

두고 인간사의 한 테마가 되어왔다. 요즘도 세파에 지친 몸을 쉬려고 아무도 모르는 곳에

숨어서 만사를 잊고 재충전을 하는 이들이 적지 않은 것을 보면, 숨는다는 일은 과연 어머

니의 품속으로 돌아가고픈 우리 인간들의 본성이 아닐까.

 

         春風好去無留意      봄바람아 잘 가거라! 붙들 뜻이 없구나

         久在人間學是非      인간 세상 오래 머물면 시비나 배우리

 

  고려 조 운흘(趙 云仡)이라는 분이 노래한대로, 세상은 시비(是非)가 횡행(橫行)하여 늘

서로 헐뜯고 다투기만 하는 곳. 이런 곳에서 어울려 살기 위해서 소신을 버리고 불의(不義)

와 타협해야 하는 일이 얼마나 많을 것인가. 이런 일로부터의 오염을 피하기 위한 깨끗한

방법이 떠나는 일이며 숨는 일이다. 숨음으로써 자신다움을 지켜나갈 수 있다고 믿었던 것

이다.

 

  임금이 여러 차례 등용하려 하였으나 끝내 거부하고 향리에서 학문 연구와 후진 양성에

몰두한 조선의 남명(南冥) 조 식(曺 植) 선생이나, 멀리는 요(堯)임금의 양위(讓位)를 받지

않고 더러운 말을 들었다며 영수(潁水)에 귀를 씻었다는 허 유(許 由) 같은 분들이 진정한

은사(隱士)의 표본이라 할만하다.

 

  그러나 숨는다는 일이 그리 쉬운 것은 아니다. 몸만 시골 한적한 곳으로 들어갔다고 숨는

것이 아니고, 진심으로 마음을 비워야하는 것이니 그것이 어찌 그리 쉬울 수 있겠는가.

 

  진(晉)나라 때 시인 왕 강거(王 康)는

 

         小隱隱陵藪      소은은 숲 속에 숨지만

         大隱隱朝市      대은은 조정이나 저잣거리에 숨나니

 

라고 읊었고, 당(唐) 시인 백거이(白居易)는 그의 시(詩) <중은(中隱)>에서

 

         大隱住朝市      대은은 조정이나 저잣거리에 머물고

         小隱入丘樊      소은은 숲 속으로 들어가네.

 

라고 읊었다. 이 시인들이 말하는 소은(小隱)은 실제로 궁벽한 곳으로 숨는 이를 뜻하며,

중은(中隱)은 한가로이 벼슬하면서 몸을 숨기는 이 즉 벼슬살이와 은일(隱逸)을 조화시킨

삶을 사는 이를 뜻하고, 대은(大隱)은 조정(朝)과 저잣거리(市)에 있으면서도 뜻은 아주

고상한 데에 있는 사람을 뜻한다.

 

  그러나 조정에서 벼슬을 하며 저잣거리에서 부대끼고 살면서 은일(隱逸)을 운운하기는

어려울 것이니, 대은이니 중은이니 하는 것은 벼슬을 하면서도 사사로운 욕심이 없이 큰

뜻을 가지고 정사(政事)을 운영하는 사람으로 보면 된다. 저잣거리에 숨는다는 뜻도, 남

에게 드러내지 않는 자신의 세계를 간직하고 있다는 뜻으로 보면 된다.

 

  나이 70에 미늘(鉤)이 없는 낚시 바늘을 위수(渭水)에 드리우고 권력자를 기다린 강태

공(姜太公)은 강물을 바라보면서도 마음속에는 천하를 경영할 계책의 손익을 따지고 있

었을 테니, 그를 대은(大隱)의 시조쯤으로 치부해도 될 것 같다. 오늘 날에는 이러한 대

은이나 중은도 찾아보기가 참으로 어렵게 된 것 같다. 높은 벼슬을 하는 이들 중에 자신

이 속한 집단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국가(國家)의 대의(大義)도 눈에 보이지 않는 사람들

이 적지 않으니 참 딱한 일이다.

 

  머지않아 정권(政權)이 바뀔 것이니 미리 적당(?)한 시기에 낙향(落鄕)을 하여 은사(隱

士)가 되는 사람도 있다. 이들의 마음이 새롭게 등용(登用)을 명(命)하는 권부(權府)의 연

락에만 촉각을 세우고 있다면, 이런 사람들이야말로 사이비(似而非 )은사(隱士)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고려 이 규보(李 奎報)가 쓴 <요화백로(蓼花白鷺)> 라는 시를 읽어 보자.

 

        前灘富魚蝦      앞 여울에 고기와 새우가 많아

        有意劈波入      출출해 물 가르고 들어가다가

 

        見人忽驚起      사람 보자 기겁해 펄쩍 날아서

        蓼岸還飛集      여뀌꽃 언덕으로 되돌아 가네

 

        翹頸待人歸      목 늘이고 사람 가기를 기다리자니

        細雨毛衣濕      가랑비에 깃털 옷은 젖어 가고

 

        心猶在灘魚      마음은 여울 고기 생각뿐인데

        人道忘機立      사람들은 말하네 세상 시름 잊고 서 있다고!

 

  요즈음은 도시의 하천에서도 해오라기를 자주 만날 수 있게 되었다. 순백(純白)의 깃털

옷을 입고 흐르는 물에 미동도 없이 서있는 해오라기는 참으로 정결(淨潔)하고 고고(高孤)

해 보인다. 그러나 겉모습과는 달리 머릿속에는 늘 먹이 생각뿐이라는 속성(屬性)이 사이

비 은사들의 그것과 너무도 닮아 있다.

 

  보통의 사이비 은사는 자신의 그러한 은일생활(隱逸生活)의 한 자락을 슬쩍 언론에 흘리

기도 하지만, 고수들은 그것조차도 하지 않고 현자(賢者)를 찾는 권력자(權力者)들의 눈을

현혹하고 있으니, 앞으로는 은사감별사(隱士鑑別師)라는 직업도 생겨나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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