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는 봉평의 어느 산기슭 아름다운 펜션. 앞으로는 맑은 시내가 흐르고 뒤로는 흰 구름 덮인
산으로 둘러싸인 곳입니다.
버들숲속에서 꾀꼬리 소리가 간간이 들려옵니다. 마음이 황홀해지는 순간입니다. 작은 연못가
에선 청개구리가 팔짝 뜁니다. 서너 살 아이들이 뛰는 개구리를 쫓아가며, 팔짝 뛸 때마다 까르르
웃습니다. 아마도 개구리를 처음 보는 듯합니다.
나무 그늘의 식탁 위에 아내가 점심상을 차렸습니다. 텃밭에 자라고 있는 풋고추와 깻잎을 따
오니 상이 더욱 푸짐합니다. 곁들인 찬 막걸리 몇 잔에 얼큰하여 평상에 큰 대자로 누웠습니다.
아, 이것이 휴가로구나.... 자주 이렇게 지낼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너무도 편안해서 서울
에 두고온 근심들은 깡그리 잊어버렸습니다.
올 여름 장마는 너무도 길어서 날씨를 미리 예측하기 어려웠습니다. 미리 잡은 휴가라서 비가
올 것을 각오하였는데, 잠시 흐리는 듯 여우비가 뿌리더니 금세 햇빛이 기웃거립니다. 안개가 내
려 덮인 뒷산에 올랐습니다. 아무도 없는 산, 졸졸 흐르는 시원한 샘물에 발을 담그니 더위는 이
미 멀리 사라지고, 산안개 자욱한 숲속 길을 따라 나는 한 사람의 철학자라도 된 듯 천천히 발걸
음을 옮깁니다.
이곳은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의 고장이기도 하지만, 펜션 바로 앞이 조선시대의 시인 봉래
양사언이 즐겨 찾던 팔석정이 있던 곳입니다. 물가의 바위에 그가 새겼던 ‘석실한수(石室閑睡/돌
방에서 한가로운 잠)’라는 초서체의 새김을 무심코 아침 산책 중에 발견하고는 앗 소리가 나왔습
니다. 우연히 옛 시인의 자취와 만나서, 나는 잠시 500년 전의 그가 되어 주위 경관을 다시 돌아
보았습니다. 포장된 길과 석축 그리고 주위의 집들을 시야에서 지우니, 꽤나 유현(幽玄)하고 수
려(秀麗)한 풍치(風致)가 그 당시 봉래 시인을 붙잡아 둘 만 했겠습니다.
시냇물 깊은 곳에 낚싯대를 드리워 보다가 싫증이 나면, 나무그늘 평상에 누워 가져간 책을 펼
칩니다. 그러다가 졸음이 오면 잠시 눈을 붙이고 나무 사이로 불어 내려오는 산바람을 즐깁니다.
제가 휴가를 온 것을 마침 아는지, 하루 종일 휴대폰 소리도 울리지 않는군요. 나를 찾아오는 사
람이 아무도 없고, 나의 이 고즈넉한 시간을 방해하려 틈입(闖入)해 오는 소리가 전혀 없습니다.
들리는 것은 오직 매미소리, 물소리 그리고 바람소리 뿐.....
蓬坪避暑 三首 봉평에서 피서하며
三伏炎天酒易醺 삼복 더위에 술기운도 쉬이 올라
黑甛溪水覺來聞 낮잠에서 깨어나 계곡 물소리를 듣노니
一過片雨山逾靜 여우비 지나간 후 산 더욱 고요한데
洗足凉泉踏白雲 샘물에 발 씻고서 흰 구름을 밟는다
獨坐淸溪釣鮒魚 맑은 시내 홀로 앉아 붕어를 낚고
松陰榻上臥看書 솔 그늘 상에 누워 책장을 넘기네
柴門寂寞人無到 사립문 적막하여 오는 이 없으니
盡日身平意自舒 하루종일 태평스레 마음 절로 펴지네
靑蛙一剌躍雲池 청개구리 한 마리 구름 연못에 뛰어들고
黃鳥數聲穿柳時 꾀꼬리 우는 소리 버들 숲에서 들려올 때
美菜新醪凉一味 새 막걸리 신선한 푸성귀 시원한 그 맛
野人此樂有誰知 들사람의 이 즐거움 누가 능히 알리오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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