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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시(漢詩)의 맛과 멋

제야(除夜)

 

   어머니가 미국으로 이주하신 것은 37년 전.

 

   슬하의 6남매 중 넷째인 나만 한국에 남겨두셨는데, 그때 나는 학업과 일 때문에

어찌어찌 하다가 영영 부모 형제와 멀리 떨어져 살게 되었던 것이다.

 

   이후 가끔씩 어머니를 뵈러 미국을 방문하기도 하였고, 또 어머니도 나를 보시러

여러 차례 다녀가시긴 했지만, 그 동안의 긴 세월에 비해 함께 하였던 시간은 늘 짧

고도 아쉬운 것이었다. TV로 미국 소식을 보면서 9.11사태는 물론이고, 폭설이나 홍

수 소식이라도 있으면 항상 어머니 걱정부터 떠올라 전화기를 들곤 하였었다.

 

   그 어머니가 지난 11월에 돌아가셨다. 우리 나이로 92세. 장수하셨고 또 편하게

돌아가셨으니 호상(好喪)이라고 남들은 위로해 주었지만, 나는 평소에 자주 찾아뵙

지 못한 회한(悔恨)으로 더욱 마음이 슬펐다.

 

   긴 투병 없이 며칠 힘드시다가 6남매의 품에서 고이 돌아가셨고, 부친과 평생을

사이좋게 지내시다가 18년 전에 사별하신 후, 마지막까지 또렷한 정신으로 독서와

산책과 신앙생활을 하셨고, 자손들에게도 잘못되는 일이 한 건도 일어난 적이 없었

으니, 그 점을 우리 형제들은 너무도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다.

 

   오늘은 2012년 호랑이 해를 보내는 제야(除夜). 아내는 내일 아침 부모님 차례상

에 올릴 제수(祭需) 준비로 바쁜데, 나는 뉴스에서 미국의 독감(毒感)과 혹한(酷寒)

소식에 버릇처럼 무심코 어머니 걱정을 떠올리려는 찰나, 아..... 하며 눈을 감아버

렸다. 어머니.....

 

   어머니... 하고 나지막히 부르면, 평생을 우리 형제들에게 인자하기만 하셨던 그

 미소가 달콤 쌉싸름하게 떠오른다. 나의 한시(漢詩)를 유난히도 좋아하셔서 외워

쓰기도 하셨던 어머니를 생각하며 여기에 한 수(首)를 지어 올린다. 

 

 

 

                        除夜                           제야

 

 

                 依稀燈影坐三更        희미한 등 불빛 삼경에 홀로 앉아 

                 寒樹倚窓積雪聲        찬 나무 서있는 창가  눈 내리는 소리에

                 慕憶先慈三萬里        돌아가신 어머니  멀리서 그리워

                 朔風如我夜終鳴        삭풍도 내 마음처럼 밤새워 우는구나

                                                                          (2013. 2.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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