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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시(漢詩)의 맛과 멋

모자 (帽子)

입춘 우수도 지나고

날씨도 많이 풀린 것 같아

 

겨우내 쓰고 다니던

모자를 벗어서 벽에 걸어놓았다.

 

어지간히도 추웠던 이번 겨울

내 머리를 보호해 주던 고마운 저 모자.

 

십여년 전 북해도 여행시

삿포로 공항 면세점에서 산 것으로

 

버버리 문양 천으로 만들고

앞으로 짧은 창이 달린 모자.

 

저 모자를 쓰고

강화도 어느 박물관에 갔을 때

 

주인이 나를

유명한 영화 감독 L씨로 알고

인사하러 찾아올라 왔던 일도 기억이 난다.

 

아침에 모자를 찾아도 없어서

그냥 출근했더니 병원 옷장에 숨어 있던 모자.

 

다른 날 또 그런 일이 있어서

아하 병원 옷장에 또 두고 그냥 나왔구나 하며

 

출근해 열어보니 모자가 없어서

앗, 잃어버렸구나 하고 아쉬워했으나

 

저녁때 헬스장에 갔더니

탈의실장이 보관하다가 내어준 저 모자,

 

그 뿐인가, 비오던 날 밤

모임 후에 택시를 타고 왔는데

 

집에 들어와 모자가 없음을 알고

방금 갔던 식당에 연락을 해도 없다 하고

 

, 드디어 잃어버렸구나?!!!

 

혹시나 해서 다음날 아침,

아파트 정문 앞에 나가보니

 

내가 택시를 내린 장소에

 

누가 길에 버린 걸레짝처럼

흥건히 비를 맞고 있던 저 모자.

 

여름에는 걸어 놓고 오래 잊어버렸다가

겨울만 되면 나와 함께 지낸지 십여 년.

 

색도 바래지 않고 여전히 아름다워

나의 애장품 제1호라고나 할까.

 

특별한 물건 욕심은 없

 

저 모자 만큼은 정이 흠뻑들어

마누라만큼이나 반갑고 애착이 간다.

 

        帽子                       모자

 

樗材炎夏掛凄迷     저재염하괘처미        

不耐寒冬暫不携     불내한동잠불휴    

紛失追回多少次     분실추회다소차        

慇懃保我似良妻     은근보아사량처                        

 

더운 여름엔 쓸모없이 처량히 걸려있다가  

추운 겨울엔 잠시라도 없으면 못견디네

잃어버렸다가 다시 찾기도 여러 번이었지

은근히 나를 보호하는 착한 마누라 닮았네

 

樗材저재...쓸모없는 물건, 樗가죽나무 저,

   가죽나무 잎은 냄새가 나고, 줄기엔 옹기가

   많아 쓸모가 없음.

   凄迷처미...처량함, 携가질 휴, 잡을 휴.

   多少다소...(1)많고 적음 (2)많음 (3)얼마나

   慇懃은근...드러나지 않게 정성스레

 

이 詩를 지어서

나의 벗 K에게 보냈더니

몇 시간 후에 바로

같은 운자(韻字)를 써서

화운시(和韻詩)를 보내왔다.

 

       內子                      안 사람

 

非時物品記昏迷     비시물품기혼미

季至須要勉索携     계지수요면색휴

猶有平生恒貴者     유유평생항귀자

勸君親愛盡誠妻     권군친애진성처

 

제 때 아닌 물건은 기억이 희미해

필요한 철이 돼야 애써 찾게 되네,

그래도 평생 늘 귀한 게 있나니

정성스런 아내를 가까이서 사랑하시게

 

어려운 운자인데도 참으로 잘 쓰셨네.

씨(詩)는 쓰는 맛도 좋지만

지어서 벗과 詩를 주고 받는 맛은

그  흐뭇한 기분을 배가(倍加)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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