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빛이 밝아오는 창문을 열고 발코니에 나선다. 눈앞에는 흰 안개만 가득하여, 지리산도
그리고 그 아래 펼쳐져 있을 구례읍도 전혀 보이지 않는다. 11월 초 답지 않게 포근한 날씨에
한참을 그대로 서서, 지리산이 보내준 안개를 가슴속으로 들여 놓는 일을 수도 없이 반복해
본다.
간밤에 비가 왔었는지 옥상에서 내려오는 빗물받이 홈통으로 졸졸 물 흐르는 소리가 그치지
않는다. 엊저녁 7명이 함께 모여 앉아 신앙 대화를 하며 마신 핑크빛 산수유 막걸리 기운이 아
직 몸속 어딘가에 남아 있는 것 같은데도 머릿속은 은화銀貨처럼 맑기만 하다.
아, 내려오길 참 잘했구나. 이곳은 지리산 자락, 구례읍이 다 내려다보이는 교육원 건물. 어
제 우리 성당의 레지오 단원 7명이 주말을 이용해 성지 순례에 나선 것이다. 안개가 차차 걷히
며 구례읍의 모습이 서서히 나타나고, 앞마을 면장님의 새벽 마이크 방송이 시작되면서 이제
이곳의 하루가 시작되는 것이다.
우리도 어서 준비하고 아침 지리산을 구경해야지. 그리고 서둘러 전주로 가서 전동성당殿洞
聖堂 미사를 보고, 치명자산致命者山 성지 순례를 시작해야지. 새 소리도 서울 새소리와는 다
른 것 같다. 듣는 우리의 기분 때문이겠지. 차창으로 올려다 보이는 지리산은 윤곽만 알 수 있
도록 부분부분 구름에 가려있다.
한 山이 그 빛깔 흐려지며
그 너머 山에게 자기를 넘기면
그 빛깔 흐려진 산이 또 빛깔 흐려지며
그 너머 山에게 자기를 넘긴다네
- 안 도현, 山에 대하여 -
내가 지리산을 몇 번이나 와 보았던가, 그 때마다 높이 올라 바라보던 저 멀리 펼쳐지던 십 수
겹의 그 산 능선 모습이 이곳 지리산 보다 더 아름답고 장엄하던 곳이 있었는가. 고려의 이인노
李仁老는 <파한집破閑集>에서, 지리산의 골짜기와 산봉우리가 겹쳐지며 반복되는 모습이 마
치 꽃과 꽃받침이 면면히 이어지는 모습 같다고 했었지. 아내와 함께 나란히 서서 가물가물 겹
쳐지던 그 능선의 수를 세던 때가 몇 해 전이던가.
자동차가 산을 오르며 안개구름 속으로 들어가니, 멀리서 안개구름으로 보이던 것이 그대로
비가 되어 내리고 있는 것이다. 이런 날씨에 무슨 지리산 능선 겹쳐지는 장관壯觀을 볼 수 있겠
는가. 이번엔 못 보지만, 늘 아름다운 모습으로 이곳에 틀어 앉아 언제든지 오라고 기다려주는
산이 고맙고 미더울 뿐이지.
성삼재를 지나 다시 내려가다가 정령치 쪽으로 다시 올라갔다. 산의 상부는 이미 겨울산의
모습을 하고 있다. 잎은 다 떨어져 마치 볼록볼록한 수많은 거대한 고슴도치들이 웅크리고 앉
은 듯. 중턱쯤에서 차를 잠깐 세우고 비를 맞으며 선유폭포仙遊瀑布로 내려갔다. 비 때문에 물
이 불어 콸콸 흐르는 석간수에 붉은 단풍잎들이 와르르 떠내려간다. 저 아래 마을 사람들은 산
에서 내려오는 개천물에 떠 오는 단풍잎을 건져 이제 이 가을의 끝자락을 만져 볼 수 있을 것
이다.
중턱 아래로는 단풍이 절정이다. 얼마 전에 온 가을이 이제 겨울로 떠날 채비를 하느라 맑은
물로 얼굴을 씻고 있는 것이겠지. 이런 지리산의 모습도 나쁘지 않다. 우리도 어제 저녁엔 신앙
대화로, 또 지금은 맑은 산비山雨로 마음을 씻고서 이제 겨울을 맞이할 준비를 해야지. 가만히
있을 수 없어, 마음속에 맴도는 시구詩句들을 다듬어 한 수 만들어 보았다.
頭流 지리산
早穿小雨上頭流 아침 가랑비 뚫고서 지리산에 오르니
澗走漲喧紅滿浮 산골 물 넘쳐나 단풍 가득 싣고 흘러
山下村人登不必 산 아래 마을 사람 산에 오르지 않고
只看溪水觸深秋 시냇물만 보아도 깊은 가을 느끼리
(2011. 1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