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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시(漢詩)의 맛과 멋

달팽이

 

   베란다에 화분을 여러 개 늘어놓고 물주며 꽃 피는 모습을 보는 것을 낙으로 삼아왔다.

딸 아이 결혼 축하로 친구가 보내준 난초 화분을 일주일에 한번쯤 샤워실에 옮겨 물을 흠

뻑 주고는 아침에 다시 베란다로 옮겨 놓는 일을 일상으로 하다 보니 잊을만하면 예쁜 꽃

이 피어서 내게 작은 기쁨을 주었다.

 

 

   지난 가을 어느 밤, 자기 전에 예의 화분을 샤워실에 옮겨 물을 실컷 주고 나서 새벽에

가보니, 잠이 덜 깬 눈에 무슨 벌레 같은 것이 화분 옆 바닥에 있길래 발로 한 번 비벼 밀

어버렸는데, 꼬부라지는 모양이 왠지 이상하여 다시 잘 들여다보니 달팽이가 아닌가! 그

것도 집 없는 민달팽이였다. 갑자기 미안한 마음이 들어, 바닥에서 잘 떨어지지 않으려는

그 녀석을 잘 들어 올려 난초 화분 속으로 다시 집어넣어 주었다.

 

 

   그 후 두어 달 동안 달팽이 일을 잊어버리고 있다가, 습관대로 화분을 옮겨 물을 주고

서 자기 전에 한 번 더 물을 주려고 들어갔더니, 아, 그 달팽이가 나와서 샤워실 유리창

벽에 붙어 있는 것이 아닌가! 물을 쏟아 부우니, 달팽이가 서식하던 그 화분은 갑작스런

홍수를 만난 것이겠지. 습기를 좋아하는 녀석이지만 홍수는 곤란하니 물이 빠질 때까지

잠깐 집을 탈출한 것이겠고. 반가운 마음에 사진을 찍으며 살펴보았더니 몸길이도 5~6

cm 정도로 자랐고 두 뿔도 건강하게 잘 움직이고 있었다.

 

 

 

 

   여전히 그 화분을 집 삼아 살고 있었다는 것이, 더구나 먹이를 주지 않았는데도 늠름히

살아 있다는 것이 신기하기도 하고 좀 고마운 마음마저 들었다고 할까. 장자(莊子)를 읽

어보면 달팽이의 두 뿔에 각각 촉국觸國과 만국蠻國이라는 두 나라가 있어서 서로 전쟁을

한다는 우화寓話가 나온다. 그것이 아니라도 누구나 어릴 적에 달팽이를 잡아 뿔을 살짝

건드려 고것이 살 속으로 쏘옥 들어가 버리는 것을 즐기며 장난하던 기억들이 있을 것이

다.

 

 

   그 작은 녀석을 이후 나는 한 식구로 생각하게 되었다. 나의 집에 아내와 둘이만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작은 생명이 섬세한 뿔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살아 있다는 것이

흥미로웠고, 먹이라고 주는 것도 없고 편히 살라고 배려해주는 것이 없었는데도 잘 살고

있다는 것이 고마웠다. 화분의 흙과 이끼, 난초에서 나오는 유기물이나 눈에 안 보이는

작은 벌레들이 먹이가 되었던 것인가. 우리 집 베란다의 한 개 화분 안에 이런 또 하나의

작은 세상이 있었구나.

 

 

   그 후 오랫동안 나는 달팽이를 보지 못하였다. 지난 겨울은 얼마나 추웠던가. 화분에

물은 계속 주었지만, 이제 달팽이는 나타나지 않았다. 죽은 것일까, 어디 다른 데로 옮겨

갈 수도 없는 상황이니 말이다. 그렇게 몇 달을 보내고 봄이 되었는데도 달팽이의 모습은

보이지 않아 나는 내심 거의 포기 상태가 되어 잊어갈 무렵... 며칠 전 일요일 아침에 화

분에 물을 주려고 번쩍 들어 올리는데 아! 이 녀석이 나타났다! 화분 밑바닥의 구멍으로

나가서 화분과 화분 받침대 사이에 몸을 움츠리고 있었던 것이다.

 

 

 

 

   반가움에 나는 아내를 불렀다. 아내는 그런 나를 보고 ‘이 사람이 다시 어린애가 되어

가나?’ 하는 눈치다. 인터넷에 검색을 해보고 달팽이를 키우는 사람이 그렇게 많은 줄 알

고 놀랐다. 달팽이는 연한 양배추 잎과 달걀내막을 좋아한다니 이젠 먹이도 좀 주어야겠

다.

 

   사실 우리 집에 달팽이가 산다는 것을 알고서부터 나는 달팽이에 대한 한시를 한 수 써

보았으면 하고 생각해 오고 있었다. 물론 마음만 앞서고 시는 잘 되지 않았다. 그런데 오

늘은 출근을 하고서 여유 시간에 사전을 들척이며 긁적거려보니 의외로 술술 풀려가는 것

이 아닌가. 아마도 몇 달 동안 걱정하던 그 녀석을 다시 보게 된 감흥이 있었나보다.

 

 

                     食口                                  식구

 

 

               驚知蘭土蛞蝓棲       난초 화분 속에 놀랍게도 민달팽이 살았는데

               冬冷不顯何處稽       겨울 동안 보이지 않아 어디 갔나 궁금턴 차

               今日徙蘭盆底見       오늘 화분을 옮기려니 그 바닥에 나타났네

               久生纖角必毋迷       어디 가지 말고 예쁜 뿔로 오래오래 살아라

 

 

   달팽이의 생명력에 나는 좀 놀랐다. 그리고 이제 잘 살리라는 믿음도 어지간히 든다. 수

시로 난초 화분을 살펴보지만, 다시 또 모습을 쉬이 보이진 않는다. 달팽이는 밤에 주로 활

동한단다. 사는 곳의 습도는 70 % 정도로 축축해야 좋다고 한다. 아침에 일어나 첫 눈으로

화분에 가보니 화분 이끼 위에 흰 조각이 하나 놓여 있어 자세히 본즉, ㅎㅎ 아내가 놓아준

양배추 조각이다! 오는 일요일엔 달걀 내막을 삶아 말려 으깨 뿌려 주어 볼까......

 

(후기)

   이틀 후, 오늘 아침에도 일어나자마자 화분으로 가서 그 양배추 조각을 보았다. 놓아주었던

위치가 제법 많이 변하였고, 무엇보다도 달팽이가 섬세하게 갉아 먹은 자국이 있다. 달팽이의

몸에서 나온 그 끈끈한 점액도 확실히 묻어 있고! ㅎㅎ 언젠가는 한 밤중이나 새벽 일찍 한번

기습적으로 불을 켜고 가 보아야겠다, 녀석의 고 예쁜 뿔 좀 보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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