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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서 배우다

석회를 바르고 뜬 탁본들 (8)

  광개토대왕비의 존재가 발견된 것은 1880년 무렵이었는데, 일본 육군참모 본부

에서 스파이로 파견된 사까와 카게노부(酒匂景信)라는 포병중위가 광개토대왕비

가 있던 집안(集安) 근처에서 활동하며 입수한 비석의 쌍구가묵본(雙句 加墨本)을

입수해 참모본부에 제출한 것이 1883년이었습니다.


  이어 1889년에 참모본부에서는 비문을 석독(釋讀)하여 발표하였고, 그중 핵심이

되는 소위 신묘년 기사를 아래와 같이 해석하여 세상에 내놓았습니다. 


“百殘新羅 舊是屬民 由來朝貢 而倭以辛卯年 來渡海破 百殘◯◯◯羅 以爲臣民 

백제와 신라는 예로부터 우리의 속민으로 계속 조공하여왔는데, 신묘년(391년)

왜(倭)가 바다를 건너와 백제 ◯◯ 신라를 파(破)하여 신민으로 삼았다.”


  1889년 당시 조선과 중국등으로 제국주의 침략을 준비하던 일본 군부와 관변학

들은 자기들의 역사서인 일본서기 신공기(神功紀)의 믿지 못할 침략기사를 이

신묘년 기사에 억지로 갖다붙이면서, 일본이 4~6세기에 한반도의 남부를 식민지

배했다는 소위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을 만들어 자기들의 조선 침략을 정

당화했으지금도 교과서에 버젓이 들어있는 상태인 것은 주지의 사실입니다.


  사까와 중위가 가져온 비석의 쌍구가묵본(雙句加墨本)이라는 것은, 비석 글

위 종이를 대고 종이와 글자를 번갈아 보면서 글자의 모양을 그리고나서 여백

을 묵으로 칠한 것으로서, 엄밀히 말하면 ‘탁본’이라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비석은 원래 표면이 거치른 자연석을 사용하여 만들었고, 오랜 세월의 비바람

어 왔으며 더구나 발견 당시 굵게 앉은 이끼를 제거하기 위해 우분(牛糞)

위에 바르고 불을 질러 뜯어내는 과정에서도 적지 않은 글자들이 마멸되 었습

니다. 비석 전체의 1,775 자 중에서 완전히 식별할 수 없는 글자가 178 자, 식별은

가능하나 학자에 따라 석독(釋讀)이 다른 글자는 370 여자에 달한다고 하였습니

다.(박 진석, 1993)


  또한 광개토왕비의 탁본 연구자들에 의하면, 비교적 발견 초기에 만들어진 탁

들에서 선명하게 나오지 않은 글자들이, 이후 1930년대 까지의 탁본들에서는

해지는 현상이 나타났다고 합니다. 이는 글자 모양이 확실치 않거나 탁본이

어려위에 석회를 바르고 글자 모양을 깎아내어 탁본을 했기 때문입니다.


  1972년 재일동포 사학자 이 진희는, 비석 발견 이후 1900년을 전후한 시기에

본 육군참모본부에서 3차에 걸친 ‘석회도말작전’을 행하여 비문을 변조하였다

주장하여 학계에 큰 파문을 던졌습니다. 비면에 발랐던 석회가 점차 떨어져

나가면서 자획이 다른 글자로 바뀌는 사실을 확인한 것입니다. 그는 신묘년 기사

‘來渡海’의 세 글자를 비롯하여 비문 전체에서 모두 16군데 25 글자를 변조했

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런 주장은 우리나라에 비교적 널리 수용되고 있는 편인데, 1984년 중국의

왕 건군(王 健群)은 이를 부정하고, 석회를 발라 글자를 새겨 탁본을 뜬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일본의 ‘작전’이 아니라 비석 근처에 살고 있던 탁본업자들

이 더 또렷한 탁본을 원하는 이들에게 부응하려고 행한 일이었다고 했습니다.


  탁본의 글자가 바뀌는 한가지 중요한 예를 들자면, 광개토대왕의 전적(戰績)

기사중에서 영락 10년 경자년(庚子年) 기사 즉 비문 제2면 9행 맨 아래쪽 鹽城

滿倭潰城로 알려져 있던 것이, 중국학자 왕 건군이 조사하고 주 운대를 시

켜 만든 정탁본(1981)에서는 鹽城倭寇大潰城로 밝혀졌습니다.(1984) 즉 滿이

寇로, 倭가 大로, 大가 內로 밝혀진 것입니다.


  해석은 “신라성 염성에 왜가 가득하여 성을 크게 부수었다”로 알려졌던 것이

“안라인 수병이 신라성 염성에서 왜를 크게 궤멸시켰다”로 해석이 바뀌는 것입

니다. 아주 다른 글자로 또 아주 다른 내용으로 판독이 바뀌는 놀라운 현상입니

다.


  이 진희가 주장하듯 일본의 석회도말 변조작전이었든 혹은 왕건군의 주장대로

탁본을 대량으로 손쉽게 만들기 위한 탁본업자들의 소행이었든간에 비면에 석회

를 발라 탁본을 만든 것은 사실입니다. 이같은 ‘석회탁본’은 탁공이 미리 판정한

판독문을 전제로 하여 작성한 것이기에 그 정확성을 보증하기 어렵습니다.(이기

동, 1993) 


  이처럼 비문의 글자 해석에는 석연치 않은 점들이 많은 것입니다. 다음에는 신

묘년 기사에 대한 다양한 석독(釋讀)을 알아보겠습니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