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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시(漢詩)의 맛과 멋

신묘년 이야기

   토끼의 해 신묘년이 밝았다. 토끼는 얌전하면서도 행동이 민첩하고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동물이다.

토끼의 해를 맞이하여 우리나라도 우리 국민들도 모두 사뿐한 도약(跳躍)의 지혜를 간직할 수 있기를 바

라마지 않는다. 토끼의 해는 12년마다 돌아오지만 그중에서도 신묘년(辛卯年)은 간지(干支)로 표현한 다

른 모든 해와 마찬가지로 60년마다 돌아오게 된다.

 

 

   시간의 흐름을 거슬러 올라가 보자. 지금부터 60년 전인 1951년 신묘년에는 한국전쟁이 한창 진행되던

가운데 휴전협정이 진행되고 있었고, 또 다시 60년 전인 1891년 신묘년에는 고종황제가 청나라의 간섭을

견제하고자 내탕금(內帑金)으로 건물을 구입하여 미국 대사관을 설치하였다. 다시 60년을 두 번 거슬러

올라간 1771년 신묘년에는 영조대왕이 나라에서 정한 금서(禁書)를 가지고 있거나 유통시킨 수백 명을

잡아들여 벌한 사건이 있었다.

 

 

   이런 식으로 거슬러 올라가며, 지금으로부터 과거로 27번째의 신묘년인 서기 391년으로 돌아가 보면...

때는 삼국시대 초기, 고구려에서는 그 유명한 광개토대왕이 즉위한 해이다.

 

 

   광개토대왕은 17세에 왕이 되면서부터 무용(武勇)을 떨치기 시작하여, 위로는 고조선의 옛 땅인 요동

(遼東)지방을 되찾고, 동북으로는 숙신(肅愼)을 정복했으며 남으로는, 왜(倭)와 연합하여 황해도 지방을

침공하는 백제를 정벌하는 등 우리 역사상 제일 넓은 강토(疆土)를 차지한 영웅중의 영웅이다.

 

 

   아깝게도 38세로 요절한 광개토대왕의 뒤를 이어 등극한 그의 아들 장수왕(長壽王) 역시 한성 백제를

쳐서 개로왕을 죽이고 백제를 웅진(지금의 공주)으로 내려쫓은 전쟁왕이었다. 이 장수왕이 즉위 2년 후

인 서기 414년에, 현재의 중국 길림성(吉林省) 집안현(輯安縣)의 통구(通溝鎭)인 당시의 고구려 수도 국

내성(國內城)에 부왕인 광개토대왕의 업적을 기리기 위하여 높이 6.39m의 거대한 돌비석을 세웠다. 우리

는 이것을 광개토대왕비라고 부른다.

 

   고구려의 건국 신화와 광개토대왕의 업적이 1,775 자의 예술적인 한자로 음각(陰刻)되어 있는 이 비석

은 동아시아의 고대 역사 연구에 매우 중요한 고고학적 유물이다. 우리의 역사가 새겨져 있는 우리의 비

석이니 우리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중요한 보물이지만, 현재 남의 나라 땅이 된 곳에 서 있다는 점이 너무

도 아쉬운 것이다.

 

 

   이 비석에는 광개토대왕이 치른 여러 정복전쟁의 명분과 진행 그리고 그 결과들이 자세히 적혀 있다.

그중의 하나, 서기 396년(병신년)에 광개토대왕이 몸소 수군을 이끌고 백제를 정벌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 구절의 바로 위에 이 전쟁의 명분을 설명하는 구절이 있다. 살펴보면,

 

 

          百殘新羅  舊是屬民  由來朝貢  而以辛卯年來  渡海破百殘□□□羅  以爲臣民

          백잔신라  구시속민  유래조공  이왜이신묘년래  도해파백잔□□□라  이위신민

 

 

   이를 해석해보면, “백제와 신라는 예로부터 고구려의 속민으로서 조공을 해왔는데, 신묘년(391년) 이후

왜(倭)가 바다를 건너와 백제, □□, □라 를 쳐서 신민으로 삼았다”이다. 그래서 광개토대왕은 5년 후인 서

기 396년에 몸소 수군을 이끌고 백제를 쳤다는 것으로, 비문의 내용이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제부터 문제점을 말씀드리겠다. 위의 밑줄 친 글자는 비문의 마모가 심하여 처음 발견되었을

때부터 무슨 글자인지 쉽게 알기가 어려웠다. 특히 渡海破(도해파) 세 글자는 처음부터 마모가 심하여 ‘도

해파’ 로 읽을 수 없다고 말하여도 틀린 말이 아니다. 그중에 특히 海 자는 무슨 이유로 해자라고 읽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을 정도이다.

 

 

   오늘날의 눈으로 보아도 매우 독특하고 훌륭한 비문의 글씨체는 세계적으로도 그 예술성을 인정받고

있는 바인데, 1,775자의 다른 글자들은 모두 다 잘 새겨 놓고, 유독 이 渡海破 세 글자(특히 海자)는 괴상

하리만치 줄도 많이 틀리고 모양도 졸작중의 졸작으로 새겨져 있으니, 아마도 당대 제일이었을 석공이

왕명을 받아 새긴 솜씨로는 도저히 보아줄 수가 없다. 왜 이런 일이 생긴 것일까?

 

 

   비문의 글자들을 최초로 발견하고 해석하여 세상에 내어 놓은 이들은 다름 아닌 일본인들이었다.

1888년 일본의 제국주의 침략의 본산인 육군 참모본부 요원들이 바로 그들이다. 그들은 5cm 두께의 덩

굴에 싸여 있던 비석을 발견하여 덩굴을 태워 나타난 글자를 판독하였다고 하면서, 소위 신묘년 기사

(위에 말한 비문 내용을 신묘년 기사라고 부른다)를 세상에 내어 놓은 것이고, 그로부터 지금까지 모든

학자들이 그 내용을 두고 왈가왈부하고 있는 것이다.

 

 

   더구나 당시 일본인들의 첫 탁본은 제대로 된 탁본도 아니고, 비석에 종이를 대고 글자의 윤곽을 그린

후 글자 여백에 먹을 칠한 소위 쌍구가묵본(雙鉤加墨本)을 가지고 위와 같은 주장을 한 것이고, 그 이후

로 현재에 이르기까지 광개토대왕 비문의 내용에 대한 모든 논의는 모두 이 믿지 못할 쌍구가묵본으로

부터 비롯되어 내려온 것이라고 말 할 수 있다.

 

 

   서기 391년 당시의 동아시아 상황을 보면, 일본은 ‘바다를 건너와 백제 신라등을 정벌하여 신민으로

삼을’ 만한 통일국가가 전혀 아니고, 야마토 지방의 왜(倭)를 위시한 여러 개의 소국으로 나뉘어 있었고

(수서<隋書>), 따라서 한반도 삼국에 비하면 국력도 미미했으니, 광개토대왕비의 신묘년 기사가 일본

제국주의자들에 의해 변조되었다는 학설이 나오게 된 것도 설득력이 있는 것이다.

 

 

   광개토대왕 시기의 한반도에서는 고구려와 백제 두 강국 사이에 끊임없는 전쟁이 이루어졌으며, 초기

고대국가의 형태로 일본의 나라 교토 지방에 형성된 왜(倭)국은 고구려-신라 동맹에 대항하여 백제-가야

-왜 로 이어지는 정치 경제 동맹의 끝줄을 잡고 한반도의 선진 문화를 흡수하기 시작하던 때였다.

 

 

   이러한 내용들은, 한중일 3국의 역사서들 뿐 아니라, 한반도와 일본에서 출토되는 고고학적인 증거품

들에 의해서 학계의 인정을 받고 있는 이야기이므로, 광개토대왕 비문의 소위 신묘년 기사인 (391년) “신

묘년에 왜국이 바다를 건너와 백제와 신라를 파(破)하고 신민으로 만들었다”는 해석은 매우 신빙성이 희

박한 이야기인 것이다.

 

 

   왕건군(王健群)이라는 중국인 학자는 1984년에 비문을 조사한 후, 위의 신묘년 기사의 글자를 그대로

인정하면서, 누군가가 석회를 발라 비문을 변조했을 가능성은 부정하였으나, 기존의 다른 여러 글자들이

전혀 엉뚱한 글자로 판독되고 있었다고 하였다.

 

 

   만약 이 비석이 우리나라에 있어서, 과학적인 방법을 총동원하여 의혹이 있는 부분들을 언제나 마음대

로 조사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이런 탄식이나 하고 있을 정도로 우리가 한가하지는 않다. 우

리도 전에 없는 열정으로 비문 연구에 매진하여 진실을 밝히려 노력할 수밖에 없다.

 

 

   모순점들을 규명하고 진실을 밝히려는 노력은 두 가지 방면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첫째는 변조설을 포

함하여 비문의 글자들을 올바르게 판독하려는 노력이다. 국내 학자들에 대한 적극적인 연구 지원도 필요

하고, 중국과의 외교와 학술교류에 정성을 기울여 실물을 자세히 연구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어야

한다.

 

 

   둘째로는 당시의 일을 기록한 한중일 삼국의 역사서와 그 당시 상황을 비교 분석하는 방향이다. 서기

391년 신묘년에는 과연 어떤 일들이 있었을까?

 

 

   삼국사기(三國史記) 백제본기를 보자. 서기 387년 백제 침류왕이 죽자 그의 동생인 진사(辰斯)는 태자

(아화, 아신)가 어리다는 이유로 왕위를 빼앗았다. 그러나 광개토대왕의 공격에도 대응하지 못하고 구원

행궁(狗原行宮)으로 사냥을 나가 10일이 넘도록 돌아오지 않다가 그곳에서 급서(急逝)하고 말았다. 급서

의 원인은 밝히지 않았다.

 

 

   이에 대응하는 일본서기 응신3년(393년)조의 기사를 보면, “백제의 진사왕이 일본에 대해 실례를 범하

였다. 그래서 기각숙니(紀角宿禰), 우전시대숙니(羽田矢代宿禰), 석천숙니(石川宿禰), 목토숙니(木菟宿

禰) 등을 파견하여 그 예(禮)가 없는 상황을 힐책하였다. 그로 인하여 백제국은 진사왕을 죽이고 사죄하

였다. 기각숙니등은 태자였던 아화(阿花)를 아신왕(阿莘王)으로 세우고 돌아왔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응신천황은 웅진백제에서 큐우슈우를 거쳐 일본의 기내(畿內)지방에 대화왜(大和倭) 조정을 세운 백

제의 왕족이고, 위의 ~숙니 돌림자의 인물들 역시 한반도에서 건너간 백제의 왕족의 후손으로서 당시 왜

왕조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던 사람들이니, 당시 왜(倭)의 조정(朝廷)을 이루고 있던 백제의 왕족들

에게 한반도 백제에서 삼촌(진사왕)이 태자(아신)를 폐하고 왕위를 빼앗은 사건은 다름 아닌 자신들의 집

안 일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신묘년(서기 391년) 이래로 백제 출신 왕족들로 구성된 항의사절단과 보호 병력을 본국

에 보내 끊임없이 왕실의 적통(嫡統)을 바로 잡으려고 노력하지 않았겠는가. 다시 말하자면, 백제 왕실에

왕위 찬탈 사건이 일어나고 이어서 일본의 친척들이 와서 현왕(現王)을 폐하고(죽게 하고) 폐세자를 다시

왕위에 앉히고 간 일을, 고구려인들은 광개토대왕비문에 ‘왜가 와서 백제를 파(破)하였다’라고 기록한 것

이다. 비석이나 비문은 그 시대의 소산(所産)이지 그 자체가 그대로 모두 역사적 진실이 아닌 경우는 얼마

든지 있다. 즉, 미워하고 깔보는 상대의 역사를 예쁘지 않게 함부로(?) 기록한 것이다. 선왕(先王) 대의 숙

원(宿怨)을 생각하면 이해가 가는 일이다.

 

   고구려는 당대 이전에 장수왕의 증조 할아버지인 고국원왕이 백제 아신왕의 증조 할아버지인 근초고왕

에게 전장(戰場)에서 죽임을 당한 원한이 있었다. 광개토대왕에 이어 장수왕은 숙적 백제를 쳐서 개로왕

을 죽여 원한을 갚았다. 이러한 고구려인들은 백제를 폄칭(貶稱)하여 백잔(百殘)으로, 그리고 백제 왕족

의 일부가 고구려에 의해 공주(公州)로 밀려났다가 일본 땅으로 피신하여 이룬 조정(왜倭)을 이잔(利殘)

으로 불렀으며, 광개토왕비문에마저 백제를 ‘백잔’ ‘이잔’이라고 깔보는 명칭으로 기록한 것이다.

 

   일본의 양심적인 학자들은 이러한 오래된 자신들의 잘못된 주장의 허구를 말하고 있으나, 정객(政客)

들이나 역사 교과서 문제에서는 아직 한 치의 오류도 고치려 하지 않는다. 몇 해 전에 일본의 현 아키히토

(明仁)천황이 자신의 혈관에는 백제왕의 피가 흐른다고 말한 것을 기억한다. 그들의 아픈 곳을 너무 드러

나게 공격하고 찌를 필요는 없겠지만, 진실만은 확실히 밝히려는 노력을 우리는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한다.

 

   역사 이야기인지라 너무 딱딱하게 흐른 것 같다. 이제 이쯤에서 멈추고, 이 글을 쓰는 동안 떠오른 시상

(詩想)으로 만든 자작시를 한 수(首) 소개하려고 한다.

 

 

              辛卯故事                           신묘년 이야기

 

 

          數字碑書已壞荒            마멸되어 불분명한 비석 글자 몇 개로

          謾言古代服韓疆            그 옛날 삼한 땅을 지배했다 헛말하네

          濟人渡海成朝室            백제인이 바다를 건너가서 세운 조정

          千載後孫今日皇            천년 넘어 그 후손이 오늘 일황(日皇)이어늘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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