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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서 배우다

호태왕(好太王)을 아십니까? (2)

  근래에 <광개토대왕 비문>에 빠져 있습니다.

 

  광개토대왕은 우리 민족의 영웅입니다.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확

장했던 그의 공식 시호는 그래서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

開土境平安好太王)이며 중국에서는 호태왕으로 불립니다.

 

  광개토대왕 붕어 2년 후인 서기 414년에 그의 아들 장수왕이 건립한

광개토대왕비(碑)는 세계 역사상 매우 귀중한 금석문 자료인데, 그것에

대한 연구는 아직 미진한 부분이 너무 많습니다.

 

  그 비석은 아시다 시피 고구려의 수도 '국내성' 성터였던 지금의 중

국 길림성 집안(輯安)현 통구(通溝) 동북방 4.5 Km의 태왕촌(太王村)

에 있습니다. 직접 가 보신 분들도 많으실 줄 압니다.

 

  1880년대 후반, 조선 침략의 마수를 뻗치던 일본 육군 참모본부에서

파견한  한 일본인 중위가 그 비석을 발견하여 탁본한 내용 중에서 소

위 '신묘년(서기 391년) 기사' 라는 부분이 논란의 중심이 되어 있습니

다. 

 

  일본은 그 부분을 자기들 멋대로 만들어 해석하여, 서기 391년에 일

본이 우리나라 백제와 신라를 쳐서 속국으로 만들었다는 주장을 펴면

서 '임나 일본부설(任那 日本府說)' 과 함께 한일합방의 당위성까지도

운위(云謂)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내용을 알고 보면  너무도 억지와 허구가 심합니다. 광개토대

왕 비문 탁본의 정확도 문제, 글자의 판독과 해석의 문제 그리고 그러

한 내용들이 한중일 삼국의 역사서와 고고학적인 증거에 의해 정립된 

역사적 사실과 부합하느냐에 대한 문제에 이르면, 일본의 그러한 주장

은 받아 들이기가 매우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나.. 오호 답답한 지고!  우리의 옛 땅에 서 있는 그 비석은 지금

은 중국의 영토라서 우리가 마음대로 가서 보고 살피고 쓰다듬을 수가

 없는 상황이 되어 있습니다.

 

  탁본의 종류와 방법은 여러가지가 있으므로, 진정한 연구는 실제로 비

석을 늘 보면서 행해져야 할 것인데, 우선은 우리의 연구자들이  그 비

석을 내것처럼 자유로이 볼 수가 없습니다.

 

  일본이 주장하는 내용은, 탁본 중에서도 정탁본(正拓本)이 아니고 종

이를 비석 위에 대고 돌과 종이를 번갈아 보면서 글씨의 윤곽을 종이에

그린 후  여백을 묵으로 칠하는 소위 쌍구가묵본(雙鉤加墨本)을 기초로

하여 처음 주장한 것이 현재까지 이어오는 것입니다.

 

  더구나 종이를 비석에 대고 두드리는 탁본을 만들 때에도 글자를 잘

나오게 하기 위하여  석회를 발라서 탁본하기도 하였으니, 탁본이라고

다 그대로 믿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비문은 서기 414년에 세워졌는데, 청나라의 봉금(封禁)정책으로 수 백

년간 이끼와 덩굴이 파고 들었으며 1880년대 후반 다시 발견된 후 판독

을 위해 아쉽게도 불에 태워 이끼와 덩굴을 제거하였기에, 총 1,802 자

(字)중에서 아주 없어졌거나 판독이 어려운 268 글자를 제외하면 1,534

자(字)가 남아 있다고 합니다.(1963, 박 시형)

 

  전술한 신묘년 기사중의  제일 중요한 부분인  倭以辛卯年來渡海破百

殘.. 의 倭,   來,   渡,   海 등의 글자는 탁본에서도 애매하고 이상한 부

분이 많으며, 중국의 학자 왕건군(王健群)은 신묘년 기사가 아닌 또 다

른 예민한 부분에서 기존에 <滿> 으로 알려져 있던 글자를 새로이 <寇>

로, 그리고 <倭> 로 알려져 있던 글자를 새로이 <大> 로 확인했노라 발

표한 바 있으니(1984)

 

  확실치도 않은 글자를 멋대로 해석하여 자신들의 주장에 견강부회하

는 일본인들의 주장에 대해.. 우리는 정말 무서운 마음을 가지고 연구를

거듭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비문 재발견 이후 이제까지 120여년간 광개토대왕 비문에 대

한 연구발표 대부분이 일본 학자들에 의한 것이고, 그에 비해 국내학자

들의 연구는 상대적으로 미미한 상태이며, 무엇보다도 비석 실물이 중국

에 있어 어려움이 많은 상태입니다.

 

  일본은 1980년대 후반에 자매 결연을 맺는 등의 행사로 혜택을 입어

비석 실물을 연구하는 기회를 만들었던 반면(1985, 이 형구) 우리는 그

동안 무슨 일을 했으며,  외교(外交)라는 것의 지평(地平)을 인문 역사

의 분야에 까지 넓히는 안목 있는 노력을 했는지 자문해 볼 일입니다.

 

  주변국들은 역사 왜곡 뿐 아니라, 우리 영토마저 자기의 것이라고 우

기며 다가오는데,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나요?

 

  연구자의 태부족도 문제이지만, 우리 국민 대다수가 광개토대왕 비문

이 현실적으로 가지고 있는 문젯점을 자세히 모르고 있는 것도 큰 문제

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