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책에서 배우다

4세기 왜(倭)의 정체(正體) (6)

  광개토대왕 비문의 영락 9년조(서기 399년)에 보면 “백제가 (고구려에 충성하겠다는) 맹세를

어기고 왜(倭)와 화통(和通)했다. 광개토대왕은 평양으로 순행해 내려갔다..”는 구절이 있습니

다.  맹세를 어겼다는 것은 비문 영락 6년조(366년)에 나온 “엎드려 맹세하기를 이제부터 영원

(고구려왕의) 노객(奴客)이 되겠다”는 맹세를 어겼다는 말입니다.


  과연, 우리의 역사서인 삼국사기 백제본기의 아신왕 6년 서기 397년 조에 보면 ‘王與倭國結好

以太子腆支爲質’이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왕은 왜국과의 친선을 위해 태자인 전지를 <치자(質

者)>로 보냈다”는 내용인데, 일본인들은 이를 치(質)를 질(質)로 해석하여, 당시 왜국이 백제의

태자를 인질(人質)로 잡아둘 만큼 강국이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중국의 사서인 사마천의 사기(史記) 정의진시황본기(正義秦始皇本紀)에 보면, 국가

간의 정치적 동맹을 담보로 일정한 인물을 상대방에게 파견할 때, 그 인물을 質(질 또는 치)라고

하는데, 강대국이 자신의 신의를 과시하고 공격하지 않겠다는 보증으로 보내는 경우에는 치(質)

라고 읽고, 약소국이 자신의 충성을 맹세하는 담보로서 상대방에게 보내는 경우에는 질(質)이라

고 읽으며, 국력이 비등한 경우에 파견하는 경우에도 치(質)라고 읽는다고 합니다. 상기 전지태

자의 경우가 제1항의 치(質)라는 것은 너무도 쉽게 알 수가 있습니다. (박 시형, 1964)


   결론적으로 말하면,  광개토대왕 시기의 한반도는 고구려와 백제 두 강국 사이의 끊임없는 전

쟁이 이루어졌으며, 초기 고대국가의 형태로 일본의 나라 교토 지방에 형성된 왜국은 고구려-신

동맹에 대항하는 백제-가야-왜 로 이어지는 정치 경제 동맹에 의해 선진 문화를 흡수하기 시

하는 때였습니다.    


   이러한 내용들은, 한중일 3국의 역사서들 뿐 아니라, 한반도와 일본에서 출토되는 고고학적인

증거품들에 의해서 학계의 인정을 받고 있는 이야기이므로.... 광개토대왕 비문의 소위 신묘년 기

사인 (391년) “신묘년에 왜국이 바다를 건너와 백제와 신라를 破 하고 신민으로 만들었다”는 해

은 매우 신빙성이 희박한 이야기인 것입니다.


   따라서 광개토대왕 비문이나 사서(史書)등의 기타 4세기 역사 자료에 보이는 한반도에서의 왜

출현은, 백제가 주도하는 군사 세력의 하급 전사로서의 왜(倭)이고, 신라의 변경 혹은 내륙에

까지 부단히 침입하던 왜적들은 일본 본토의 통일된 나라의 군대가 아니라 주로 대마도를 근거

로 하는 해적 집단이라고 보아야 하겠습니다. (강 종훈, 2005)


  그러면 이제부터는, 그들이 “신묘년에 왜국이 바다를 건너와 백제와 신라를 破 하고 신민으로

만들었다”고 주장하는 비문의 글자 판독에 대한 이야기를 다음에 계속하기로 하겠습니다.


* 참고 문헌*


김 태식, 4 세기의 한일관계 개관, 2005

임 기환, 4 세기 동아시아 정세변동과 고구려의 대외전략, 2005

강 종훈, 삼국사기에 보이는 왜(倭)의 성격, 2005

김 두철, 4세기후반~5세기초 고구려 가야 왜의 무기 무장체제 비교, 2005

김 달수, 일본 속의 한국문화, 1984

박 시형, 광개토대왕비와 한일관계, 1964

이 형구, 광개토대왕 능비의 신연구, 198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