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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시(漢詩)의 맛과 멋

해운공 (海雲公)

  내가 아는 해운(海雲) 이진환 교수는 해양 생물학을 전공한 분으로서, 

에서 은퇴한 지금까지도 京鄕의 생물환경 학계 모임에  참석하여 후학들

을 이끌고 있다.

 

  그는 고향인 강화의 본가에서 멀지 않은 곳에 별서(別墅)를 짓고 서재를 

꾸며, 역사의 고장인 강화의 유산을 연구 정리하고 강연하는 보람 있는 일

에도 몰두하고 있다.

 

  그는 틈날 때마다 강화에 가서 머물며 별서를 아름답게 꾸미는 한편, 딸린 

밭을 즐겨 가꾸는 농부가 되어, 봄이면 감자와 배추를 심고, 가을이면 참깨

를 털고 낙엽을 태운다.

 

  그런 이 교수를 생각할 때면 내 마음도 항상 농부처럼 풍성해져서, 몇달

에 한 번씩 그를 만나는 詩會가 기다려진다.

 

  얼마전 그는 강화 별서에 한 열흘을 스스로 갇혀(?)있었다고 했다. 마무

해야 할 책과 논문의 자료를 한 보따리 둘러메고 벗들에게 기별을 하고 강화

로 떠나 열흘을보낸 후, 돌아오기 전날 밤의 설레는(?) 마음을, 마치 조선시

대에 짧은 유배를 다녀오는 선비의 심정에 의탁하여 다음과 같은 글로 써서 

우리에게 보냈다.

 

  "도성으로 입성한다는 생각에 때아닌 비까지 내려 달빛조차 볼 수 없는 

섣달 보름 긴긴밤을 뜬 눈으로 새웠네.

 

  유배지에서 한 일이라고는 손수 만들어 묶은 작은 책 네 권과 출판사

에 보내기 위해  쓰고 다듬은 원고 200여 쪽이 전부일세. 올 적에 패초

를 쥐어 주며 잘 다녀오란 말 속에 '쉬임없이 정진하라'는 뜻이 들어있

었음을 알았건만, 이제 한양의 압구정 선비를 만나면 뭐라 변명 해야 

할까?

 

  흙내음 가득한 해운재를 떠나려니, 바람은 차고 눈에 익숙해진 누옥

을 다시 비우게 되니 어찌될까.. 살펴보고 또 돌아보네. 한양길에 나서

는 발걸음이 가볍지 않아 뒷곁 소나무에게 눈으로 물어보니 무심한 그

친구는 그저 빙그레 웃고만 있네."

 

  이 글을 읽고 나는, 마치 옛 선비가 쓴 漢詩 연작 3首를 읽는 듯한 느낌이 

들었고, 곧바로 이 글을 漢詩로 바꾸어 보았다.

 

 

    解配                        해배                

 

         

凍雨梢梢滅月光   동우초초멸월광   

嘉平朔望夜長長   가평삭망야장장   

明朝遂向都城出   명조수향도성출   

輾轉輕眠夢漢陽   전전경면몽한양   

          

分付牌招别袂傳   분부패초별몌전   

不休精進著書篇   불휴정진저서편  

只今小册手中把   지금소책수중파   

何說狎鷗居士前   하설압구거사전   

         

寒風剛出海雲齋   한풍강출해운재   

陋屋空留動别懷   누옥공류동별회   

步重始途還一顧   보중시도환일고   

後庭無事赤松娃   후정무사적송왜   

          

유배에서 풀려나며

 

달빛도 사라지고 겨울비만 추적추적 

섣달의 열흘 보름 밤은 길기도 한데  

내일 아침 드디어 도성으로 출발하려니

뒤척이며 얕은 잠에 한양 꿈만 꾸네

 

헤어질 때 패초를 주며 분부하던 말씀은

쉼없이 정진하여 책편을 쓰라던 뜻이어늘

지금 여기 이 작은 책들만 내 손에 들고서

압구정 선비 만나면 무슨 말을 해야하나 

 

찬 바람 맞으며 막 해운재를 나서는데

누추한 집 비우고 가니 감회가 서리네

먼 길 발걸음 무거워 다시 한번 돌아보니

무심한 뒤뜰 적송은 여전히 예쁘구나

 

* 嘉平가평...음력 섣달의 다른 이름, 朔望삭망...초하루와 보름,  여기에선 

  초하루에서 보름까지의 기간, 遂向수향...드디어 향하다, 輾轉전전...뒤

  임, 分付분부...분부하다, 牌招패초...임금이 신하를 부를 때 명을 써보내

  던 패, 여기에선 먼길을 떠나는 벗에게 주는 격려의 글이나 정표.

  

  别袂별몌...헤어짐, 헤어질 별, 소매 몌,

  手中把수중파...손에 쥐다, 쥘 파,잡을 파,

   

  剛出강출...이제 막 나서다, 動別懷동별회...헤어짐의 감회를 울리다.

  步重보중...발걸음이 무겁다, 始途시도...먼 길을 출발하다. 顧돌아볼 고,

  娃예쁠 왜.

 

 

  윗글에 등장하는 해운재(海雲齋)는 그의 아호(雅號)에서 따온 옥호(屋號)

이다. 우리는 이 해운재에서 재작년 볕이 따뜻한 가을날에 시회를 한 적이 

있어서 지금도 그곳의 아름다운 잔디가 눈에 선하다.

 

 

  내가 하고프나 하지 못한 것 중의 하나가 시골에 별서를  가지고 꾸미는 

일이어서 그런지, 나는 그곳이 참 좋다. 어느 일요일 별서에서 낙엽을 긁어 

모아 태우고 있다는 이교수의 글이 올라 왔을 땐, 마치 내 옆에서 낙엽 타는 

기분좋은 냄새가 나는 듯, 타닥타닥 소리가 들리는 듯, 잠시 기분 좋은 대리

만족을 느껴보기도 했다.

 

  그런 이교수가 지난 번 모임에서, 칠십에 뒤늦게 오십견이 왔다며 한쪽 어

깨를 붙잡아 돌리면서 찡그리며 웃었고, 누군가 평균보다 20년이나 더 건강

한 사람이라고 덕담을 하였다.

 

  그는 지금도 목소리가 카랑카랑하고 윤기가 있으며, 힘도 젊은이 못지 않

아서 별서의 농사일에도 부지런하다. 

 

  그런가 하면 어느새 영산강으로 금강으로 찾아가서 수질 환경 조사와 회의

를 한다며 풍광사진을 올리곤 한다. 평생 공부한  바로 아직도 사회에 공헌을 

하며, 고향을 가꾸며 기리는 일에도 바쁜 그에게서, 나는 바람직한 老境의 단

면을 느껴보는 것이다.

 

 

   寄海雪公              기해운공                

 

今玆君受古稀筵             금자군수고희연           

笑話遲酸五十肩   소화지산오십견   

精力絕倫期百歲   정력절륜기백세   

學才無伴訓多年   학재무반훈다년   

故園結構三間屋   고원결구삼간옥   

空隴經營數畝田   공롱경영수무전   

洪福無窮家亦睦   홍복무궁가역목   

春來聚飮百花前   춘래취음백화전   

 

해운공께 부침

 

금년에 칠십 세로 고희연을 받을 그대가

늦게 온 오십견에 어깨가 아프다고 웃네

근력이 절륜하여 백세를 기약할 만 하고

학식 비할 이 없어 오래 대학 교편 잡았네

고향땅에 삼간옥 자그마한 별서를 꾸미고

빈 언덕에 뙈기 밭 일구어 경영을 하네

이 큰 복이 끝이 없고 가정 역시 화목하니

봄이 오면 모두 모여 꽃 놓고 잔 기울이세

 

* 今玆금자...금년, 遲늦을 지, 酸아플 산,  시릴 산, 시다, 고통스럽다.

  無伴...짝이 없다, 비할 이가 없다, 伴짝 반, 訓가르칠 훈, 故園고원...고향,

  結構...집을 짓다, 結맺을 결, 構얽을 구, 隴밭두덕 롱, 畝이랑 무(묘), 밭의 

  단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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