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가을인데
절기로는 오늘이 입동(立冬)이다.
또 한 해의 마지막 계절을 맞으려니
어쩔 수 없이 마음에 서리는 감회(感懷)!
남은 날들을 자꾸 헤아려 보게 되니
궁상(窮狀)스러운 것 같아 부끄러워진다.
無邊木落蕭蕭下 라…
“어딜 봐도 가없이
낙엽만 쓸쓸히 떨어지는 풍경“을 보고
두보(杜甫)의 그 시(詩) 가 생각난다.
두보의 율시(律詩) <등고(登高)>의
마지막 연(尾聯)은 이렇다.
艱難苦寒繁霜鬢 간난고한번상빈
潦倒新停濁酒杯 요도신정탁주배
* 艱難간난…힘들고 고생스러움,
苦寒고한…추위로 겪는 괴로움
繁많을 번, 霜鬢상빈…서리내린 살쩍, 흰 머리.
潦倒요도…노쇠한 모양. 停멈출 정
"온갖 고초 심한 추위에 흰머리만 늘어나고
늘그막 탁주 따라 마시려다 잠깐 잔을 멈춘다"
이 시의 마지막 구절에 있는
멈출 정(停)자를 대다수의 사람들은
“술을 ‘끊는‘ 것”으로 해석한다.
말년에 당뇨와 고혈압으로
고생하던 두보였으니
新을 ‘또 다시‘ 라고 해석하여
停杯(정배)를 말 그대로
‘술잔을 멈춘다‘라고 해석하지 않고
당연히 ‘술을 끊는다’라고 해석을 한다.
국내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는 2014년에 증보(增補)된
상해출판사 간(刊) <당시감상사전>에 조차
‘술을 끊는다’라고 나와 있다
그런데 존경하는 한학자(漢學者)로서
많은 한시(漢詩)감상 저서를 쓴
손종섭(孫種燮, 작고)옹은
‘정배(停杯)‘의 의미를 글자 그대로
“술을 따라 마시려고 입으로 가져가다가
잠시 멈추는 행동“으로 명쾌하게 해석하였다.
술을 마시는 일을 동작 별로
거배(擧杯)ㅡ>정배(停杯)ㅡ>함배(銜杯)ㅡ>
경배(傾杯)ㅡ>건배(乾杯)로 구분하였다.
술자리의 경험이 있는 분은 누구나 알지만,
자 한 잔 합시다, 하며
모두 술잔을 채워 드는 것이 ‘거배’이고
마시기 직전의 건배사나
또는 꼭 덧붙일 말씀이 있을 때의 동작이
바로 ‘정배’이다.
홀로 마실 때라면, 술을 따라서 잔을 들고,
마시기 직전에 잠시 ‘술잔을 바라보며’
나름의 생각이나 결의(決意)를 다지는
짧은 순간을 일컬음이다.
손홍섭옹은 옛 시에 나오는
여러 사례를 들어 이를 증명하였다.
병이 많아 술을 끊기도 했던 두보였으나
이 시 <등고>를 쓸 무렵에는 좀 차도가 있어
다시 술을 입에 대었던 것이다.
한시(漢詩)의 경우에는 이렇게
문법뿐 아니라 속뜻을 간파하여
해석을 해야할 경우가 적지 않다.
쉬울 때도 있지만
이렇게 어려울 때도 있는 게 한시다.
입동에 만난 친구와 술도 한 잔 했으니
"정배(停杯)"공부도 할 겸, 시 한 수 적어 본다.
高飛雁陣夕陽來 고비안진석양래
潦倒愁顔白髮催 요도수안백발최
歲月南柯如一夢 세월남가여일몽
勸君吾酌莫停杯 권군오작막정배
저물녘에 기러기떼 높이 북쪽에서 날아오고
수심찬 얼굴에 늘그막을 재촉하는 백발이여
세월은 남쪽 가지 아래 짧은 잠처럼 덧없으니
내가 따라 권하는 이 잔을 그대여 멈추지 마오
(2022. 11. 7.)
* 南柯如夢남가일몽... 당나라 때의 소설의 주인공 순우분
(淳于棼)이 남쪽으로 뻗은 느티나무 가지 아래에서 잠이
들었다가 괴안국(槐安國)에 초청을 받아 20년 동안 부귀
영화를 누리는 꿈을 꾸다가 한순간에 깨었다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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