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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시(漢詩)의 맛과 멋

시월(十月)

 

나는 가을을 탄다.

 

가을만 되면 복잡해지는

내 마음을 어떻게 말해야 할까.

 

날씨가 추워져서

장롱 깊이 넣어 두었던

내복을 처음 꺼내 입을 때면

항상 마음이 저릿저릿해진다.

 

오랫동안 까맣게 잊고 있었던

매우 중요한 일이 갑자기 떠올랐을 때처럼,

놀라움과 두려움을 마구 섞어 놓은 듯한

감정의 덩어리 같은 것이 불쑥 솟아나,

당구공처럼 가슴 속에서 부딪히고 다닌다.

 

무엇인가를 망각한 내가,

원래 있어야할 자리에 있지 않고

지금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나?

 

프로스트의 ‘가지 않은 길’에 대한

막연함 그리움과도 비슷하지만,

그게 다도 아니다.

 

내 마음을 내가 표현하기도 참 어렵다.

아니, 내 마음의 정체를 나도

확실히 모른다고 말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하여간 나는 가을을 탄다.

 

30년 전 어린 딸과 함께

책을 사던 일이 뜬금없이 떠오르고

그 책 속표지에 내가 했던 메모를 찾아

온 책장을 뒤집는다. 

 

제목도 모르면서 어릴 때 늘 되뇌이던

현악 합주의 멜로디가 다시 귓가에 들리는 듯, 

 

서해안 그 언덕의 초라하던 교회,

'옛날 냄새'가 물컹 나는 K시의 그 골목

초저녁 유리창의 노란 불빛들은

아직 그대로 있는지,

 

웬일인지 이런

별 쓸데없는 것들이 생각나서 마음은

허전한 방랑자(放浪者)가 되어 버린다.

 

아직도 장작을 때는

아궁이가 있는 산골집에 가서

타닥타닥 타는 불을

밤늦게까지 바라보고 싶다.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이

“몇 살이나 된 이가 아직도 이런 소리를 하나?”

라고 하실까봐 짜장 부끄럽기도 하다.

 

겨울에는 추워서 여름에는 더워서

아무 생각 없이 지내다가

가을만 되면

사춘기 소년 같은 소리를 하니,

언제나 나잇값을 하려는지...

 

 

       十月                               시월

 

 

夜闌開牖月高懸       깊은 밤 들창 여니 달이 높이 걸려 있어

梧影分明擲皎田       오동나무 그림자 흰 밭에 또렷이 드리웠네

木葉散盡人亦老       낙엽 떨어져 흩어지고 이 몸 또한 늙어 가니

秋愁千里渺無邊       가을 시름 천리에 아득하여 끝이 없구나!

                                                              (2013. 10.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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