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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시(漢詩)의 맛과 멋

에로티시즘

 

   인간을 이야기할 때 성(性)을 빼놓고 이야기할 수는 없다. 인간에게 있어서 성(性)은 조물주가

부여한 종족 번식의 기본 도구일 뿐 아니라, 의식(意識) 깊은 곳에 존재하면서 일상의 모든 욕구

(欲求)에 대해 불쏘시개 같은 잠재(潛在)적 동인(動因)으로도 작용하기 때문이다.

 

 

   성(性)을 암시(暗示)하는 모든 예술적인 묘사(描寫)를 에로티시즘(eroticism)이라고 일컬을 때,

한시(漢詩)에서의 에로티시즘을 논하기가 내 능력으로 그리 쉬운 일은 아니지만, 오늘 여기에서

그 한 자락을 들추어볼까.

 

 

   고려 말 민 사평(閔 思平)이 지은 소악부(小樂府)에 들어 있는 <삼장(三藏)>이라는 한시를 보자.

 

 

                    三藏精廬去點燈     삼장사에 등불 켜러 갔더니

                    執吾纖手作頭僧     그 절 주지가 내 손을 잡네

                    此言若出三門外     이 말이 혹 절 문 밖으로 나면

                    上座閑談是心應     상좌의 허황한 말이라 하리라

 

 

   절에 불공을 드리러 간 아녀자를 유혹하는 상좌승을 그리고 있다. 사랑 이야기의 구체적인 진전

은 손을 잡는 일에서부터 시작한다. 시(詩)에는 손을 잡는 것만 그려져 있고, 화자(話者)는 소문이

퍼져나갈 것을 걱정하고 있다. 손을 잡은 후의 일은 독자들의 상상의 몫이다.

 

 

   이 시는 고려 가요인 쌍화점(雙花店)의 4절 중 제2절을 한역한 것이다. 쌍화점은 당시의 성풍속을

노골적으로 묘사한 민간 가요였다. 만두가게를 하는 아라비아 사람, 절의 주지승, 우물의 용(龍), 술

집아비등이 여자를 유혹하여 불륜관계를 맺고, 후렴에서는 그 소문을 들은 사람들이 ‘나도 그곳에 자

러 가겠다’ 라고 하는 매우 선정적인 내용의 노래이다.

 

 

   1123년 송(宋)나라 사신으로 고려에 왔던 서 긍(徐 兢)이란 사람이 쓴 <고려도경>이라는 책에,

<고려 사람들은 이른 아침에 일어나 반드시 목욕을 하고 집을 나선다. 또 여름에는 날마다 두 번 목

욕을 하는데 거개 시내에서 한다. 남자와 여자가 거의 내외를 하지 않고 의관을 모두 벗어 언덕에 던

져두고 물가를 따라 벌거벗되 괴이한 일로 여기지 않는다...>라는 대목이 나온다. 우리의 생각과는

달리 고려시대의 성풍속이 매우 개방적이었음을 알 수 있으니, 쌍화점 같이 야한 노래가 민간에서

유행한 것도 미상불 이상한 일이 아니다.

 

 

   손을 잡는 이야기가 더욱 세련된 스타일로 묘사된 시가 있다.

 

 

                    浣紗溪上傍垂楊      빨래하던 개울 모래터 수양버들 옆에서

                    執手論心白馬郞      내 손 잡고 논정(論情)하던 백마 탄 낭군

                    縱有連簷三月雨      아무리 석 달 동안 장마가 진다한들

                    指頭何忍洗餘香      내 손끝에 남은 님의 향기야 어찌 가실 수 있으랴

 

 

   역시 고려 말 이 제현(李 齊賢)이 지은 소악부(小樂府)에 들어 있는 <제위보(濟危寶)> 라는 시

이다. 연인의 다정한 사랑의 말, 잡아주었던 내 손끝에는 아직도 그의 향기가 남아 내 마음 흔들고

있으니, 석 달 동안 퍼붓는 장맛비라고 하여도 내 손에서 님의 체취를 씻어갈 수는 없을 것이라고

한다. 만날 수 없는 님이 남긴 체취를 고이 간직하고 싶은 여인의 연정이 물씬 풍기는 시로서, 에

로티시즘이 문학의 향기를 더해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교과서적인 작품이다.

 

 

   이렇게 멀쩡한 연애시를 두고서, 공식 역사서인 <고려사> 악지(樂志)의 해제(解題)를 보면,

‘몸이 한 번 남에게 더럽힌바 되면 석 달 동안 처마 끝에 퍼붓는 장맛비로도 씻을 수 없다’ 고 하

여 분함을 이기지 못하고 자책하는 내용이라고 설명하여 훌륭한 문학작품의 가치를 떨어뜨리고

있다. 민간의 성풍속이 너무 문란함을 걱정한 관각(館閣)의 경계성(警戒性) 해석이 아닐까 한다.

 

 

   악부(樂府)라는 말은 원래 옛날 한(漢)나라에서 민간의 가요를 채집 보존하던 관공서를 말하

던 것인데, 이후에 그런 노래 또는 가사를 모아 놓은 책이라는 뜻으로 전용되어 쓰인 것이다. 우

리나라에서는 고려 이후로 비교적 짧은 한시(漢詩)로 민간의 노래들을 번역하여 모은 것을 소악

부(小樂府)라고 불렀다. 여러 작가들이 민간의 노래들을 한시(漢詩)로 써서 소악부를 냈으며, 정

통 한문학에서는 터부시 되어온 남녀의 사랑 이야기들이 소악부에는 흔히 나온다.

 

 

   조선시대 신 광수(申 光洙, 1712~1775)의 관서악부(關西樂府)도 그런 종류로서, 민간의 풍속

이나 노래들을 한시(漢詩)로 써서 담고 있다. 그중 제97수(首)를 소개한다.

 

 

                    羊皮褙子壓身輕     양피 배자 꼭꼭 여며 몸이 가뿐한데

                    月下西廂細路明     달빛 아래 서쪽 행랑으로 샛길이 환하네

                    暗入冊房知印退     통인 돌아간 후 책방에 몰래 드니

                    銀燈吹滅閉門聲     문 닫는 소리에 은촛불을 훅 불어 끄네

 

 

   여자는 사랑하는 이를 만나러 밤길을 나섰다. 미리 언약이 있었기에 몸도 마음도 가뿐하다. 양

반가(家)의 일을 보아주는 통인이 퇴근하여 돌아가면 책방에는 도련님만 남아 있으니, 남몰래 책

방으로 들어가기만 하면 된다. 한편 통인이 돌아간 후 남자는 연인이 오기만을 기다린다.  드디어

발걸음 소리가 들리고 이어서 조용히 문을 열고 들어오는 소리가 들리자 남자는 기다릴 것도 없이

훅 촛불을 불어 끈다.

 

 

   촛불에 비친 남자의 상기된 얼굴과 설레이는 가슴의 동계(動悸)가 느껴지는 듯하다. 두 연인이

은밀히 만나는 순간까지만 담담히 묘사하였지만, 독자들이 느끼는 이 시(詩)의 무게는 4구(句) 이

후의 부분으로 쉽사리 이동하며, 시에는 묘사되지 않은 부분을 한껏 상상하게 한다. 이른바, ‘말하

지 않고 말하기’의 정수(精髓)를 보여주는 시인의 능력이 탁월하다.

 

 

   고려시대의 자유롭던 개울가 풍경은 조선시대로 들어오며 바뀌게 된다. 혜원(蕙園) 신 윤복(申

潤福)의 풍속화에도 여인들의 개울 목욕을 남정네들이 바위 뒤에 숨어 훔쳐보거나, 길을 가다가 여

인을 만나면 얼굴을 가리는 소위 내외용 부채를 가지고 다니는 사대부의 모습을 흔히 볼 수 있다.

 

 

   조선은 성리학(性理學)을 국가의 이데올로기로 삼으면서 남녀를 철저하게 분리하여 여성을 유

폐하였다. 정통 한문학에서도 여성의 신체를 묘사하거나 남녀의 애정을 그리는 일들을 금기시하

였다. “燕掠斜簷兩兩飛 落花撩亂撲羅衣 洞房極目傷春意 草綠江南人未歸 (비스듬한 처마 곁으로

제비 쌍쌍이 스쳐 지나가고/ 어지러이 지는 꽃은 비단옷을 때리네/ 동방에서 봄을 슬퍼하며 뚫어

지게 바라보는 것은/ 봄풀 짙어 가는데 강남에 계신 임 돌아오지 않기 때문이지요)”와 같은 평범

한 허난설헌(許蘭雪軒)의 시도 여자가 지었다는 이유로 음탕(淫蕩)하다는 판정을 받아 제 대접을

받지 못하였다.

 

 

   이러한 분위기가 지배하는 정통 한문학의 울타리 안에서 에로틱한 작품을 찾기는 제법 어렵다.

굳이 찾아보자면, 유 영길(柳 永吉)의 ‘절구 찧는 여인’이라는 시에서 “玉杵高低弱臂輕 羅衫時擧雪

膚程 (옥 공이 높낮게 가냘픈 팔 놀려/ 비단 적삼 올라가면 눈 같은 속살 보이네)”라고 한 정도가

고작이다.

 

 

   또한 조 휘(趙 徽)는 ‘미인에게’ 라는 제목의 “約束蜂腰纖一掬 羅裙新翦石榴花 (동여맨 가는 허

리 호리호리 한 줌이요/ 새로 지은 비단 치마 석류화 천이로세)”라는 시를 지었다가, 세상의 눈총

을 받아 마침내 청현(淸顯)에 오르지 못하였다는 내용이 이 수광의 지봉유설에 보인다.

 

 

   그러나 이런 조선시대라고 하여도 그 탈출구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앞서 언급한 악부시(樂府

詩)가 그것이다. 비교적 노골적인 애정 표현이더라도 악부(樂府)에 쓴 시들은 ‘발표자의 창작이

라기보다는 민간의 노래를 한시로 옮겨 놓은 것’이니, 그 엄격한 도덕의 잣대를 피해갈 수 있었던

것이다. 고려의 이 제현과 민 사평이 ‘소악부’를 지어냈고, 조선에서도 위에 언급한 신 광수 이외

에도 신 위, 이 유원, 정 현석등의 작품들이 그 명맥을 이어주고 있다.

 

 

   두 번째의 중요한 탈출구로서 ‘매화시(梅花詩)’를 빼어 놓을 수 없다. 앞서 말한 대로 유가(儒家)

의 체통을 중요시하는 사회 풍조 하에서, 점잖은 분들의 작품 속에 여성의 몸이나 남녀의 애정에

대한 표현은 설 자리가 없었다. 그러나 동서고금(東西古今)을 통하여 이러한 연정문학에의 표현

욕구를 완전히 매장할 수는 없는 것이니, 한시에서는 매화(梅花)를 여인으로 의인화(擬人化)하여

그 정념을 펼칠 수 있었던 것이다.

 

 

   “姑射氷膚雪作衣 香脣曉露吸珠璣 (선녀의 얼음 살결 눈으로 옷 해 입고/ 향기로운 입술로 새벽

이슬 마시었네)” 이 인로(李 仁老)의 매화이다. 고야산(姑射山) 선녀의 얼음같이 투명한 피부에 눈

처럼 흰 옷을 걸치고 향기로운 새벽이슬로 적신 입술이라! 이처럼 구체적인 미인의 모습을 한시에

담을 수 있었던 것도 매화에 의탁(依託)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雪後園庭別入春 南枝才謝北枝勻 齒然索笑无言語 月落參橫愁殺人 (눈 온 뜰에 봄은 몰래 들어

와/ 남쪽 가지 지고 난 후 북쪽 가지에 고루 피네/ 말없이 웃고 섰는 그 하얀 잇바디여/ 달 지고

별 비낀 이 밤 나를 시름케 하누나)”. 잇바디란 치열(齒列)을 뜻하는 우리 고유의 말이다. 미인은

치열이 가지런하다고 했나. 눈 온 밤, 가지런한 잇바디로 웃고 서 있는 미인의 자태에 시인은 낮

은 탄식을 내어 뱉을 수밖에 없나 보다.

 

 

                   怳然羅浮下      나부산 아래 아닌 밤중에

                   縞袂夜相迎      흰 소매로 맞아주던 그 선녀

                   枕肱臥其側      그 옆에 팔 베고 누웠노라니

                   莫問參星橫      삼성이야 뜨든 지든 나는 몰라라

 

 

   옛 수(隋)나라의 조 사웅(趙 師雄)이 매화로 유명한 나부산(羅浮山)을 유람하다가 날이 저물어

그 아래 매화마을에서 하룻밤을 유숙하게 되었다. 꿈에 나부산 매화의 정령(精靈)이 미인으로 변

하여 내려와 사웅과 정을 나누게 되었다. 꿈은 너무도 생생했으나 새벽에 깨어 보니 매화가지 위

에서 푸른 새가 지저귀고 있었다.

 

 

   겉으로는 매화의 아름다움에 홀린 내용이지만, 속으로는 아름다운 선녀와의 하룻밤 운우지정

(雲雨之情)을 묘사한 염정시(艶情詩)이다. 이 시는 조선 중기 진경문학을 싹 틔운 대학자 김 창

협(金 昌協)의 시이니, 근엄했던 사대부 사회에서 이렇듯 염정을 노골화할 수 있었던 것도 매화

시라는 탈출구의 존재 덕분이었다.

 

 

   마지막으로 또 하나의 탈출구가 있었으니, 그것은 한문소설(漢文小說)이었다. 스토리가 산문

으로 진행되다가 필요한 부분에서 시(詩)가 등장하는데, 이 역시 정통문학에서는 소위 남녀상열

지사(男女相悅之詞)를 올릴 수 없었으니, 소설의 형식을 빌려 남녀의 사랑을 표현한 것이다. 예

로 <이생규장전(李生窺墻傳)>이라는 한문소설을 보자. 제목부터가 자못 에로틱한 느낌을 풍긴

다. 중간 중간 등장하는 시(詩)중의 하나를 보면,

 

 

                   儂如百尺陰崖氷      내가 백척 응달의 얼음이라면

                   爾似一竿陽曦騰      그대는 장대처럼 긴 햇살이지요

                   願借一竿朝陽暉      장대 같은 아침 햇살 빌려다가

                   銷我百尺陰崖凝      백척 응달에 맺힌 시름 풀어 주소

 

 

   음과 양, 얼음과 햇살의 대비로 남녀의 애정시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더구나 시의 화자(話

者)는 여인으로서, 당시에 일반적으로 용납될 수 있는 수위(水位)를 훨씬 넘고 있지만, 이것이 작

가의 직접 화법이 아니고 소설에 등장하는 민간의 이야기라는 의미로 여과되어 작품으로 통용되

었던 것이다. 이 소설의 작가는 생육신의 한 분인 김 시습(金 時習)이다.

 

 

   더 길어지기 전에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언급하려고 한다. 우리 한시사(漢詩史)에서 특이한

사람이 한 분 있으니 다름 아닌 김삿갓(김 병연)이다. 그는 지방 과거시험에 장원을 했으나 나중에

알게 된 조상의 반역행위를 비관하여, 일생을 아웃사이더로서 방랑생활을 하며 많은 시를 생산해

냈던 분이다.

 

 

   그는 신랄한 풍자(諷刺)와 기발한 해학(諧謔)이 가득찬 시를 쓰기도 했고, 때론 노골적인 염정

시(艶情詩)를 쓰기도 하여 그중 많은 시들이 전래되어 오고 있으나, 방외인(方外人)이라는 특성

때문에 별다른 제재 없이 지낼 수 있었던 것 같다. 에로티시즘을 다룬 그의 시들이 문학적으로 모

두 좋은 평가를 받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지만, 때론 규격품(規格品)으로서의 수준을 보여주는

것도 있기에 여기 한 편 소개한다.

 

 

                  樓上相逢視見明      다락 위에서 만나보니 눈이 아름답도다

                  有情無語似無情      정은 있어도 말이 없어 정이 없는 것만 같구나

                  花無一語多情蜜      꽃은 말이 없어도 꿀을 많이 간직하는 법

                  月不踰墻問深房      달은 담장 넘지 않고도 깊은 방을 찾아 든다오

 

 

   ‘정담(情談)’이라는 제목의 이 시는 1, 2 구(句)가 김삿갓의 말이요, 3, 4 구(句)가 여인의 화답

이라고 알려져 있다. 남과 여를 달과 꽃으로 대비하여 놓고, 달빛이 꿀을 찾아 은은히 깊은 방을

찾아든다는 표현에서 농익은 밤(夜)의 서정(抒情)이 뚝뚝 떨어진다. ‘담장을 넘지 않는다’는 말

자체가 오히려 담장을 넘는 이미지를 시각화해주는 기막힌 아이러니를 보이는 4구(句)는 그야말

로 글자로 그린 에로티시즘의 그림 한 폭이다. 흘낏 엿보고 싶은 밤의 정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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