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한시(漢詩)의 맛과 멋

앵행도리(櫻杏桃梨)

  얼마 전 신문에 조선시대의 화원(畵員) 이유신(李維新)이 그린 <포동춘지(浦洞春池)>라는

그림이 올라왔다. 포동(浦洞)은 지금의 성균관 근처라고 한다. 그림을 보면 물가의 파릇파릇

한 잔디밭에 8명의 선비가 편하게 자리를 잡고 앉았고, 주위엔 살구꽃 복사꽃이 바야흐로

한창인데, 가져온 술병도 한 구석에 놓여 있고 지필묵(紙筆墨) 펼쳐 놓았으니, 이제 막 시회

(詩會)를 시작할 모양이다.

 

  한 선비가 시()를 읊으면, 이어서 다른 선비가 또 시()로 화답(和答)하며, 중간중간 술

돌아간다. 눈 앞에 보이는 활짝 핀 도리화(桃李花)는 볼 때마다 염려(艶麗)한 웃음으로

선비들의 춘정(春情)을 자극하여 시회의 즐거움은 절정에 달한다. 도도히 오른 취기(醉氣)

에 힘입어, 누구의 시는 작년 것 그대로가 아니냐, 누구의 시는 어떻게 이런 멋진 구절(句節)

을 썼느냐, 은 누구의 것은 유명시(有名詩)를 표절한 것 아니냐는 둥 신나게 말들이 오고

가고 나면, 남는 것은 시편(詩篇)들 뿐!

 

  옛 그림을 보고 이렇게 상상할 수 있는 것은, 우리 친구들의 시회(詩會)도 그렇기 때문이

. 코로나 사태로 인해 작년 봄에 시회를 하고 여지껏 미루면서 또 한 봄을 보내고 있으니,

얼마나 멤버들이 답답해 하고 있을 것인가. 이제 우리 멤버들도 다 백신 1차 접종을 마쳤으

, 을에는 시회가 가능할 것인지. 일찍이 매화(梅花) 동백(冬柏)꽃으로 시작해서 앵행도리

(樱杏桃梨=벚꽃, 살구꽃, 복사꽃, 배꽃)가 차례로 피고 지고, 봄은 이제 떠날 준비를 마치고

있으니 그저 아쉽기만 하다.

 

 앵행도리(樱杏桃梨)라는 네 글자 말은 당() 시인 백거이(白居易)<춘풍(春風)>이라는

에 나온다.

 

春風先發苑中梅  춘풍선발원중매   봄바람에 제일 먼저 핀 동산 안 매화가 피고
櫻杏桃梨次第開  앵행도리차제개   벚꽃, 살구꽃, 복사꽃, 배꽃이 차례로 핀다
薺花楡莢深村裏  제화유협심촌리   냉이꽃 느릅순은 마을 깊히 숨어 눈에 안띄지만
亦道春風爲我來  역도춘풍위아내   봄바람은 우리를 위해서도 불어온다고 말하네

 

* 次第차제차례차례로,  薺花제화냉이꽃,  楡莢유협느릅나무의 잎이 나기 전에

  가지 사이에 나는 꼬투리,  道말할 도,

 

  봄이면 사람들은 그저 화사하게 눈에 뜨이는 벚꽃, 살구꽃, 복사꽃, 배꽃만 즐길 뿐이고,

따스한 봄바람은 이들만을 위한 선물인 줄 알지만, 보잘 것 없어 눈에 안 뜨이는 냉이꽃이

나 느릅나무 순들도 엄연한 봄 왕국의 백성들이니, 일년 중 한 때만 불어오는 봄바람의 은

택을 이들도 골고루 누려야 한다는 것이겠지. 크건 작건, 향기가 있건 없건, 화사하건 소박

하건, 만물(萬物) 중에 아름답지 않고 중요한지 않은 존재가 어디 있겠는가.

 

  1,200년 전, 노비제도가 있던 신분사회(身分社會)에서, 상류 지배계급의 일원으로 하인들

동원하여 지나칠 정도의 식도락(食道樂)을 즐기던 시인(詩人)에 대한 이야기는 여기서는

하지 말기로 하자.

 

  녹로시(轆轤詩)라는 것이 있다. 다른 사람이 쓴 시()중의 한 구절(句節)을 그대로 가져

와서 자기 시()의 한 구절로 넣어 쓴 시를 말한다. 그러나, 네 구() 중의 한 구를 그대로

가져왔다고 해서 시 짓기가 25%만큼 쉬워지는 것은 아니다. 그 구()에 어울리도록 새로운

시상(詩想)으로 창작을 해야 하니 쉽다고 보기 보다는, 어찌 보면 더 어렵거나 혹은 재미가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녹로(轆轤)도르레를 말함인데, 도르레는 원래 기준이 되는 어느 힘이 있을 때, 그 힘의

향을 바꾸거나 더 큰 힘을 내는 장치로서, 남이 지은 시의 한 구절을 그대로 가져와서 그

것을 받침목으로 하여 덧붙여 짓는 것이니, 그런 의미에서 녹로시(轆轤詩)라고 이름 지은 것

이 아닐.

 

  각설하고, 요즘 날씨가 너무 좋다. 초(初)의 매화(梅花)로 시작한 꽃 소식이, 동백,

수유, 개나리, 벚꽃, 목련, 복사꽃, 라일락, 사과꽃, 배꽃으로 이어지더니, 철죽, 영산홍과 함

, 화중왕(花中王)이라는 모란(牡丹)도 활짝피었다. 꽃을 보면 그저 좋은 시와 술로 하루를

보낼 시회(詩會) 생각 뿐인데, 지난 봄 이후 모이지도 못하고 아까운 새 봄을 지금 헛되이

보내고 있으니 안타까울 뿐이다.

 

  백거이의 <춘풍>2() 櫻杏桃梨次第開(앵행도리차제개)에서 제일 끝자()만 바꿔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코로나 때문에 아니 우한(武漢) 바이러스 때문에 화가 난 마음은

시에 넣지 않았다.

 

     晩春             만춘                    늦봄

 

櫻杏桃梨次第零   앵행도리차제령   벚꽃 살구꽃 복사꽃 배꽃 차례로 지더니

牡丹躑躅爭開庭   모란척촉쟁개정   모란꽃 철쭉꽃 다투어 마당에 피어나니

閑窓積阻朋思服   한창적조붕사복   한가로이 창가에서 적조한 벗들 그리며

睍睆禽鳴獨坐聽   현환금명독좌청   아름다운 새소리 홀로 앉아서 듣고있네

 

* 次第차제...차례차례, 零떨어질 령(, 이슬, , 꽃잎, 잎 등이),

  牧丹(목단)...'모란'이라고 읽음,  躑躅척촉...철쭉,

  積阻적조오래 만나지 못함,  思服사복늘 잊지않고 마음속에 그리워함.

  睍睆현환새 소리가 아름다운 모양,  聽들을 청.

 

  백거이의 유명한 구절을 기구(起句)로 하여 지었는데, 그 구()만 눈에 뜨일 뿐 용두사미

(龍頭蛇尾)요 태산명동서일필(山鳴動鼠一匹)로 끝난 것 같아 대시인에게 미안한 마음도

든다. 그랬더니 친구가 곧바로 다음과 같은 시를 보내왔다. 역앵행도리를 넣어서 지은

시인데, 주제가 뚜렷하게 일관되어 보기가 좋다. 봄은 가는구나!

 

梅花冬栢報春離  매화동백보춘리   매화꽃과 동백꽃이 봄을 알리고 떠나니

櫻杏桃梨盛後衰  앵행도리성후쇠   벚꽃 살구꽃 복사꽃 배꽃이 피었다 지고

躑躅牡丹紅爛漫  척촉모란홍난만   철쭉과 모란이 바야흐로 흐드러졌지만

汝從未久別無辭  여종미구별무사   너희도 머잖아 작별인사도 없이 떠나겠지

 

* 報春봄을 알리다, 爛漫난만...꽃이 흐드러지게 핀 모양

  從좇아서, 未久오래지 않아, 無辭말도 없이, 인사도 없이

'한시(漢詩)의 맛과 멋'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고향 (故鄕)  (0) 2021.05.12
어린이날 (兒童節)  (0) 2021.05.06
이팝나무 (流蘇樹)  (0) 2021.04.28
일요일 (日曜日)  (0) 2021.04.23
도원 (桃園)  (0) 2021.04.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