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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시(漢詩)의 맛과 멋

압구정 (狎鷗亭)

   한명회는 수양대군을 도와 계유정난을 성공시켜, 세조(世祖)때부터 예종(睿宗), 성종(成宗) 

때까지 세상을 쥐락펴락했던 인물이다. 세 번이나 영의정의 자리에 올랐으며, 두 딸을 각각 예

종과 성종의 왕비로 만들고 정국을 이끌었다.

 

 

   말년에 한강변에 압구정(狎鷗亭)이라는 정자를 짓고 선비들과 함께 유유자적하였다. 압구정

이라는 이름은 중국 송(宋)의 재상이었던 한기(韓琦)가 만년에 정계에서 물러나 한가롭게 갈매

기와 친하게 지내면서 머물던 그의 서재 이름을 압구정이라 했던 고사에서 따온 것이다. 

 

  한명회는,

 

 

     靑春社稷   청춘부사직    젊어서는 나라를 위해 몸 바쳤고

     白首江湖   백수와강호    늙어서는 강호에 누워서 쉬네.

     

라는 시를 지어 아첨하는 이들의 찬시(讚詩)들과 함께 압구정에 걸어 놓았다. 어느 날 이곳을 지

나던 김시습이 이를 보고 扶자를 危자로, 臥자를 汚자로 바꾸어서 조롱하였다는 말이 전해진다.

 

 

     靑春社稷   청춘위사직    젊어서는 사직을 위태롭게 했고

     白首江湖   백수오강호    늙어서는 강호를 더럽게 했도다

 

 

 

   한 글자를 바꾸었을 뿐인데 그 뜻이 아주 반대로 변하였다. 이 이야기는 인터넷에서 복사되어 

돌아다닐 뿐 아니라 소설로까지 만들어졌다. 그러나 구한말 하겸진(河謙鎭)이라는 분이 1942년에 

지은 <동시화東詩話>라는 책을 보면, 이것은 기묘사화를 일으켜 조광조(趙光祖) 일파를 죽인 훈

구파의 대신(大臣 ) 심정(沈貞)의 이야기라고 기록되어 있다.

 

 

   심정(沈貞)은 양천(陽川)에 소요정(逍遙亭)이라는 정자를 지어 놓고 시를 지어 붙였는데 그 내

용 중에

 

 

     靑春社稷   청춘부사직     젊어서는 나라를 위해 몸 바쳤고

     白首江湖   백수와강호     늙어서는 강호에 누워서 쉬네.

 

   이 부분이 있었다. 어느 날 밤 沈貞의 꿈에 한 협객이 들어와 심정(沈貞)의 머리채를 잡고, “너 

때문에 착한 선비들이 거의 죽고 종사도 거의 무너졌는데, 너는 어찌 감히 나라를 보필하였고 강

호(江湖)에 누워있다는 말로 세상을 속이려고 하는가? 빨리 고치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렇지 않

으면 너를 참수하겠다.” 라고 꾸짖었다. 

 

   심정(沈貞)이 떨면서 엎드려 사죄하기를 “扶(부)자를 危(위)자로, 臥(와)자를 蟄(칩)자로 바꾸

면 어떠할까요?” 

 

    靑春社稷   청춘위사직     젊어서는 나라를 위태롭게 했고

    白首江湖   백수칩강호     늙어서는 강호에 웅크려 숨었네

 

하니 이 젊은이는 적당하지 않다고 하였다. 심정(沈貞)이, 그렇다면 어떤 자로 고쳐야 마땅한지 

물으니, “扶(부)자는 傾(경)자로, 臥(와)자는 오(汚)자로 고쳐라!”고 하였다. 심정(沈貞)이 명을 

따르겠다고 하였다.

 

    靑春社稷   청춘경사직     젊어서는 나라를 기울게 했고

    白首江湖   백수오강호     늙어서는 강호를 더럽혔네.  

 

 

 

  다시 한명회의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일세(一世)의 권력자가 한강변에 압구정이라는 정자를 

지었으니 너도나도 찬시(讚詩)를 지어 바쳤다. 대제학(大提學) 서거정도 예외는 아니어서 <압

구정부狎鷗亭賦>라는 긴 글을 지었다. 

 

  그러나 솔직한 사람들도 있었다. 역시 동시대를 살던 최경지(崔敬止)라는 이는 다음과 같은 

시를 썼다.

 

 

   三接殷勤寵渥優    삼접은근총악우     하루 세 번 접견 임금 총애 두터우니

   有亭無計得來遊    유정무계득래유     정자가 있어도 가서 놀 겨를 없으리

   胸中自有機心靜    흉중자유기심정     가슴 속의 기심이 절로 고요해지면

   宦海前頭可狎鷗    환해전두가압구     벼슬 중에도 갈매기와 친해질 수 있으련만

 

 

   ‘기심(機心)’이란 ‘딴 생각을 품고 기회를 노리는 마음’ 또는 ‘속이거나 다른 속셈을 가진 마음’

이라는 뜻이다. 가슴 속에 욕심과 흉계가 가득한 당신에게 무구(無垢)한 갈매기들이 어떻게 친하

게 다가올 수 있겠는가... 라고 조롱한 것이다.

 

   옛날에 바닷가에서 갈매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었다. 매일 아침 바다로 나가 갈매기와 함께 

놀았는데, 그에게 다가오는 갈매기가 수없이 많았다. 그의 아버지가, “듣자니 네가 갈매기와 노닌

다는데, 한 마리 잡아 오너라” 다음날 그가 바닷가로 나가자 갈매기들은 한 마리도 다가오지 않았

다고 한다. 그가 갈매기를 잡으려는 다른 마음(機心)을 품었기에 갈매기들은 용케도 인간의 기심

(機心)을 안다는 말이다.

 

 

   한명회보다 몇 세대 뒤의 인물인 김성일의 압구정시(狎鷗亭詩)에도 ‘기심(機心)’이 나온다.

 

 

    一生名利較銖錙    일생명리교수치    평생의 명리를 저울에 달아보면

    多少機心爾自知    다소기심이자지    기심이 얼마인지 너 스스로 알리라

    莫以虛名誇末俗    막이허명과말속    헛된 명성 하찮은 세속에 자랑말게나

    白鷗元不被人欺    백구원불피인기    갈매기는 본래 사람에게 잘 속지 않거늘

 

 

 

   권력을 잡기 위해서, 또 잡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계략을 꾸미고 사람들을 

해(害)쳐야 했을까. 갈매기는 사소한 기심(機心)도 알아차려 가까이 하려하지 않는다는데, 한

명회 같은 사람이 정자(亭子)를 꾸며 압구정(狎鷗亭)이라는 이름을 누리려고 했으니, 참으로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을 민심이 모를 리가 없었을 것이다. ‘압구(狎鷗)’와 ‘기심(機心)’이라는 

화두(話頭)가 우리 역사에서 사라질 수 있을 것인가. (狎친할 압, 鷗갈매기 구)

 

 

 

   글을 쓰며 마음속으로 나도, 기심(‘機心)’을 넣어 시(詩)를 썼던 일이 생각난다. 찾아보니 5년 

전에 잠시 압구정(狎鷗亭) 구지(舊址)를 서성이면서 한강(漢江)을 바라보며 쓴 시라서 여기에 

다시 올려본다.

 

 

 

         秋日              추일                        가을날

 

      

      靜午淸江岸    정오청강안      조용한 대낮 맑은 강가 언덕 아래

      輕烟寂釣磯    경연적조기      가녀린 안개 서린 낚싯돌 적막한데

      鳧曹刳水走    부조고수주      오리들 물 가르며 내쳐 달리고

      雁陣隔雲飛    안진격운비      기러기 줄지어 구름 가를 날아가네

      世上事無苟    세상사무구      세상 일 내 한 몸 구차할 것 없으니

      人間心不違    인간심불위      살아가는 이 마음도 어긋날 리 없구나

      佇身鷗莫笑    저신구막소      우두커니 선 나를 갈매기여 웃지 마라

      久棄意中機    구기의중기      가슴속 욕심 이미 버린 지 오래라네

 

 

 

* 釣磯(조기)... 물가의 낚시하는 곳(돌)

* 鳧曹(부조)... 오리 떼, 鳧오리 부, 曹 무리 조

* 刳水(고수)... 물을 가르다, 刳 가를 고

* 雁陣(안진)... 줄 지어 나는 기러기 떼

* 無苟(무구)... 구차할 것 없다, 苟 구차할 구

* 人間(인간)... 사람 사는 세상.

* 久棄(구기)... 버린지 오래이다, 久 오랠 구, 棄 버릴 기

* 意中機(의중기)... 마음 속의 욕심이나 거짓된 마음

  機 거짓 기, 나쁜 책략. 機=機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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