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저의 동창 생 한 명이 자기 아버지와 목욕탕에서 목욕하는 모습이
하도 똑같아 감탄한 적이 있습니다. 이처럼 자식이 그 부모와 모습 뿐이 아
니라 언행이나 성벽(性癖)까지도 닮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我兄顔髮曾誰似
每憶先君看我兄
今日思兄何處見
自將巾袂映溪行
우리 형님 얼굴 모습 누구를
닮았는가
선친이 보고플 땐 형의 모습
봐왔더니
그리워라 선형 모습 어디에서
다시보나
스스로 의관 갖춰 냇물에나
비춰볼까
조선 영조 때의 실학자 박지원(朴趾源)의 憶先兄이라는 시입니다.
돌아 가신 아버지의 모습을 형님이 많이 닮아, 아버지 보고 싶으면 형님
의 모습을 보면서 마치
아버지를 보는 듯 그리는 마음을 달래 왔는데,
그 형님마저 돌아가시고 나니, 이제 두 분 생각나면 누구를 보아야 하나?
한탄스러운 마음에...남들이 평소에 우리 두 형제가 많이 닮았다고 했으
니 차라리 의관을
갖추고 냇가에나 나가서 내 모습이라도 비춰 볼까..?
돌아가신 아버지와 형님에 대한
그리운 정(情)이 깊이 사무쳐 있는 작
품입니다. 젊었을 때는 잘 느끼지 못했지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세
월은 흐르고, 형도 나도 나이를 먹어 그 연륜이 얼굴에 주름진 표정으로
나타나기 시작하면, 어느날 갑자기
늙은 형의 얼굴을 보며 깜짝 놀랍니다.
순간 예전 아버지의 모습과 표정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도 이런
경
험이 있으시지요?
이 시의 작자는 그냥 냇물로 가는 것이 아니고,
의관을 갖추고 그 모습
을 비추어 보려고 갑니다. 아버지는 어느 면에서 스승이기도 합니다. 존
경하는 아버지와 형의 모습을 보려 하는데 당연히 의관을
갖추어야 한다
는 것이죠. 또한 물에 비친 아버지의 모습을 올바르게 차려 입으신 모습
으로 하여야 하기 때문이기도 할
것입니다.
거실에서 자정까지 티브이를 보고
나서 잠을 자려고 안방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뜻밖에도
침대 위에 스탠드 전등을 켜고
잡지를 읽는 안경 낀 장모님이
계셨다 아니 장모님이 어쩐 일
이십니까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을
황급히 삼키고 나는 정신을
가다듬었다 장모님이라니 장모님은 벌써
몇 해 전에 돌아가셔서
지금은 천안공동묘지에 잠들어 계신데
장모님이라니
아뿔싸
잡지를 읽고 있던 아내는 나의 착각이 대수롭잖다는 듯 웃고
말았지만 그날부터 우리 집에는 참으로 이상한 평화가 도래했다
(오탁번의 '장모님' 중에서)
나이가 든 아내의 얼굴이, 그 옛날 장모님의 얼굴을 빼다
박은 듯 닮아
있습니다. 늘 같이 있으니 잘 모르다가도 어느 순간 마주치는 장모님의 모
습에 깜짝 놀라곤 하는 것이겠지요. 그러는
시인의 얼굴은 어느새 아버지
의 얼굴을 닮아 있어...아내는 시아버지의 모습을 보고 예전처럼 조심스런
마음이 되고, 시인은 언뜻언뜻
보이는 장모님의 모습에 삼가는 마음을 가
지게 되는 상황을 시인은 <이상한 평화>라고
표현하였네요.
저는 지난 달에 조카의 결혼식에 갔었습니다. 사촌 형님의 아들이니 제겐
당질(堂姪)이 되겠습니다. 서로 바쁜 도시 생활을 하다보니 결혼식이나 환갑
등의 잔치가 있는 날이 친척들의 모이는 날로
되는 것이 요즘의 풍속이지요.
결혼식이 끝나고 가족 사진을 찍으려고 앞으로 나가는데,
또 다른 사촌
형님 한 분이 저를 보고 반갑게 웃으며 악수를 청하는 순간 저는 깜짝 놀
랐습니다. 환갑이 넘은 그 형님의
웃는 얼굴에서 돌아가신 제 아버지의 얼
굴을 보았던 것입니다! 어쩌면 그렇게 같을 수가 있을까! 사진을
찍느라고
서 있던 동안에도 제 머릿속은 온통 그 생각 뿐이었습니다.
저희 집 형제들 보다도 더 아버지를 닮은 그 사촌 형님의 웃는 얼굴!!
유전 인자가 자손들에게 전해지는 한 자손들이 조상을 닮는
것이 당연한 일
이지만, 예기치 않게 아버지의 모습을 사촌 형에게서 발견한 순간의 느낌은
놀람이었다고 표현해야할 것
같습니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아내에게 그 이야기를 하니, 아내도 무릎을 치며,
"맞아요! 어쩜 그렇게 아버님하고 똑같애! 깜짝 놀랐어요!" 라고 말하는 것이
었습니다.
철 없는 불초 때문에 걱정도 많이 하셨을 아버지가 떠오르면서, 나이가
들수록 저에게 보여 주신 애정의 깊이를 깨달아가는 자신을 느낍니다. 오늘
소개한 시처럼 저야말로 이젠 선친(先親)이 그리울 땐 그
사촌 형님을 찾아
뵈어야 하겠습니다. (2002. 6.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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