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프치히 시내의 한 지하주차장에 차를 두고,시 중심으로 걷다보니 성 니콜라이 교회가 먼저 눈에 들어온다.
지금이 마침 바흐 축제 기간임을 알리는 포스터가 여기에도 어김없이 붙어 있다. 12세기에 지어졌다는 이 교회는 1990년 독일의 통일
을 이루는데 중요한 거점이 되었다. 당시 '새로운 논단 Neues Forum'라는 단체가 이 교회를 중심으로 조직되어 민주화 운동을 이끌
었다.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의 지휘자이던 쿠르트 마주어Kurt Masur도 이 운동의 지도자였으며, 후에 통일독일의 새
대통령으로 추대되었으나 고사하였다. 사진은 성 니콜라이 교회.
그곳에서 잠시 더 걸어서 구시청사를 지나면, 바흐가 27년간 봉직하다가 생을 마친 성 토마스 교회가 나타난다. 똑딱이 사진기
라서 교회 전체가 한 눈에 잘 안 들어온다.
바흐는 27년간 이 교회와 그에 딸린 음악학교의 성가대 지휘자겸 오르가니스트로 봉직하면서 그리 대접받지 못한 삶을 살았다.
박봉이기도 했거니와 바흐의 음악을 마음에 들어하지 않는 참사단들에게 늘 쫓겨날까봐 걱정하면서 살았으니 말이다. 라이프
치히로 오기전부터 벌써 많은 주옥 같은 곡을 써온 바흐는 장기간 이곳에 머물며, 피아노곡의 구약舊約 이라고 알려진 <평균율
클라비어>의 제2권을 완성하였고 생애의 야심작 <요한수난곡><마태수난곡>도 완성하였다.
이 거장의 음악들은 이미 서양고전의 정수精粹가 된지 오래이나, 막상 예술가 그 자신의 생애는 걸맞는 대접을 받지 못한
것이다. 이런 일이 어찌 바흐뿐일까. 천재 음악가들은 이처럼 불행을 업고 살다가 죽는 일이 적지 않았다. 당시 음악가들의
사회적 지위가 낮은 것이 원인이었겠지만, 그들의 앞을 내다보는 능력과 고집이 타협과 안주安住를 불가능하게 하였기 때
문이기도 할 것이다. 바흐가 죽은 후 그의 미망인 안나 막달레나는 생계가 막막할 정도로 심한 가난속에 살다가 10년후에
죽었다. 바흐의 유해는 성 토마스 교회안에 묻혀 있다.
라이프치히 시청사 앞의 오래된 상가인 매들러 파사쥬Mädler Passage 안으로 들어가면 좌우로 이런 조각
품이 눈에 들어온다.
괴테의 명작 희곡<파우스트>에는 아우어바흐 술집Auerbachs Keller 장면이 나온다. 악마 메피스토가 술집에
있던 학생들에게 마법을 걸어 학생들이 자가들끼리 서로의 코를 쥐고 칼로 자르겠다고 덤비는 순간을 조각으
로 만들어 놓았다.
이 술집의 입구를 따라 내려가면
내부는 식당으로 개조되어 있다.
괴테는 라이프치히 법대를 다니며 이 술집에 자주 드나들었다고 한다. 파우스트에는 이 술집이 이름 그대로 버젓하게 등장한다.
역사적인 장소로서 고전 문학작품에 나오는 곳이 오늘날까지 이렇게 튼튼하게 보존되어 사용되고 있다는 것이 신기하다. 괴테
사후 괴테가 살던 바이마르에 다시 살게된 리스트는 이 희곡을 <파우스트 교향곡>으로 작곡하여 음악으로 남겼다.
라이프치히에서 드레스덴을 거쳐 다시 남서쪽으로 조금만 내려가면 작은 도시 츠비카우Zwickau 를 만날 수 있다. 이곳은 로베
르토 슈만의 출생지이다. 아래 사진은 그의 태어난 집과 그 내부이다.
츠비카우에서 고등학교까지 졸업한 슈만은 어머니의 강압으로 라이프치히 법대에 입학하나 우여곡절 끝에 비크 교수에게 피아
노를 사사해도 좋다는 허락을 얻고 본격적으로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하였다. 슈만은 이미 자신이 18살 때 비크 교수의 9살 난 딸
클라라를 알게되었고 시간이 지나며 사랑하게 되었다. 비크 교수는 슈만을 사위감으로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으나 슈만은 10 년
여의 소송 끝에 클라라와 결혼하였다. 나중에 손가락을 다쳐 작곡과 음악평론을 쓰며 음악잡지의 발간일을 하였는데, 이때 북독
일 함부르크 출신의 젊은 브람스를 알게되어, 그의 장래성이 훌륭함을 잡지에 기고함으로서 브람스와의 관계를 맺게 되었다.
슈만은 이후 뒤셀도르프 관현악단의 지휘자로 일하면서 교향곡 3번 <라인>을 작곡하기도 했으나, 정신병이
도져 라인강에 투신하는 사건으로 본 근처의 엔데니히 정신병원에 입원하였다가 숨져 그곳에 묻힌다. 브람스
는 그 이후도 정성껏 클라라와 슈만 가족들을 보살펴오다가, 클라라가 프랑크푸르트에서 숨졌다는 소식을 듣
고 빈에서 프랑크푸르트로 갔으나, 다시 본의 슈만 곁으로 옮겼다는 말을 듣고, 본으로 찾아가 클라라의 무덤
앞에서 서서 처음으로 나즈막하게 '이히 리베 디히' 라고 했다고 한다. 그리고는 그 역시 시름시름 앓다가 이듬
해 세상을 떠나 지금은 빈의 동남쪽 중앙묘지에 잠들어 있다.
이런 이야기들을 뒤로 하고, 이제 다소 먼 길을 출발해야 한다. 로만티쉐 슈트라쎄를 지나 독일 남부의 국경 도시 휘센으로 가야
하니 말이다. 그곳의 노이슈반슈타인성城을 향하여...
디즈니랜드를 조성할 때, 이 성을 모델로 하였다고 하여 다시 이름을 날린 성이다. 사진책에서 볼 때는 참으로 멋지게 나오던데,
현지의 길에서 찍은 나의 사진은 그다지 훌륭하지 않은 것 같다.
성 내부에 있는 루트비히 2세 왕의 조각상. 여기서부터는 사진 촬영을 허락하지 않는다.
바이에른의 왕이었던 루트비히 2세. 그는 리하르트 바그너의 숭배자이자 후원자였다. 정치보다는 예술에 탐닉하여 많은 성城을 지어 국민의 원망
을 샀고, 특히 이곳 노이슈반슈타인성城은 높은 산 속에 지었으니 백성들의 고충이 얼마나 컸을까. 왕은 이 성의 자신의 침실에 바그너의 오페라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장면들을 벽화로 그려 넣었다. 그 옆 방 독서실로 가면 역시 바그너의 <로엔그린>의 중요 장면들이 벽화로 잘 그려져 있
다. 다음방은 <탄호이저>의 장면들이 그려져 있고. 눈으로만 보고와서 말로만 지나가려니 조금 섭섭하다.
루트비히2세는 말년에 정신병으로 진단을 받고 인근의 호수가에 죽은 채로 발견되었으나 정확한 사인은 알려져 있지 않다고 한다.
자 이제, 기수를 동쪽으로 돌려 잘츠부르크로 향할 차례...
잘츠부르크 신시가(Neue Stadt, 이름이 그렇지 새로 지은 곳이라는 뜻이 아니다)의 한 곳이다. 어디서 많이 본 장소 같지 않은
가? 영화 <사운드 옵 뮤직>에 나오는 미라벨 공원이다.
이 분수를 보면 더욱 확실해진다.. 영화에서 아이들이 행진하던 곳.
여긴 아이들이 달리기 시합을 하던 곳이고..
마리아가 견습수녀로 있던 논베르크 수녀원이다.
다시 언덕을 내려와 잘츠부르트 알트슈타트의 게트라이데 가쎄 Getreide gasse 거리로 들어서면 온갖 가게들이 문을 열고
거리엔 사람들이 꽉차 있어, 사람들은 이 거리를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거리'라고 말한다고 한다. 이 거리의 중간쯤에 17
56년 모차르트가 태어난 집이 있다.
여행이 즐겁지만 힘들고 피곤하여 눈이 붓고 배만 나왔다.^^
6살 모차르트는 빈Wien을 방문하여 황실 가족과 귀족들 앞에서 훌륭한 연주를 보여주고 돌아왔다. 힘든 마차여행을 끝내고..
아~ 우리집에 왔다♬~ 하며 깡총깡총 이 계단을 뛰어 올라갔을 것이다. 이 집에서 모차르트는 15년을 살고 옆에 있는 잘자
흐Salzach 강을 건너 마카르트 광장의 집으로 이사했다. 모차르트는 6세 때부터 뮌헨으로, 빈으로, 파리 런던으로 그리고 이
탈리아로 쉬지않고 여행을 했으므로 실제로 이 집에서 잔 날은 몇 년 되지 않았을 것이다.
모차르트가 잘츠부르크 25년중 후반 10년을 살았던 집
잘츠부르크 돔 이라고 불리는 잘츠부르크 대성당. 사진기가 작아서 그렇지 실제 규모는 상당히 크다. 잘츠부르크는 당시에도
로마 직할 도시였다. 그 부근에서 소금이 많이 생산되어 잘자흐 강을 이용한 수운도 발달하고 배들의 통과세와 물건의 교역세
수입이 상당하여 로마 교황청에서는 대주교를 파견하여 다스리게 하였다.
성당 정문. 이 성당은 774년에 완공을 보았고, 그동안 전쟁과 화재로 부서진 성당을 두 차례나 보수하여 축성하였다. 정문의 네
인물 조각은 좌로부터, 성당 모형을 들고 있는 버질 성인, 천국 열쇠를 쥐고 있는 베드로 성인, 칼을 든 바오로 성인, 소금 자루
를 쥔 루퍼트 성인이다.
안으로 들어가면, 6,000 개의 파이프로 구성된 세계 최대의 파이프 오르간이 있고
모차르트가 세례를 받은 구리 성수함이 아직도 한편에 보관되어 있다.
25세에 빈으로 간(실은 잘츠부르크 궁정에서 쫓겨난) 모차르트는 이제 혼자 힘으로 음악을 작곡 연주하는 것만으로 생계를 유지
해야 했다. 이듬해 모차르트는 아버지 레오폴트와 가족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콘스탄체 베버와 빈의 슈테판 대성당에서 결혼하
였다. 다시 그 이듬해 태어난 아들을 유모에게 맡기고 모차르트와 콘스탄체는 가족들을 만나서 화해하고 결혼을 인정을 받기 위
해 잘츠부르크로 온다.
자신의 미사곡을 잘츠부르크 대성당에서 손수 연주하며 (소프라노 였던) 콘스탄체로 하여금 부르게 하는등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는 아버지의 허락을 얻는데는 실패하고 빈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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