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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시(漢詩)의 맛과 멋

몽중헌 夢中軒

   조선 숙종 때 81세로 우의정을 지낸 미수眉叟 허 목許 穆이라는 분이 있다. 그는 늦게 63세에

잠시 벼슬길에 올랐다가 이후 물러나가 긴 세월을 고향인 연천에서 전원생활을 하였다. 이때 그

는 비좁고 천정이 낮은 집을 짓고 살았는데, 드나들 때 몸을 구부려야할 정도여서 동네 사람들의

구설에 올랐다.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이 집에 구루암傴僂庵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글을 쓰기를 “이는 구부

리고 펴지 못하는 내 스스로의 졸렬함을 희롱한 것이며, 늙은이가 집을 지을 줄 몰라 남의 웃음

거리가 되는 것을 달게 받겠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그는 이곳에서 전원을 가꾸며 수많은 나

무와 꽃 약초의 생태를 포함한 다양한 저술을 남겼다.

 

 

    구루傴僂는 뼈의 발육이 좋지 못해 척추가 구부러지는 병이다. 당쟁黨爭이 격화되던 당시의

벼슬길이란 결코 순탄한 것이 아니었다. 때론 뜻대로 나아가다가도 어느새 탄핵을 받아 폄적貶

謫되는 일이 예사였으니, 구루암이라는 집의 이름으로 자의 또는 타의에 의해 뜻을 펴지 못하고

꺾이고 마는 곱사등이의 모습으로 스스로를 조롱한 자탄이며, 또한 스스로 구부리며 몸을 낮추

겠다는 경계警戒의 철학을 말함이었을 것이다.

 

 

    숙종실록에 나온 허 목의 졸기卒記를 보면, ‘늦게 경상卿相에 올라 자기의 역량을 헤아리지

않고 직임을 받았으니 늙어 쇠약하여 일이 전도되고 착오되어 부딪히는 곳에서 웃음거리를 남겼

다’라는 기록이 있으나, 당시는 서인과 남인의 정권이 교대로 반복되는 파란의 시기였으니 실록

의 이러한 표현도 이해가 될 만하다.

 

 

    우의정이 된 후 숙종에게 궤장几杖을 하사받는 영광을 누렸으며, 이어 84세에 사직하고 고향

으로 돌아갈 때엔 임금이 내리는 거택을 하사 받았다. 그 옛날 아호를 미수眉叟(눈썹 긴 늙은이)

로 쓰던 그가 늦은 은택과 미수米壽(88세)까지의 장수長壽를 누린 것이 그가 표방하던 스스로

낮추는 ‘구루 철학’의 덕분이 아니었을까.

 

 

                              *                          *                          *

 

 

 

    조선 영조 말엽에 태어난 김 려金 鑢라는 문인이 있다. 조선 민초들의 삶을 이 분처럼 시로 잘

표현한 분도 많지 않다. 樂府詩를 포함한 그의 많은 작품 중에는 민초들의 의식주에 관계되는 모

든 물건들에 대한 설명이 시로 잘 표현되어 있다. 이 분 역시 부령으로 그리고 진해로의 두 번의

유배를 떠났던 분이다.

 

 

    10년의 긴 유배생활이 끝나고 서울로 돌아와 삼청동에서 꽃과 나무, 과일과 채소를 기르며 생

활하였다. 그는 이 집에 만선와萬蟬窩 라는 이름을 붙였다. 매미 소리가 가득한 집이라는 뜻이

니 예쁜 이름인데도 왠지 헛헛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원래 그는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집과 땅이 있었다. 그러나 긴 유배생활로부터 돌아와 보니

집과 논밭은 모두 남의 소유가 되어 있는지라, 할 수 없이 작은 집을 하나 빌려 노는 땅을 개간하

면서, 남은 것이 아무 것도 없는 작은 집을 시인은 우선 매미소리로 가득 채웠다. 매미는 선비의

맑은 정신을 상징하는 것, 그는 이 집에 살면서 수많은 나무 과일 채소 꽃을 가꾸며 일상인의 생

활 주변의 작고 소박한 것들을 그린 시를 담아 만선와잉고 라는 시집을 엮어냈다.

 

 

                    麥飯雖麤糲     맥반수추려       보리밥이 비록 거칠기는 해도

                    甛闊美無方     첨활미무방       달콤하고 부드러운 맛 비길 데 없네

                    搖疊以萵之     요첩이와지       상추 여러 장을 포개어 쌈을 싸서

                    大嚼吻弦張     대작문현장       입 크게 벌려 우적우적 먹고 나서

                    飽頹北窓下     포퇴북창하       배불러 북쪽 창가에 누우면

                    是民眞羲皇     시민진희황       이 사람이 바로 신선이라네

 

 

    부령으로 진해로 10년의 유배 생활을 하며 변방 사람들의 사는 모습을 진솔하게 시로 읊었다.

그래서 김 려의 작품들은 문학 작품으로서만이 아니라, 당시 평범한 사람들의 삶을 살필 수 있는

자료로서의 가치도 높다.

 

 

    김 려는 부령의 거처의 오른쪽 창문에 사유思牖(생각하는 들창)라는 이름을 붙였다. 후에 그

가 부령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은 시를 모아 사유악부思牖樂府 라는 시집을 엮기도 하였다. 진해

유배시에는 거소 이름을 우소헌雨篠軒 이라고 지었다. 키작은 대나무에 비가 내린다는 뜻이다.

그는 이곳에 앉아 진해에서 보고 들은 53종의 해산물에 대하여 자세하게 서술한 우해이어보牛

海異魚譜 라는 책을 저술하였다. 우해는 진해의 옛 이름이다.

 

 

    이는 생물학적인 저술일 뿐 아니라 그곳 사람들의 생활과 언어와 전설등도 곁들인 수준 높은

문학 작품이다. 그중에 문어편의 뒤에 붙은 시를 한 수 살펴보자.

 

 

                   夜靜谿沈月色微        고요한 밤 냇가에 달빛은 희미한데

                   고蹄弄影鬧苔磯        문어가 요란스레 이끼 낀 바위에 그림자 흔드니  (고 魚+高)

                   村丫錯認情僧到        마을 처자는 정분난 중이 온 줄 착각하고서

                   忙下空床啓竹扉        황급히 빈 침상 내려가 사립문을 여네

 

 

    우리의 옛 민담이나 민화에 중과 아낙네의 이야기를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어류에 대

한 생태보고서와 같은 글 뒤에 이렇게 익살스러운 시를 붙임으로서 재미를 첨가한 시인의 솜씨

가 돋보이는 것이다.

 

                              *                          *                          *

 

 

    명필 한 석봉을 모르는 이는 별로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뛰어난 문장가였다는 사실을 아

는 이는 많지 않다. 그는 고향인 황해도 금천군 석봉산 아래 초가를 짓고 그것을 찬미한 글을 지

었다.

 

 

    “남으로 수룡봉과 마주 서고 북으로 학봉산을 끌어당긴다. 서쪽으로는 군강軍岡의 높고 웅장

함에 읍揖하고 동쪽으로는 별악別嶽의 깊은 단애를 굽어본다. 들 언덕의 푸른빛이 멀리 아득하

니 뽕나무와 삼밭이 백리에 뻗혔고, 냇가의 흰 모래 환히 빛나니 갈매기와 백로 떼 수천 마리. 동

洞 속의 건곤乾坤이요 암巖 중의 일월日月이니 풍속은 순후하고 소박하며 환경과 사물은 편안하

고 한가하다. 골 깊고 숲 무성하니 마땅히 조수鳥獸의 보금자리요, 구름 일고 노을 짙으니 어스레

히 초목草木의 덮개라. 여기에 초려草廬를 짓고 청묘려淸妙廬라는 이름을 걸었다. 담담하고 적

막하고 고요하여서 지낼 만하다..........

 

 

    봄도 좋고 여름도 좋고 가을도 좋으니 비가 있고 바람이 있고 달도 있다. 이 시골의 즐거움을

얻어 저 티끌세상의 근심을 잊는다. 아침에는 뫼뿌리로 나가 구름을 보고 저녁에는 숲에 깃들이

는 새들을 보낸다........... 화로의 불길은 훈훈하게 피어오르고 차 끓이는 연기는 고요히 서린다.

벼루 앞에 앉으니 흥이 부풀어 글씨 쓰는 일에 신이 난다............

 

 

    달을 토론하고 구름을 논평하며, 시를 논하고 부賦를 이야기하다가 소부巢父 허유許由가 귀

를 씻어 아름다운 이름을 먼 후세에 남긴 일과 백이 숙제가 수양산에서 고사리를 캐며 깨끗이 고

절苦節을 지킨 일을 언급하며............ 암혈이란 어진 이를 기르는 곳이며, 임천이란 실로 보물

을 비장한 곳임을 알겠다.......... 옛 일을 느끼며 지금 일을 슬퍼하면서 읊어 짧은 노래를 이루었

으니 그 시가詩歌는 이러하다.”

 

    인용이 좀 길었다. 더 무슨 설명이 필요할까. 한 석봉의 시를 보자.

 

 

                   林深自愛幽禽託     임심자애유금탁       숲이 깊으니 새 깃들기 좋고

                   境僻還宜靜者居     경벽환의정자거       지경이 궁벽하니 조용히 살기 좋아라

                   閑寫黃庭北窓裏     한사황정북창리       한가히 북창 아래 황정경 쓰노라니

                   好風時卷一床書     호풍지권일상서       때때로 좋은 바람이 책장을 넘겨 주네

 

 

    글도 그렇고 시도 그렇고, 마음을 맑게 하니 오묘한 경지에 절로 이르는 듯하다. 날마다 이러

한 느낌을 가지고 글을 쓰고 글씨를 쓰고 시를 쓰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다. 흔히 우리는 한 석

봉을 글씨만 잘 쓰는 사람인 줄로 알고 있지만, 석봉의 글과 시 속에 그의 공부가 깊고 넓었음을

알게 되는 것이다. 그는 당대의 유명한 문인인 차 천로, 최 립, 허 균등과도 친하게 교류하며 문

학적 소양을 보였다.

 

 

   그는 과거에 급제하여 가평군수를 지냈으며, 사자관寫字官으로 사신단에 끼어 명나라에 가서

글씨로 이름을 날리었으며, 임진왜란 때 구원병을 이끌고 온 명나라 장군 이 여송이 석봉의 글씨

를 얻어가려고 애썼다는 일화가 있다.

 

 

                    집方席  내지마라  落葉엔들  못안즈랴

                    솔ㅅ불  혀지마라  어제진달  도다온다

                    兒㝆야  山菜濁醪ㄹ망정  업다말고  내여라

 

 

    그리 낯설지 않은 이 시조도 바로 한 석봉의 작품이다. 좋은 친구와 마주할 때 꼭 방석이 없어

도 낙엽엔들 편히 못 앉겠는가, 어둡다고 관솔불을 일부러 켤 필요도 없다, 어제 진 달이 저기 돋

아 오르지 않는가, 마주 앉아 흉금을 털어 놓으며 주역周易과 노장老莊을 논하는데 무슨 미주美

酒 가효佳肴가 필요할까, 산채 안주에 막걸리면 충분하지. 격식이나 인위적인 것을 배제하고 소

박한 삶의 모습을 좋아하던 한 석봉의 모습이 보이는 듯하다.

 

                              *                          *                          *

 

 

 

    조선의 18세기 문학의 특징은 평민문학의 싹이 트고 꽃이 피었다는 점이다. 평민들의 시회詩

會 모임뿐 아니라 그 작품의 출간도 활발히 이루어졌다. 대표적인 평민시회로서 송석원시사松石

園詩社가 있었고 천 수경이라는 이와 함께 이 시회를 이끌어 나가던 사람이 바로 장 혼張 混이다.

 

 

    그는 평민인 가객 장 우벽張 友璧의 아들로 태어나 한쪽 다리를 절며 가난하게 살았고 험한 일

을 하며 고관댁 아이들의 가정교사로 글을 가르쳤으며 31살에 이르러 정조가 감인소 監印所를 설

치하자 대제학 오재순吳載純의 추천으로 교서관의 사준司準이 되었다. 평민이라는 신분과 어려서

부터 다리를 저는 몸 그리고 대대로 이어져 온 가난이라는 제약 속에서도 보잘 것 없는 봉록으로

맡은 소임을 묵묵히 수행하며, 목활자를 만들어 아동용 도서를 널리 간행하기도 하였고, 평민들

의 시 작품을 모은 시집을 포함한 많은 책을 발간하였다.

 

 

    집이 없이 살던 그가, 인왕산 기슭 옥류동이라는 곳에 버려진 폐가가 있음을 발견하였다. 물맛

이 좋은 우물이 있었고, 여러 명이 같이 앉을 수 있는 너럭바위도 있었다. 300평정도 되는 이 땅의

땅값을 물으니 '겨우 50관'이라 하여 그는 이 땅을 샀다. 그리고 이 집에 이이엄而已广이라는 이

름을 붙였다. 당나라의 한 유韓 愈가 시인 노 동盧 仝을 기린 시에 ‘破屋數間而已矣(파옥수간이이

의)/부서진 집 몇 간이 있을 뿐이다’ 라는 구절이 있다. 이이而已란 ‘오직 ~ 뿐’이라는 뜻이고 엄

广은 바위에 의지하여 지은 집이라는 뜻이니, 이이엄이란 ‘오직 소박한 집 한 채 뿐’이라는 뜻이다.

 

 

    장 혼은 이 집에 살면서 늘 꾸어오던 꿈을 이제 구체화하기 시작하였다. 모옥茅屋이라도 몇

채 새로 짓고, 어디에는 무슨 나무를 몇 그루 심고 어디에는 무슨 꽃 몇 포기를 심고, 또 집에 갖

출 생활소품과 책들의 목록, 매일 해야 할 일과 즐겨야 할 일등 매우 구체적인 계획을 자세히 글

로 썼다.

 

 

    꽃과 나무를 즐기며 과일과 채소를 가꾸고 거문고를 뜯거나 산보를 하고 책을 읽으며 손님이

오면 박주를 마시고 흥이 나면 노래를 부르는 삶을 꿈꾸었다. 내 밥 먹고 내 우물 물 마시며 내

옷 입고 내 집에서 자면 그 뿐이지 무엇을 더 바랄 것이 있을까, 나 혼자 내 집의 정취를 즐기다

가 내 자손들에게 물려주면 그만이다. 있는 것만 갖고도 깨끗하게 자족하며 살아갈 수 있다는

뜻을 당호堂號로 삼고 동시에 자신의 아호로 삼았다.

 

 

    그러나, 여유있는 이들에겐 하잘 것 없는 것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그가 이런 꿈같은 신선경

을 꾸미려면 돈이 필요했으니, 그는 ‘이 집을 내뜻대로 경영하는데 드는 돈은 300관에 지나지 않

지만, 집을 산 후 자나 깨나 고심한 지 10여년이 지나도 아직도 그 꿈을 이루지 못하였다’고 한탄

하였다. 300관은 지금 돈으로 대략 오천 만 원 정도로 추정된다. 장 혼이 그 이후에라도 꿈을 이

루었는지는 알 수가 없다.

 

                              *                          *                          *

 

 

 

    경기도 포천시 창수면 주원리에 옥병서원玉屛書院 이 있다. 조선 선조 때 영의정을 지낸 박

순朴 淳의 위패를 모신 곳이다. 관직에서 물러난 그가 이곳에 배견와拜鵑窩라는 집을 집고 살

다 돌아간 곳이다. ‘두견새를 공경하는 집’이라는 뜻이다.

 

 

    옛 중국 촉蜀나라의 망제望帝는 나라를 빼앗기고 타국으로 쫓겨나 촉나라로 돌아가지 못하

는 자기 신세를 한탄하며 온종일 울기만 하다가 지쳐 죽어, 한 맺힌 그의 영혼은 두견이라는 새

가 되어 밤마다 ‘불여귀不如歸/돌아가지 못한다는 뜻’를 부르짖으며 목구멍에서 피가 나도록

울었다고 한다.

 

 

    사암思庵 박 순朴 淳이 대사간으로 있을 때, 명종의 외숙으로서 오랜 세월 위세를 떨치며 국

정을 농단하던 윤 원형을 탄핵하여 추방한 일은 대단한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선조실록을 보

면, 박 순이 이러한 일을 한 이후로부터 사론士論이 신장伸張되어 조정이 엄숙하여져, 그가 선류

善類의 종주宗主가 되었다고 하였다.

 

 

    당시는 조정이 동인과 서인으로 갈라져 당쟁이 심하던 시기였다. 그는 서인에 속하게 되어 이

율곡, 성 혼을 편들다가 탄핵을 받아 15년간의 영의정직을 버리게 되었다. 파당派黨의 견해를 사

리의 판단의 제일 중요한 기준으로 삼을 때였으니, 이곳 한탄강의 지류 백운산 영평강永平江가로

낙향한 박 순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집의 이름을 배견와로 지은 것은 사람들 말대로 단순히 그곳에 두견새가 많아서였을까, 아니

면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바로 얼마 전의 하 수상한 정국의 소용돌이 속에서 영의정으로서의 뜻

을 꺾여 물러나면서, 어린 백성을 보호해야할 임금에 대한 사군事君의 정을 나타낸 것은 아니었

을까.

 

 

    문학에 있어서의 박 순은, 당시 漢詩한시에 있어서의 송풍宋風에 반反하여 당풍唐風을 일으킨

거두라고 할 만하다. 그의 영향을 받아 소위 시단詩壇의 목릉穆陵성세盛世를 구가한 삼당시인三

唐詩人 최 경창, 백 광훈, 이 달도 모두 그의 문인이었다.(목릉은 선조를 가리킴)

 

 

                   醉睡仙家覺後疑     취수선가각후의       선가에서 취해 자다 깨어보니 의아해

                   白雲平壑月沉時     백운평학월침시       흰 구름 잠긴 골에 달 지는 새벽이라

                   翛然獨出長林外     유연독출장림외       재빨리 홀로 긴 숲 밖으로 나오는데

                   石逕笻音宿鳥知     석경공음숙조지       돌길에 지팡이 소리 자던 새가 알겠네

 

 

    박 순의 시중에서 내가 좋아하는 시이다. 산 속에 사는 벗을 찾아가 밤늦도록 술잔을 들며 고

담준론을 하다가 얼핏 잠이 든 후 새벽에 잠을 깬 순간을 그린 시이다. 이 시의 자세한 감상은 나

의 또 다른 글 <아호와 별호>에 자세히 나와 있다. 박 순은 당시 이 시로 인하여 ‘숙조지 선생’이

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가 살던 배견와 앞을 흐르는 영평강가의 바위에는 선조 임금이 그를 기려 하사한 ‘松筠節操

水月精神/송죽 같은 절개와 수월 같은 맑은 정신을 가진 이’이라는 글씨가 암각되어 있고, 그 앞

의 너럭바위에는 술 한 말이 들어갈 ‘와준窪尊’ 이라는 구멍이 있다. 반가운 벗이 찾아오면 너럭

바위에 함께 앉아 와준에 술 한말을 부어놓고 청담淸談을 즐겼으리라....

 

 

                              *                          *                          *

 

    송나라의 소동파는 전후 두 번에 걸쳐 약 20년간의 유배생활을 하였다. 첫 번 째 유배의 말미

에 황주黃州(지금의 호북성 황주)에 정착하여 살면서 황주성 동쪽 언덕에 척박한 땅을 조금 얻

어 개간하여 호구지책으로 삼았다. 동쪽 언덕이라고 하여 이를 동파東坡라고 불렀고, 이후 동

파는 그의 이름 식軾보다도 더 유명한 이름이 되었다. 그는 이 땅에 특별한 애착을 가지고 동파

의 가장 높은 곳에 다섯 칸 짜리 집을 지어 동파 설당雪堂이라고 명명하였다. 눈이 올 때 완공

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이곳에 살면서 도연명이 전원에서 노닌 즐거움을 느끼며 ‘나의 전생은

도연명이네’라고 시에 읊었다.

 

 

    59세 때엔 다시 열대 지방인 혜주로 유배지를 옮겨 그곳을 영구거주지로 알고 새 집을 지었다.

소동파는 건축에도 일가견이 있었다. 널찍한 본채에 덕유린당德有隣堂이라는 당호를 걸었고,

특히 서재에는 사무사재思無邪齋라는 이름을 붙였다. 파란만장한 일생을 되돌아보며, 여생餘

生을 공자님의 말씀대로 덕을 베풀어 이웃을 사랑하며, 마음속에는 한 점 사악한 티끌이 없는 삶

을 살기를 그는 다짐하고 또 다짐하였나보다.

 

 

    우리가 사물을 친근히 하는 방법 중에 제일 좋은 것이 이름을 붙이는 일이다. 가까이 다가오

지 않던 물건이라도 이름을 붙여 놓으면 왠지 친근감이 생기게 되는 것이다. 나무나 풀포기라도

자기만의 이름을 붙여놓으면 보다 쉽게 마음속으로 들어오는데, 하물며 살고 있는 집이라면 오

죽 그럴까. 자신의 삶을 사랑한다면 또한 자신이 그곳에 살며 추구하는 바에 애착을 느낀다면 집

에도 이름이 필요할 것이다.

 

 

    나에게 한 친구가 있다. 그는 영종도에 작은 집을 한 채 따로 마련하여 평생 모은 소중한 책

들을 정리 진열하여 놓았다. 그 집 문을 열고 들어서면 첫 눈에 느껴지는 서권기書卷氣에 잡념

이 없어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문화재 전문가로 우리 문화재를 다루는 일이 직업인 그라서,

문화재와 관련된 책과 사진 자료는 없는 것이 없다. 우리의 역사와 옛 문화에 관련된 책 수천

권이 집의 온 벽을 따라 조성한 서가에 꽂혀 있어서, 나는 이곳을 방문할 때마다 슬며시 서가를

돌며 그의 책들과 인사를 나눈다. 이런 집에서는 하루 종일 혼자 있으라고 하여도 심심치 않을

것이다.

 

 

    게다가 그는 나의 책사랑을 눈치 채고 가끔씩 나에게 책을 뽑아서 선물하기도 한다. 그가 내

게 준 책들은 우선 생각나는 것 만해도 강화금석문집江華金石文集, 오쿠라 켈렉션 한국문화재,

꽃의 중국문화사, 심도기행沁都紀行, 그림책 와유산수臥遊山水 등이다. 나도 감사하여 그에게

몇 번 책을 준 일이 있고, 지금도 다음에 만나면 줄 책을 하나 골라 놓았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 집에 좋은 이름을 붙여주는 일이 시급한 것 같아, 나름대로 보진재寶

珍齋라고 하였더니 그 이름은 어느 출판사의 이름인 것으로 생각이 되어 다시 보우재 寶祐齋라

고 하면 어떨까 하였는데, 정작 당사자인 본인은 몽중헌夢中軒이 어떨까 생각하고 있었다고

한다. 이름은 짓는데는 주인의 의사가 중요하기에 오늘부터 나는 친구의 그 집을 몽중헌이라

고 부르기로 했다.

 

 

    위에도 말했지만, 그 집에 척 들어서면 느껴지는 유다른 분위기가 나는 참 좋다. 이리 봐도

책이요 저리 봐도 책이며, 그것도 내가 좋아하는 우리 역사 우리 옛 문화에 관한 책과 자료가

대부분이니, 이곳에 앉아 창문을 열고 이 책 저 책 넘기며 황홀한 시간이 흘러 꿈에 잠기면, 시

원한 바닷바람이 불어와 책장을 넘겨줄 것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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