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한시(漢詩)의 맛과 멋

책을 찾아서

   책은 나에게 정말 좋은 벗이다. 혼자 기차를 타고 부산까지 갈 일이 있어도, 아니 비행

기로 10 시간 넘게 외국으로 갈 일이 있어도 크게 걱정이 되지 않는다. 책이라는 벗이 있

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상이 바빠, 좋아하는 책 혹은 읽고 싶은 책들을 곁에 두거나 가지고 다니며

짬짬이 읽어 나가는 나이기에, 평소에 작정하고 여러 시간 내리 독서를 하기가 사실은

쉽지 않다. 읽고 싶은 책들을 구해서 순서를 정해 놓고 있으니, 나에게 차를 타는 일처

럼 몇 시간의 보너스가 주어질 때 나는 회심의 미소를 짓는다.

 

 

   독서를 취미라고 할 수 있을까. 나는 남들이 좋아하는 바둑이나 당구 등에 대해서는

별로 흥미가 없고, 틈만 나면 책을 펼치고 또 내용이 연결되는 다른 참고서적을 찾아보

는 일에 즐거움을 느끼고 하니, 나에게 있어서 독서는 좋은 취미라고 할 수 있겠다.

 

 

   책 속에서는 지식 뿐 만이 아니라 때로는 가슴이 서늘해지는 가르침을 얻기도 하니,

선인의 말씀대로 책은 친구일 뿐 아니라 스승이기도 하다. 천 년 이천년 전에 벌써, 삶

의 요체를 자세하게 갈파해 놓은 저술들을 보면 저절로 옷깃을 여미게 되니 말이다.

 

 

   아내와 함께 백화점이나 마켓에 가서 물건을 고를 때면 30분만 지나도 싫증이 나서

주리를 틀지만, 빈 시간에 서점에라도 들르면 두 어 시간 즐겁게 혼자 보낼 수 있으니,

아마도 나에게는 책 중독(?) 증세가 조금은 있는 것 같다.

 

 

   모서리가 단단하게 각지고, 만지면 촉감이 좋은 책들. 요즘은 책이 예쁘게 나와서

좋기도 하지만, 손때가 묻어 낡을대로 낡은 옛 책에는 마치 어릴 때 살던 집에서 느끼

던 그런 편안함이 있어서 좋다.

 

 

   예전과 달리 인터넷이 발달하여 온라인 정보들이 책을 대신하는 수가 많지만, 내가

손으로 느끼고 눈으로 훑으며 갈피 사이에서 풍겨오는 향기(?)마저 느낄 수 있는 책이

나는 더 좋다. 오늘도 서점에 나가볼까. (2004년)

 

 

                         *                          *                          *

 

 

   추석 연휴, 나에게 작은 만남이 있었다. 아무도 모를 짜릿한 만남! 어디서? 청계천에서!

누구와? 그와 나 단 둘이!

 

 

   나는 지난 2년간 어디에 있는지 모를 그를 늘 찾아 헤맸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도

무지 모습을 나타내지 않아서, 이제는 그를 찾을 수가 없으려나, 어지간히 마음에 포기 비

슷한 기분도 들었던 요즘이었는데, 드디어 만난 것이다. 그의 이름은 ‘당시감상대관唐詩

鑑賞大觀’ 김원중 평석金 元中 評釋 1993년 도서출판 까치 발행, 칠백 페이지가 넘는 두툼

한 책이다.

 

 

   자투리 시간이 날 때 즐겨하는 일이 헌책방에 들르는 일이다. 서가에 가득한 책 제목들

을 눈으로 섭렵하며 보내는 시간이 내게는 즐거운 시간이다. 비록 원하던 책을 발견하진

못하였더라도 그 시간을 헛되이 보냈다는 느낌은 전혀 없다.

 

 

   간혹은 횡재를 한 기분을 느낄 때도 있다. 신간 서점에는 없는 흥미로운 책을 발견하고

는 쑤욱 뽑아 들고 펴볼 때의 그 득의감得意感 ! 말이 헌책이지 책은 여전히 새 책이고 더

구나 값마저 매우 저렴하니 그 흐뭇한 기분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빈손으로 돌아가는 날도 많지만, 운 좋은 날은 쉽게 구할 수 없는 책 서너 권을 포장마차

소주 한잔 값도 안 되는 돈으로 건질 수 있으니 그런 날은 노래라도 부르고 싶어지는 날이

다. 나의 작은 행복이다.

 

 

   2년 전에 ‘송시감상대관宋詩鑑賞大觀’ 이라는 책을 얻은 날도 그랬다. 그 책을 읽고 저작

咀嚼하느라고 이후 몇 달이 즐거웠건만, 그 책보다 1년 먼저 같은 저자가 지어낸 ‘당시감상

대관’ 이라는 책이 있음을 알고 또 열심히 구하게 되었다.

 

 

   교보문고에 신청을 하였으나 이미 절판이 되었다 하였고, 도곡동 홍대앞 금호동 몇몇 헌

책방에도 일부러 시간을 내어 들러 보았으나 찾을 수 없었으며, 전국의 크다는 헌책서점의

홈페이지도 여러 곳을 수시로 들어가 보았으나 있는 곳이 없었다.

 

 

   인천의 금창동 헌책방 거리에 가면 혹시 있을까.. 청계천 헌책방에도 가보아야지.. 하다

가 이번 추석 긴 연휴의 어느 아침에 홀로 청계천으로 나섰다. 10시가 넘었는데 조금 일찍

나왔나? 열 몇 군데 서점 중 몇몇 곳이 막 문을 열고 있었다. 하릴없이 물가를 거닐다가 전

태일 동상이 있는 곳에 이르러 사진도 찍고, 마치 청계천을 처음 본 관광객처럼 이리저리

기웃거렸다.

 

 

   이처럼 한가하게 빈 도심을 거니는 맛도 괜찮군, 하며 돌아오는 길에 보니 ‘인문서적 고

서’ 라고 간판을 단 상현서림이라는 곳이 막 문을 열고 있기에 온 김에 여기도 한 번 들어

가서 서가 앞에 딱 서는 순간 바로 눈앞에 보이는 굵은 글씨의, 아, ‘唐詩鑑賞大觀’!

 

 

   그렇게 찾던 녀석이 여기 이렇게 버티고 있을 줄이야! 먼저 뺏어갈 손님도 없으니 나는

오~래(실제론 몇 초 안되었겠지만) 그 제목만 쳐다보고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내 몸의 백

두대간을 훑어 올라오는 어떤 짜릿한 느낌을 즐기면서.

 

 

   한 번도 본적 없이 말만 듣던 친척을 만난 느낌이랄까, 집 나간 애견을 어느 모퉁이에서

우연히 만난 느낌이랄까. 집으로 돌아와 가족들에게 자랑을 늘어놓은 다음 제일 먼저 할

일은, 사야할 책 목록을 펼쳐, 당시감상대관 여섯 자의 허리로 긴 줄을 긋는 일이다. 줄을

긋는 나의 입에도 한일자로 힘이 들어간다. 만남은 많을수록 좋다. 앞으로도 나에게 이러

한 만남이 많이 있기를 ! (2005년)

 

 

                         *                          *                          *

 

 

<정묘(丁卯)년 4월 20일 밤. 내가 마악 잠이 들려 할 즈음, 정신이 갑자기 아련하여 지면서

깊은 잠에 빠지고, 이내 꿈을 꾸게 되었다. 홀연히 인수(仁瘦, 박 팽년)와 더불어 어느 산

아래 이르렀는데, 봉우리가 우뚝 솟고 골짜기가 깊어 산세가 험준하고 그윽하였다... 마침

산관야복(山冠野服) 차림의 한 사람을 만나니 '이 길을 따라 북쪽 골짜기에 들어가면 도원

(桃源)에 이르게 됩니다'...  절벽은 깎아 지른 듯 우뚝하고 수풀은 빽빽하고 울창하였으며

시냇물은 굽이쳐 흐르고 길은 구불구불 백 번이나 꺾이어 어느 길로 가야할 지를 모를 지

경이었다.... 골짜기에 들어가니 동천(洞天)이 탁 트여...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구름과

안개가 자욱이 서려 있고, 멀고 가까운 곳 복숭아나무 숲에는 햇빛이 비쳐 연기 같은 노을

이 일고 있었다.... >

 

 

   조선 세종대왕의 셋째 아들인 안평대군(安平大君)이 1447년 어느 날 밤의 꿈이 하도 생

생하여 안견(安堅)에게 설명하여 3일 만에 완성했다는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위에 스스

로 쓴 기문(記文)의 일부다.

 

 

   엊저녁 서점에 들러 헌책 코너를 둘러보다가 <안견과 몽유도원도>라는 책과 뜻밖의 조

우(遭遇)를 했다. 하드 양장본에 거의 새것이나 다름없는 책들이 그것도 여러 권이 함께 몰

려 있었다. “어! 이거” 하면서 꺼내어 반갑게 들추어 보다가 금방 나는 마음을 정했다. 관심

사가 같은 존경하는 선배에게 드릴 것까지 두 권을 구입하기로!

 

 

   고고미술사학을 전공한 안 휘준 교수가 짓고, 이 병한 교수가 그림에 덧붙인 글들을 번

역한 책인데, 몽유도원도의 전체와 부분 부분의 사진들이 도판으로 잘 나와 있고, 안평대

군과 당대의 인사 21명이 직접 써붙인 글들이 원문과 함께 번역되어 있다.

 

   이 책을 사 들고 득의에 찬 걸음으로 집에 오니, 딸아이가 묻는다.

 

 

     “아빠 ! 밖에서 무슨 좋은 일 있으셨나 봐요? 얼굴에 나타나 있는데요.”

     “그래 ! 좋은 일 있었다. 이걸 샀거든 !”

 

 

   책을 우선 들추어 보니, 명필로 알려진 안평대군의 글씨가 눈에 들어온다. 자유분방하

면서도 화려한 느낌을 주는 안평대군의 초서체 글씨 ! 예술을 사랑했던 그의 면모가 내게

더욱 궁금한 모습으로 다가선다.

 

 

   꿈에서 본 아름다운 도원경을 실제 그림으로 탄생하게 하고... 김 종서, 이 개, 박 팽년,

정 인지, 성 삼문, 서 거정, 김 수온 등 21명의 인사들로 하여금 글을 쓰게 한 일을 단순한

예술 사랑의 견지에서 볼 수도 있겠지만, 왕권이 불안정했던 당시의 정정(政情)하에서 어

떤 결사(結社)를 도모하려는 속마음도 없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몽유도원도에 덧붙여진 시문 중에서 이 개李 塏의 시를 읽어 보자.

 

 

               地位淸高道自腴      지위 높고 고결한 분, 도가 절로 풍성하여

               超然物外夢仙區      초연히 세상 밖 신선 사는 곳 꿈 꾸셨네

               煙霞洞密花開落      놀 낀 그윽한 동굴에 꽃은 피고 지고

               竹樹林深路有無      대나무 숲 깊은 곳에 길은 있는 듯 없는 듯

               漫設丹砂能換骨      불사약이 뼈를 바꾼다는 건 그만두고라도

               何須白日强懸壺      구태여 한낮에 억지로 호리병 걸 필요가 있겠나

               披圖爲想神遊適      그림 펼치고 신선 세상에 마음껏 노닐고 싶으나

               愧我心塵跡更蕪      내 마음 티끌 있고 지난 발자취 거칠어 부끄럽네

 

 

   몽유도원도의 선경仙境이 좋다는 내용이다. 옛 도가道家에서는 장생불사약을 만들어

복용하면 뼈 속까지 체질을 바꾸어 불로장생한다고 하였고, 옛글에 호리병을 찬 호공壺

公이라는 신선은 호리병을 걸어 놓았다가 저물면 호리병 속의 신선세계로 들어갔다고

한다. 그런데 굳이 단사 불사약이나 호리병 같은 것은 그만 두고라도 , 몽유도원도 같이

훌륭한 선경이 여기 있으니, 이 안에서 마음껏 노닐고 싶지만 내 마음 속세의 티끌이 부

끄럽다는 이야기이다.

 

 

   형인 수양대군과의 경쟁자로 부각될 만큼 정치에 관심도 많았고 교우의 폭이 넓었던

안평대군. 결국은 계유정난을 맞아 강화로 유배되어 사사(賜死)되었지만, 예술을 사랑

했던 안평대군이 만약 권력을 장악했더라면 그 이후는 어떻게 달라졌을까? 역사의 가

정만큼 부질없는 일이 있을까마는!

 

 

   그러나 이 국보급의 보물은 현재 일본의 천리(天理)대학 중앙도서관에 있다. 1900년

이전에 이미 일본으로 건너간 것이다. 이것뿐일까? 우리의 조상이 창조한 우리의 보물

을 우리가 귀하게 소장하지 못하는 아쉬움이 크니, 그것에 대한 연구라도 열심히 해야

할 것이다.

 

   하여간 나는 앞으로 한 달은 즐거울 것 같다. 곁에 두고서 자주 들여 다 볼 친구가 생

겼으니, 나는 엊저녁에 횡재했다 .(2006년)

 

[ 몽유도원도는  이후 2009년 추석 즈음에 잠시 우리 국립박물관에 와서 일반에공개되

었다. 그토록 보고 싶던 진품을 처음 보는 일도 감동스러운데, 도원의 복사꽃을 그린 하

얀 점들이 마치 어제 그린 듯 아직도 영롱한 것을 보고 느끼던 그 전률 ! 나는 다음날 또

몽유도원도를 찾아갔었다. 그런데 천리대 측은 이 걸작을 평소 일본에서도 상설전시는

안할 뿐 아니라, 이제 훼손될까 걱정에 해외전시는 절대 안 할 방침이라고 하니 내 생애

다시 이 그림을  만나기는 어려울 것 같다. 아.. 그게 원래 누구 거였는데....] 

 

                (진품은 사진을 찍지 못하게 하고, 복사품의 사진이다.)

                         *                          *                          *

 

   한시를 쓴답시고 지내오면서, 간혹 어떤 시상詩想이 떠오를 때면 지체 없이 글로 옮겨

놓아야 할 뿐 아니라 그것들을 가지고 시를 쓸 때는 바로 사전류를 옆에 놓고 작업에 들

어가야 한다. 심할 땐 그 시간이 잠을 자던 한 밤중일 때도 있어 아내에게 지청구를 먹기

도 하지만 말이다.

 

 

   이렇게 한시를 쓸 때 나같이 한문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이 꼭 필요한 책이 바로, 우

리말을 (중국어가 아닌) 한자어漢字語로 번역해 놓은 한韓-한漢 사전이다. 그러나 아쉬

워서 아무리 찾아보아도 그런 한韓-한漢 사전은 서점에도 어디에도 없다. 시간만 나면

인터넷에 검색을 해보아도 소용이 없다. 사실 한자 어휘를 마음대로 구사할 줄 몰라서

한시 짓기를 포기하는 경우가 나에게는 많다. 한시 짓기를 취미로 하는 많은 분들 중에

아마 나와 비슷한 분들도 있을 것이다.

 

 

   몇 주 전의 일이다. 인터넷을 검색하다 보니 2년 전 어느 일간 신문에 실렸던 기사 한

토막이 나의 눈길을 끌었다. 전주에서 서당을 열어 한시漢詩를 지도하는 금년 88세의

이 형진이라는 분이 20년의 각고 끝에 한韓-한漢 사전을 펴냈다는 내용이었다. 본격적

인 사전으로 널리 출판 유통을 한 것은 아니고, 지정한 인쇄소에 한정판을 찍어 동인同

人들 끼리 나누어 보고 간직하고 있는 상황이어서 일반 서점에서 찾을 수는 없다는 것

이다.

 

 

   어쨌든 나는 눈이 번쩍 뜨여 당장에 전화기를 집어 들었고, 겸손한 목소리로 그 분과

만날 약속을 하였다. 아, 주말까지 어떻게 기다리나, 그 한韓-한漢 사전은 어떻게 생겼

을까, 그 분은 어떤 분이며 책의 내용은 어떨까, 매우 궁금한 마음으로 주말이 오기를

기다렸다.

 

 

   휴일 아침 일찍 혼자서 차를 몰고 전주로 향하였다. 요즘은 길이 좋아져서 3시간 만에

전주에 도착하였고, 알려주신 대로 찾아가니 한옥마을 남천南川 건너 강가에 옥천학당

玉泉學堂을 개설해 놓고 후학들에게 한시漢詩를 가르치시는 이 형진翁을 만나 뵈었다.

 

 

   고령임에도 매우 건강한 모습으로 나를 반겨주셨고, 휴일이라 텅 빈 강의실에 초면의

두 사람이 마주 앉아 한시에 대한 이야기꽃을 피웠다. 물론 주로 나는 듣는 쪽이었지만.

그 분은 부친으로부터 한시를 배웠고 부친은 한학자 황고암의 제자였다고 한다. 황고암

선생은 구한말 애국자 매천 황 현 선생의 친구로, 당시 두 분은 호남 한시의 양대 산맥이

었다고 한다.

 

 

   이옹李翁은 16세에 정식으로 한시에 입문을 하여 당시 부친이 이끌던 시회詩會인 운

남사雲南社에 가입하였다. 그러나 이후 생계로 인하여 중단하였다가 자손을 다 키운 80

년대 후반에 다시 한시에 본격적으로 몰입하기 시작하셨다고 한다. 지금도 운남사의 후

신이라고 할 수 있는 흥시사興詩社를 이끌고 있으며 많은 후학들을 지도하고 있다고 한

다.

 

 

   내가 전주에 산다면 이 서당에 매일 다니며 한시를 후회 없도록 열심히 배우고 싶은데...

다음에 또 찾아뵙기로 하고, 그토록 원하던 한韓-한漢 사전과 그 밖의 여러 자료를 감사

한 마음으로 받아들고 다시 발길을 돌렸다. 내가 그분께 직접 배운 적은 없지만, 그 분이

지은 사전으로 공부하며 시를 지으면 간접적으로나마 배움의 인연을 맺는 것이 아닐까,

앞으로 좋은 시를 많이 써서 다음에 찾아뵐 때 선생님의 점수를 받아 보아야지, 그런 마

음으로 시를 지어야겠다. 기쁘다 ! (2011년 5월 24일)

 

 

 

 

'한시(漢詩)의 맛과 멋'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제 좀 그만  (0) 2011.07.27
승소 僧笑  (0) 2011.07.23
몽중헌 夢中軒  (0) 2011.05.24
달팽이  (0) 2011.04.21
과장법  (0) 2011.04.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