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교수생활을 정년 퇴직하고
고향인 강화(江華)에서
자연에 묻혀 사는 L교수.
서울집과 고향집을 늘 오가면서
도시에서만 사는 내가 느끼지 못하는
그의 시골 생활에 나는 늘
부러움과 동경심을 가지고 있다.
작년 상강(霜降) 때엔
손수 경작하여 수확한 고구마를 보내주어
얼마나 고맙게 먹었는지…
나도 억지로 연고가 없는 시골에
작은 땅과 집을 마련하고 고향집 삼아
자연에 묻혀 살 수도 있겠지만
자기가 태어나고 성장한
고향집과 어떻게 비교가 되겠는가.
수시로 서울집에서
고향집과 또 근처에 따로 지은 별서(別墅)를
왕래하며 지내는 L교수가 이번에
작은 수술을 받느라고 3주간
고향집을 가보지 못한 것이다.
심어 놓은 감자는 잘 크는지
키우는 난(蘭)들은 햇빛도 쐬어주니 못하고….
이런저런 걱정(?) 끝에
드디어 완쾌되어 별서(別墅)로 달려간
L교수에게서 글이 왔다.
「 20여 일만에 고향집에 다다르니
제일 먼저 이웃집 누렁이가 반겨주고,
주인을 기다리던 철쭉이
활짝 웃으며 인사하니 반갑기 그지없네.
걱정하던 주인의 마음을 아는지
감자는 무성한 잎을 내밀며 반겨주고,
인심좋은 이웃은
농작물을 심도록 밭을 일구어 놨네.
이제는 나도 팔 걷고 호미들고
그대들과 더욱 친해지고 싶네~ 」
늘 L교수의 도농(都農) 생활에 부러움을 갖고
대리만족을 해오던 내 머릿속에
단번에 그려지는 그 정경(情景)을
한시(漢詩)로 써보았다.
留京卄日到鄕家 유경입일도향가
黃狗知人掉尾巴 황구지인도미파
躑躅笑顏如有語 척촉소안여유어
甘藷盛葉夕陽斜 감저성엽석양사
서울에 머물다 20일만에 고향 집에 오니
누렁이가 알아보고 반갑다 꼬리치네
철쭉꽃은 웃는 얼굴로 내게 할 말 있는 듯
감자밭 무성한 잎에 석양이 기우는구나
善良心地好隣人 선량심지호린인
耕了吾田稟性眞 경료오전품성진
袪袂把鋤勤勉佃 거몌파서근면전
從今日益與君親 종금일익여군친
마음씨가 선량한 이웃집 사람이
우리집 밭까지 갈아놨으니 천성이 진실하도다
나도 팔 걷어부치고 호미들고 열심히 일구어
이제부턴 하루하루 더욱 그대와 친하고 싶구나
* 卄이십 입, 掉흔들 도, 尾巴미파...꼬리, 躑躅척촉...철쭉,
甘藷감저...감자,
心地...마음씨, 마음의 본바탕, 隣이웃 린,
稟性품성...타고난 성품, 袪袂거몌…팔을 걷어부치다,
袪소매 거, 걷어올리다, 袂소매 몌,
把잡을 파, 鋤호미 서, 佃(밭)일굴 전,
日…날마다, 益…더욱더 익, 與~ : ~와
시를 써놓고 바라보며
나도 한 번 다녀 온
L교수의 별서(別墅)를 그려 본다.
봄에는 아름다운 꽃들,
여름에는 솔가지를 흔드는 훈풍(薰風),
가을이 되면 잔디 위로 떨어지는 낙엽,
그 낙엽을 긁어 모아 태우는 냄새,
겨울의 눈 덮힌 정경과 상고대…
나도 모르게 마치
내 고향이라도 되는 듯
흐뭇한 미소를 지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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