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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시(漢詩)의 맛과 멋

시안(詩眼)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두 해 전인 1590년, 선조 임금의 조정(朝廷)에서는 적정(敵情)을

살피기 위해, 서인(西人)의 황윤길(黃允吉)과 동인(東人)의 김성일(金誠一)을 각각 정사

와 부사로 하여 일본으로 통신사를 보낸다.

 

 

   이들은 돌아와서 상반된 보고를 하는데, 역사 이야기는 다음으로 미루고, 여기에서는

그 김성일이 지은 시의 한 구를 소개하려한다. 달 밝은 봄밤에 산에서 술잔을 들며 읊기

를 ‘呼樽月滿(호준월만위)’라고 하였다. 부를 호(呼), 술동이 준(樽)이니 ‘呼樽호준’은

‘술을 가져 오라고 하여’라는 뜻이고, ‘月滿危월만위’는 ‘달빛이 가득하여 위태위태하다’

혹은 ‘달빛이 가득하여 아슬아슬하다’라고 풀이할 수 있다.

 

 

   한 마디로, ‘술잔에 달빛이 가득하다’라는 의미인데, 마지막 글자를 ‘月滿월만치(달

빛이 술잔에 가득하다)’ 혹은 ‘月滿월만희(달빛이 가득 빛난다)’등의 운자(韻字) ‘巵치’

나 ‘熙희’를 쓰지 않고 ‘月滿월만위(달빛이 가득 위태롭다)’라고 한 의미는 무엇일까.

 

 

   가득 채운 술잔을 들면 술이 흔들려 넘치려하고 그 위에 뜬 달도 술과 함께 아슬아슬하

게 넘쳐 떨어지려 한다는 표현이다. 평범한 내용의 시구가 ‘危위’자를 사용함으로서, 달

밤에 눈앞에서 들어 올린 술잔에  달빛이 찰랑거리는 순간을 참으로 생동감 있게 표현한

것이다. 그 한 글자로 인하여 그 시구뿐만이 아니라 그 시 전체가 인상적으로 느껴지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그림이 너무도 쉽게 눈에 들어오는 것이다. 이렇듯, 한시(漢詩)에 있

어서 시가 잘되고 못됨을 결정짓는 중요한 하나의 글자를 ‘시안(詩眼)’이라고 한다.

 

 

   당시인(唐詩人) 두보(杜甫)는 장안(長安)의 명승지 곡강(曲江)을 읊은 시에서 點水蜻

蜓款款飛(점수청정관관비/잠자리는 물을 차며 유유히 날고 있네)라고 하였다. 잠자리가

물 위에 멈칫멈칫 날면서 꼬리로 물을 찍는 모습을 點水(점수)라고 하였으니, 이 點(점)

자도 참으로 한번 읽으면 잊혀지지 않는 인상을 심어주는 시안이다.

 

 

   긴 장마의 끝자락에 강원도 봉평의 한 펜션에서 며칠 쉴 틈에 나는 다음과 같은 시를

짓게 되었다.

 

 

              靑蛙一剌躍雲池       청개구리 한 마리 구름 연못에 뛰어들고

              黃鳥數聲穿柳時       꾀꼬리 우는 소리 버들 숲에서 들려올 때

              美菜新醪凉一味       신선한 푸성귀  새 막걸리 시원한 그 맛

              野人此樂有誰知       들사람의 이 즐거움 누가 능히 알리오

 

 

   항상 그런 것은 아니지만 위에 말한 시안(詩眼)은, 오언시에서는 제 3자, 칠언시에서는

제5자에 오는 경우가 많다. 이 시의 두 번째 구, 黃鳥數聲穿柳時(황조수성천류시)를 보자.

꾀꼬리는 보이지 않고 버들 숲 안에서 그 노래소리만 들려오는 상황이다.

 

 

   이럴 때 제 5자에 들릴 문(聞)이나 청(聽)자를 쓰면 그야말로 있는 그대로의 평범한 표

현이지만, 그곳에 뚫을 천(穿)자를 씀으로써, 들린다는 말을 사용하지 않으면서도 꾀꼬리

소리가 버들가지 사이를 ‘뚫고’ 내 귀로 신속히 들어오는 모양을 나타냈으니, 이 시에서도

뚫을 천(穿)자는 눈에 띄는 시안(詩眼)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어쩌랴! 아무리 좋은 표현이라도 이미 다른 이들이 충분히 사용한 표현이라면

그것은 신선한 맛을 잃은 지 오래이니 어찌 시안이라고 하고 만족할 수 있을까! 꾀꼬리

소리가 버들 숲을 ‘뚫고(穿)’ 들려온다는 표현은 옛 시에서 얼마든지 찾아낼 수 있는 것

이다.

 

 

   셔얼록 홈즈를 만들어낸 작가 코난 도일은 “태양 아래 새로운 일은 없다. 모든 일은 다

과거에 한 번은 있었던 일이다.”라고 했다. 자연과 인간의 본성(本性)은 변하지 않는 것이

니, 바닷가의 모래알보다도 더 많을 인간사의 수없는 이야기들도 역사 이래로 끊임없이

반복되고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모든 일들도 거슬러 태고로 올라가면 각각의 시초(始初)

가 있었을 것 아닌가.

 

 

   이천 수백 년 한시의 역사에 이미 쌓여 있는 고인(古人)들의 한시 작품이라는 태산(泰

山) 앞에 서있는 내 자신이,  또 하나의 시초가 될 만한 것을 찾아 언제 끝날지 모르는 발

걸음을 옮기고 있는 어린아이처럼 느껴진다. 아무도 사용한 적이 없는 훌륭한 시안(詩眼)

을 만들어 낸다는 것이 내게는 참으로 지난(至難)하면서도 동시에 가슴 설레는 일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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