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이다.
바쁜(?) 손자 녀석을 전화로 꼬여서 데리고 나와, 좋아하는 회(膾)를 사 먹이고
집으로 돌아와 책을 펼쳐 놓고 꾸벅꾸벅 졸고 있는데, 친구가 카톡으로 시(詩)를
보내왔다.
遠上寒山石俓斜 원상한산석경사 멀리 차가운 산 오르니 돌 길은 비스듬한데
白雲生處有人家 백운생처유인가 흰 구름 피어나던 곳에 오니 인가가 보이네
停車坐愛楓林睌 정거좌애풍림만 저녁빛 단풍 숲이 좋아 저절로 수레 멈추니
霜葉紅於二月花 상엽홍어이월화 서리 맞은 붉은 잎이 봄꽃보다도 더 붉구나
* 石俓석경…돌길, 斜비스듬할 사, 停車정거…수레를 세우다,
坐좌…저절로 또는 ~때문에, 楓林풍림…단풍 숲, 睌늦을 만,
霜葉상엽…서리 맞은 잎, 紅於~ : ~보다 붉다, 於어…~보다
당(唐)나라 시인 두목(杜牧, 803~853)이 쓴 <산행(山行)>이라는 시다.
시인은 멀리 산마을에 사는 친구와 약속이 있었나보다. 멀리 흰 구름 피어나는
가을 산의 산 마을에 사는 친구에게 가야하니, 일찍 출발해야 했을 것이다.
비탈진 돌길에 수레를 끄는 말도 힘들어, 해가 기울 즈음에야 마을이 보였을 것
이고, 저녁 빛에 불그레 물든 가을 숲, 붉은 단풍잎은 봄꽃보다도 더 붉었다.
시인은 산길, 흰 구름, 인가, 수레가 등장하는 한 폭의 수채화를 그려 놓았는데,
그 중에 시인이 제일 주안점(主眼點)을 둔 것은 저녁빛을 받아 붉게 타는 단풍이다.
그리고 동시에 시인 자신도 그 정경(情景)으로 스며들어, 가을 속의 한 점이 되어버
린다. 이 시(詩)를 읽는 독자들의 마음 속에도 이 가을 풍경의 여운이 오래도록 남아
있게 될 것이다.
한시(漢詩)를 잘 아는 분이나 혹시 잘 모르는 분이라도 어떤 시를 읽었을 때, 그것
이 잊혀지지 않고 저절로 오래 기억되는 경우가 있을 것이다. 이 시의 4구(句)가 바로
그런 예(例)라고 할 수 있으니, 참으로 절창(絶唱)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그런데 한 가지 문제는, 이 시의 3구(句)에 나오는 3번째 글자 ‘坐(좌)’의 의미에
대한 해석이다. 우리나라의 해설서들을 펴보면
(1) ~때문에
(2) 저절로, 나도 모르게
(3) 앉아서
의 세 가지 해석이 있는데, 이 시를 나에게 보낸 친구는 (2)번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의견이다. 나는 (1)번에 더 기울어져 있는 편이지만, 설왕설래 끝에 우리의 의견은
‘단풍 색이 너무 좋아서 저절로 수레를 멈추고 감상한다‘로 절충되었다.
한자(漢字)는 자(字)마다 그 뜻이 수십 가지씩 있으니, 직접 그 옛날로 돌아가
작가에게 물어보지 않고는 그 누가 모든 경우의 뜻을 100% 정확히 알리요. 이러한
모호함이 또한 한시만의 매력이니 어쩌겠는가.
나보다도 한문 실력이 한참 위인 이 친구는, 대화 끝에 자신이 천학비재(淺學菲才)
하다고 겸양을 보이니, 이 말을 듣는 나야말로 냉한(冷汗)이 삼두(三斗)라, 당장 시
한 수를 지어 보냈다. (*냉한이 삼 두…식은 땀이 서 말이나 흐를 정도로 긴장)
不佞菲才淺學兒 불녕비재천학아 나야말로 아는 게 별로 없는 사람인데
崇深山海子朋師 숭심산해자붕사 학문 높고 깊은 그대는 친구이자 스승이오
許多誤謬吾文在 허다오류오문재 내가 쓴 글과 시에 많은 오류 있을 터이니
幸冀君匡拙劣詩 행기군광졸렬시 부디 나의 졸렬한 시를 고쳐주기 바라오
* 不佞불녕…나의 낮춤말, 菲才淺學비재천학=천학비재, 학문이 얕고 재주가 부족함,
崇높을 숭, 誤謬오류…잘못, 幸冀행기…부디~하기 바람, 匡바로잡을 광.
그랬더니 친구는 친구대로 또 즉석시를 써 보냈다. 그것도 나의 시의 운자(韻字)
兒-師-詩를 그대로 화운(和韻)한 시를.
喜嘆 기쁜 탄식
不佞交君幸運兒 불녕교군행운아 못난 이 몸이 오히려 그대 사귄 행운아인데
吟風啓導友如師 음풍계도우여사 스승같은 벗으로 음풍농월 깨우쳐 가르치나
錦心繡口浮雲慾 금심수구부운욕 멋진 詩想과 詩句는 내겐 뜬구름같은 욕심
自作何時李杜詩 자작하시이두시 언제쯤 이백 두보 같은 훌륭한 시 지어볼꼬
* 啓導계도…깨우쳐 인도하다, 錦心繡口금심수구…훌륭한 착상과 아름다운 글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는 말은 아마도 이 친구에게 딱 어울리는 말이리라.
그런데 오늘은 일요일인데도, 우리 세 명의 카톡 방에 왜 다른 한 친구는 조용
할까… 하고 글을 올리니, 아하 지금 막 플루트 레슨을 끝냈다고 한다.
아, 쉬는 날까지도 이렇게 공부를 하다니! 갑자기 나를 돌아보게 된다. 색소폰
을 생일 선물로 받아, 학원에 다니며 레슨을 받다가, 도저히 힘들어서 중단하고
나중에 다시 하지… 한 것이 어언 10년이나 되었으니… 지금 어쩌다 불어보면 내
연주 소리는 내가 들어도 절망적.
전문 음악가들도, “하루를 연습을 안하면 자신이 알고, 이틀을 연습을 안하면
지휘자가 알고, 사흘을 연습을 안하면 청중이 안다“고 하며 게으름에 대한 경계
를 소홀히 하지 않는다는데, 물론 애초에 그런 분들과 비교할 바가 되지도 않지
만, 하여간 내 색소폰은 방구석에서 녹이 슬 지경.
한탄스러운 마음에 이 친구에게 격려도 할 겸 몇 자 적어본 것이 절구(絶句)가
되어 당장 보냈다.
薩管吾家綠銹生 살관오가녹수생 내 집의 색소폰은 푸른 녹이 슬었는데
君常長笛練聲淸 군상장적연성청 그대의 플루트 연습 소리는 낭낭하고녀
初心盡力來佳日 초심진력내가일 초심 잃지 않고 진력하면 좋은 날 오리니
吹奏名音志遂成 취주명음지수성 명곡 연주 그대의 뜻 마침내 이루리라
* 薩管살관…薩克管(살극관=색소폰), 綠銹녹수…푸른 녹,
練聲연성…연습하는 소리, 練익힐 련, 志뜻 지, 遂마침내 수.
선생님이 한 달에 두 번씩 집에 와서 레슨을 해주고 가는데, 끈기 있게 몇 년을
지속한 그의 연주 소리는 이제 들을 만 한 정도로 아름다운 소리를 내게 되었다.
가곡이나 길지 않은 명곡들도 곧잘 연주하는 그에게, 나는 욕심을 부려, 내가 좋아
하는 도플러(Franz Doppler)의 ‘헝가리 전원 환상곡’을 언제쯤이면 들려줄 수 있겠느
냐고 말한다. 넉넉히 시간을 줄 테니, 건강하게 지내면서 착실히 연습하여, 언제일지
나중에 꼭 들려달라고 부탁을 한다.
저녁때가 되니 그에게서 화답(和答)이 왔다?!!! 아까 내가 보낸 시(詩)의 운자(韻字)
生-淸-成 에 대해 生-淸-誠으로 의운(依韻)한 화답시이다.
村松白金長笛 촌송백금장적 무라마츠 플래티넘 플루트
音樂愚才老拙生 음악우재노졸생 음악 재주 한심한 쓸모없는 늙은이지만
八旬練欲奏淸淸 팔순연욕주청청 연마하여 팔순 때엔 맑은 소리 연주하고저
必遺此笛能孫女 필유차적능손녀 이 플루트 꼭 소질있는 손녀에게 물려줄 터
後日吹思祖寸誠 후일취사조촌성 훗날 불면서 할애비 작은 정성 생각해 주길
* 愚才우재…재능이 낮음, 練欲~…연습하여 ~하려하다, 奏연주할 주,
淸淸청청…맑디 맑은 (소리), 遺남길 유, 후세에 남김, 寸誠촌성…조그마한 성의
무라마츠(村松)라는 회사는 일본 동경의 신주꾸(新宿)에 있는 유명한 플루트 메이
커이다. 친구는 그곳에서 사온 명기(名器) 백금 플루트로 용맹정진하고 있으니, 나의
애청곡을 직접 들을 날도 그리 멀지는 않을 듯하다.
친구는 손녀로는 초등생 외손녀가 하나, 돌잡이 친 손녀가 하나, 이렇게 둘이 있는데
앞으로 경쟁자가 또 생길지는 아무도 모른다. 나는 아직 손녀가 없지만 앞으로 생기면
얼마나 또 귀여울까! 저 플루트를 친구가 손녀에게 물려줄 때엔, 손녀는 벌써 다 큰
아름다운 처녀가 되어 있겠지.
살면서 느끼는 할아버지의 손녀 사랑을, 또한 손녀의 할아버지 사모를, 나아가서는,
사람은 늙어서 사라져도 자손으로 이어지는 사람사는 인정(人情)을 보여주는, 잔잔하고
따뜻한 시(詩)이다. 읊어보는 내 속으로도 그런 따뜻함이 퍼진다.
어느새 날이 어두워진다. 손자와 점심을 함께 먹고 돌아와, 하루 종일 집에 있었는데
오늘 하루 많은 여행을 한 것 같다. 마음 속으로……
나의 일요일 보고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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